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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5장 고려시대   <삼국사기> 및 <고려사> 태조본기를 통하여 볼 때 태조 왕건은 태조 10년(927) 4월에 남해안 전역과 여수돌산을 공략하여 남해로선을 따라 강주(진주)를 공략하려 하였다. 동년 가을 7월에는 견훤이 대야성을 공략하고, 8월에는 강주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 점령을 통하여 견훤 지배하에 있던 주변 후백제 여러 성주가 항복했다. 견훤이 신라 왕경을 협박하므로, 신라왕은 고려 태조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1만의 병력으로 구원코자 하였으나, 원병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은 이미 경주에 입성하여 신라를 멸망시켰다. 태조 11년(경순왕<景順王>2년, 928)에 견훤이 강주를 습격하여 공략하니, 사천ㆍ곤양지역이 후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서기 935년 3월에 견훤의 장남 신검(神劒)이 강주도독으로 있던 동생 양검(良劒)과 무주도독 용검(龍劒)의 승낙을 받고 정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신검은 그의 아버지 견훤을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에 유배시키고 후백제의 왕이 되었다. 이를 빌미로 이듬해(936) 9월 왕건은 견훤을 구한다는 명분아래 신검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 내고 후백제는 약 44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곤양ㆍ사천ㆍ진주지역 일대는 약 8년동안 후백제의 세력권내에 있다가 고려 태조 19년에 고려에 영속되었다.   태조 왕건은 즉위 19년(936)만에 후삼국을 통합하고 신라말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왕권을 확립하였다. 곧 유화정책(宥和政策), 북진정책(北進政策), 숭불정책(崇佛政策)의 3대 국시(國是)를 건국이념으로 하고, 국호를 고려라 칭하며,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당시의 대외적 환경을 보면 중국은 후량ㆍ후당ㆍ후진 등 5대 10국의 혼란기였으며, 북쪽으로 거란(契丹)이 새로 일어나 발해를 멸망시키고, 왜구의 침입도 다소 소강상태에 있어서 대외적으로는 비교적 평온하였다. 반면 대내적 여건을 보면 건국 초기로 왕권은 불안정하고, 건국공신의 세력은 강대하며, 지방의 호족세력 또한 건재하여 지방관(地方官)을 파견하지도 못하고, 지방의 행정은 호족에 의하여 좌우되는 형편이었다. 사심관(事審官)제도, 기인(其人)제도,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僚書) 8편의 제작,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작성도 바로 이러한 불안한 정국을 극복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태조 때의 당면과제는 왕권강화 및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이었다.   고려 태조 23년(서기 940년)에 전국 주부군현(州府郡縣)의 명칭을 개정하였고, 이 때 강주(康州)는 진주(晋州)로 개칭되었고, 하읍현(河邑縣)은 오늘날의 사천시 곤명땅을 포함하여 곤명현(昆明縣)으로 확장 개칭되어 하동군의 속현으로 되었다. 이 때 곤명현이 설치되면서 관아의 소재지를 이곳에 두었다. 오늘까지도 곤명과 본촌이 함께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태조의 장자 2대 혜종(惠宗)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왕규(王規)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오히려 왕권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런 여파로 광종(光宗), 성종(成宗)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시행, 과거제도(科擧制度) 정비 등 과감한 왕권강화시책을 추진하였다.   