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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1절 개요   하나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고려 말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정치ㆍ사회적 혼란, 이족(異族)의 잦은 침입, 기존 가치관의 혼란,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풍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는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및 무인 세력의 등장을 촉발하였다. 이들의 분위기와 지지기반을 충분히 활용하여 이성계(李成桂)세력은 위화도 회군, 사전개혁(私田改革)을 단행하고 실권을 장악하고, 정몽주(鄭夢周) 등의 반대파를 제거하여 1392년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열었다.   새 왕조는 무엇보다 왕권강화와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대내적으로는 서민들의 사회ㆍ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해 수취제도의 개선과 과거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으로는 국경의 확립, 사대교린(事大交鄰)의 외교정책, 즉 중국 명조(明朝)와의 동반자관계구축, 북방 야인(野人) 및 남방 왜인(倭人)에 대한 평화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정권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사상적으로는 불교를 대체한 유학을 도입하여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진작시켰다. 태조ㆍ세종ㆍ세조ㆍ성종 등의 초기 임금의 통치력으로 국가기틀이 확립되고, 생산력이 증가하고, 양반문화가 확립되는 가운데 건국 이후 200년 동안 대체로 평화시대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조선 중엽에 이르러 지배체제의 모순이 드러나고 급기야 임진왜란이 발발함으로써 조선시대는 새로운 제도적 개혁을 단행하고, 실사구시의 풍토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17세기부터 서구의 문물과 사상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1876년 이후부터는 서구에서 꽃을 피운 산업혁명의 파장이 밀어 닥쳤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재빨리 간파한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하여 국가를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나갔지만,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결국 왕조의 문을 닫는 비운을 맞게 된다. 물론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갑오개혁(甲午改革), 을미개혁(乙未改革), 대한제국(大韓帝國) 탄생 등 시대에 부침하는 일련의 변화양상은 있었지만, 국가자체를 쇄신ㆍ개혁하여 강력한 국가로써 외국과의 교섭과 침략에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처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격변기의 상황을 맞아 1904년 러ㆍ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서구 열강은 자본주의 이해관계의 블록화라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에 따라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묵인하면서 조선왕조는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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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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