고려의 국가적 기반이 확립되기 시작 한 것은 성종 때의 일이었다. 성종은 문신 최승로(崔承老)의 주장에 따라 유교(儒敎)로 정치이념을 삼고, 당제(唐制) 모방의 문물제도대개혁ㆍ전국 12목(牧) 설치ㆍ최초의 지방관 파견ㆍ주ㆍ부ㆍ군ㆍ현의 개편 등으로 지방제도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성종 2년에 12목(서기 983년)이 설치된 지역은 양주(楊州)ㆍ광주(廣州)ㆍ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공주(公州)ㆍ진주(晋州)ㆍ상주(尙州)ㆍ전주(全州)ㆍ나주(羅州)ㆍ승주(昇州)ㆍ해주(海州)ㆍ황주(黃州)의 12주이다.   현종 9년(서기 1018년)에 주제도(州制度)를 다시 목제도(牧制度)로 환원하였는데 이 때 진주목으로 되었다. 진주목에는 2개의 속군과 7개의 속현이 있었다. 2개의 속군은 강성군(江城郡:단성)ㆍ하동군이었고, 7개의 속현은 사주ㆍ악양현ㆍ영선현ㆍ진해현ㆍ곤명현ㆍ반성현ㆍ의령현이었다. 하동군 속현이었던 악양현과 곤명현을 진주목에 이속하였다. 그 밖에 화개(花開), 살천(薩川)의 두 부곡(部曲)과 창선도(彰善島:昌善)가 있었다. 속군과 속현에는 중앙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독자적인 영역과 기구로 운영되었으며, 진주목에 속한 군과 현은 모두 진주목에 파견된 지방관을 통하여 중앙정부와 연결되었다. 따라서 지방의 내치는 지방세력인 향리가 도맡아 처리하게 되었다.   예종 1년(1106)에 성종 14년에 설치하였던 영남도(嶺南道:尙州소관), 영동도(嶺東道:慶州소관), 산남도(山南道:晋州소관) 등 3도를 통합하여 경상진주도(慶尙晋州道:監營은 경주)에 귀속시켰다.   명종 1년(1171)에 경상주도(慶尙州道:監營은 상주)와 함께 양분된 진합주도(晋陜州道:감영은 진주)에 속하게 되었다. 또 명종 2년(1172)에는 하동군과 사주(泗州)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그래서 진주목 소관의 2군 7현이 1군 6현이 되었는데 곤명현은 계속 진주목의 속현으로 있었다. 그 후 명종 16년(1186)에 이미 양분되었던 양도(兩道)가 다시 통합된 경상주도(慶尙州道:監營은 尙州)에 속해졌고, 신종 7년(1204)에는 또 고쳐진 상진안동도(尙晋安東道:監營은 尙州)에 속해졌으며, 충열왕 24년(1298)에는 또 고쳐진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監營은 尙州)에 속해졌다가, 충숙왕 1년(1314)에는 경상도(慶尙道:監營은 尙州)로 굳혀진 이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려말에 이르러 공양왕 2년(1390)에는 강성군(江城郡:丹城), 의령현(宜寧縣), 진해현(鎭海縣) 등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그리하여 고려말 현재의 진주목의 속현은 곤명현을 비롯하여 악양현과 영선현, 그리고 반성현 등 4현과 그 밖에 화개 살천의 두 부곡, 그리고 흥선도(興善島:彰善島를 忠宣王때에 改稱하였다)가 있었다.   군사제도를 보면 중앙에는 성종에서 목종에 이르는 기간동안 2군ㆍ6위가 성립되고 지방에는 주현군(州縣軍)이 편성되었다. 현종 9년(1018) 지방제도정비시의 지방군사제도의 주현군(州縣軍)에 경기ㆍ5도군으로 보승군(치안ㆍ방비), 정용군, 일품군이 있었고, 양계의 군으로 초군(성ㆍ진상비군), 좌군, 우군이 있었다. 경기ㆍ5도군 중 경상도의 경우 군사도(軍事道)도 울주도ㆍ양주도ㆍ김주도ㆍ밀성도ㆍ상주목도ㆍ안동대도호부도ㆍ경상부도ㆍ진주목도ㆍ합주도ㆍ거제도ㆍ고성도ㆍ남해도 등 12개로 나누고 여기에 따라 병종의 군액(軍額)을 나타낸다. 이런 체제에서 곤명현(곤양ㆍ서포지역 포함) 군(軍)은 진주목에 편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려의 경제기반은 토지국유화의 원칙아래에서 조세를 징수하여 운영하는 수취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조세로 거두어들인 곡물 및 각종의 물품을 보관하고 운송하기 위한 기반시설과 제도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역참제와 조운제이다. 역참제와 조운제는 중국고대제도를 모방한 전국적 교통망체계이다.   역참제란 일종의 육로교통망이다. 육로교통망은 평상시에는 공무출장로, 공문전달로, 관물수송로, 조세전달로의 기능을 하지만 전시에는 군대이동ㆍ군수물자수송의 군사적 기능을 한다. 개성을 중심으로 각 주현에 거미줄망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역로(驛路) 간선(幹線)이 22도(道)가 있었고, 여기에 따른 역의 수는 525개였다. <고려사> 병지(兵志) 참역조의 전국 22도 중 산남도(山南道)가 우리 지역에 해당된다. 산남도 소속의 역참은 사주의 관율역(灌栗驛)과 곤명의 완사역(浣沙驛)을 포함하여 모두 28역참이다. 이 중 4개 역참을 제외한 24역참이 진주목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는데, 지금의 경상남도 중서부에 해당된다. 사주의 관율역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 그 역명이 ‘관율(官栗)’로 바뀌었는데 오늘날 그 정확한 위치는 사천읍 두량리 관율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주의 관율역은 거제의 오양역(烏壤驛), 고성의 배둔역(背屯驛)과 함께 진주 평거역(平居驛)으로 연결되며, 완사역은 하동의 율원역(栗原驛), 남해의 덕신역(德新驛)과 함께 역시 진주 평거역으로 연결되며 평거역은 다시 여러 역로를 통해서 개경으로 연결된다.   역과 진(津)이 고려의 주요 육상교통수단이라면, 조운(漕運) 또는 조전(漕轉)은 해상교통수단이었다. 조운제란 전국 주요 수로변(水路邊)에 조창(漕倉:또는 해운창)을 설치하고, 여기에 인근 주현의 세곡을 징수하여 모아 두었다가 선박으로 서울인 개성의 경창(京倉)에 운송하는 제도이다. 조운의 보조수단은 참운(站運)으로 내륙지방 주요 하천지역에 수참(水站:또는 수운창)을 설치하여 세곡을 징수, 운송하는 수단을 말한다. 조창제 이전의 세곡운송제도는 ‘포(浦)’였다. 당시 60여 개가 포가 전국에 있었다. 조운은 고려 초기부터 제도화되었지만 이 제도가 정비된 것은 성종 11년(992)때였다.   경상도 일원의 포는 사주(사천)의 통조포(通潮浦), 합포(合浦:마산)의 나포(螺浦)의 두 개의 포가 있었고, 고려의 12조창제가 정비된 후에는 통양창(通陽倉)과 석두창(石頭倉)이 여기에 설치되었다. 다른 지역에 비하여 조운의 기점이 되는 포(浦)의 갯수가 적은 것은 바로 왜구의 본거지인 일본과 접경하여 있기 때문에 왜구의 침탈예방과 국방상의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곤양지역의 주요 역은 완사역이고, 주요포의 조창은 통양창이었다.

<표>고려시대의 12조
조창명지명현위치비고
덕흥창(德興倉)
흥원창(興元倉)
하양창(河陽倉)
영풍창(永豊倉)
안흥창(安興倉)
진성창(鎭城倉)
해릉창(海陵倉)
부용창(芙蓉倉)
장흥창(長興倉)
해룡창(海龍倉)
통양창(通陽倉)
석두창(石頭倉)
충주(忠州)
원주(原州)
아주(牙州)
부성(富城)
보안(保安)
임피(臨陂)
나주(羅州)
영광(靈光)
영암(靈岩)
승주(昇州)
사주(泗州)
합포(合浦)
충북 충주 남한강안 (여수포)
강원 원주 한강안 (은섬포)
충남 아산 안성천 하구 (사섭포)
충남 서산 성연면
전북 부안군 관내 (제안포)
전북 군산시 관내 (조종포)
전남 무안군 관내 (통진포)
전남 영광군 관내 (부용포)
전남 영암군 관내 (조동포)
전남 여천군 관내 (조양포)
경남 사천시 관내 (통조포)
경남 마산시 관내 (나 포)
수운창

해운창








  한편 고려말에 이르러 두드려지게 나타난 현상이 왜구의 침략이었다.   충정왕 2년(1350) 2월에 왜구들이 경상도의 죽림(竹林:固城, 지금의 統營)과 거제(巨濟), 그리고 합포(合浦:馬山) 등지를 차례로 쳐들어 왔었는데, <고려사> 충정왕 2년 2월조에 “왜구의 침입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전부터 소규모적인 침구가 거의 해마다 있어 이로 인해 남해안 방면의 농어촌에 적지 않은 피해를 주어 왔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공민왕대를 거쳐 우왕 때까지는 그 규모가 전례없이 확대되어 고려에 끼친 피해는 매우 컸었는데, 이 중에서 진주와 사천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왜구 침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민왕 7년(1358) 3월에 왜구는 남해안 각산성(角山城:三千浦)에 쳐들어와서 어선 및 병선 300여 척을 불사르고 달아났는데, 2년 후인 동 9년(1360) 4월에 또 각산에 쳐들어와 약탈하여 달아났다. 그 이듬해인 동 10년(1361) 3월에는 남해현에 쳐들어 와서 민가에 방화하였고, 4월에는 고성과 거제에 쳐들어 와서 약탈하였으며, 8월에는 사주(泗州:泗川)에 쳐들어 와서 분탕질해 갔다. 동 11년(1362) 2월에는 악양현(岳陽縣)에 쳐들어 와서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여 달아났으며, 또 2년 후인 동 13년(1364) 3월에는 하동ㆍ고성ㆍ사주(泗州:泗川)를 침략한 후 분탕질 했다. 동 22년(1373) 3월에는 또 하동에 쳐들어 왔다.   우왕 2년(1376) 3월에는 진주에 쳐들어 온 것을 경상도 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가 격퇴하였으며, 11월에는 거제ㆍ고성ㆍ함안 등지를 침탈하고, 진주 반성현(班城縣)에 침범해 온 것을 도순문사 배극렴(裵克廉)이 대파시켰다. 동 4년(1378) 12월에는 하동과 진주에 쳐들어 온 것을 도순문사 배극렴이 사주(泗州:泗川)까지 추격하여 20여 급(1級은 20名)을 베었고, 동 5년(1379) 5월에는 기병 700과 보병 2,000여 명으로 진주에 침범해 오는 것을 원수(元帥) 양백연(楊伯淵)이 우인열(禹仁烈), 배극렴(裵克廉) 등과 함께 반성현(班城縣)에서 13급(260명)을 베는 등 크게 격파했으며, 8월에는 경상도원수 우인열 배극렴 등이 사주(泗州:泗川)에 쳐들어 온 것을 43급(860명)을 베어 물리쳤다. 또 9월에는 반성현을 침범하여 진을 치고 있는 것을 우인열 등이 포위하고 공격하여 34급(680명)을 베었고, 또 단계(丹溪), 거창(居昌), 야로(冶爐)를 침탈하고 가수현(嘉樹縣)에 이른 것을 도순문사 김광부(金光富)가 격멸하다가 전사했다. 이때 왜구는 산음(山陰:山淸), 함양(咸陽)과 진주에도 쳐들어와 소동을 일으켰다. 동 6년(1380) 2월에는 진주의 영선현(永善縣:固城)에 쳐들어 와서 노략질 하였고 8월에는 함양에 쳐들어와 분탕질 했다. 이해 9월에는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를 3도 도순찰사 이성계(李成桂)와 이두란(李豆蘭)이 운봉에서 섬멸하였다. 동 7년(1381) 7월에는 고성에 또 쳐들어와서 약탈하므로 남질(南秩)이 출전하여 8급(160명)을 베는 등 이를 격파했고, 동 10년(1384) 11월에는 함양에 쳐들어온 것을 도순문사 윤가관(尹可觀)과 진주목사 박자안(朴子安)이 18급(360명)을 베는 등 이를 격멸했다. 동 11년(1385) 8월에는 진주에 또 쳐들어 왔으므로 목사 이빈(李賓)이 이들과 격전을 벌렸으나 전사했다.   이와 같이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자 창왕 1년(1389) 2월에 경상도원수 박위(朴葳)는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 정벌의 장도에 올랐다. 이때 박위는 적의병선 300여 척과 섬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이와 더불어 원수 박자안(朴子安) 등은 사로잡혀 있던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하여 돌아왔다.   그러나 동 2년(1390) 7월에 노도와 같이 또 함양에 들어 닥쳤다. 이때 진주등처병마절도사(晋州等處兵馬節度使) 김상(金賞)이 이를 쳐서 크게 격파하였으나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다 전사했다.   이러한 왜구의 침구는 비단 경상도의 남해안 방면만은 아니었다. 특히 우왕시대 14년간은 경상, 전라, 충청도가 가장 심했고 경기, 강원, 함경, 황해도에 까지 미쳤었다. 남해안 연안에 접하여 있었던 곤양지역 역시 왜구의 침입시에 많은 피해를 입었으리라 추정된다.   이와 같이 고려말의 왜구 침구는 고려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고 이에 반해 이성계의 위력은 점점 커져서 결국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는 34대 475년으로 시대의 막을 내렸다.37)


  37)곤명면지편찬위원회, 곤명면지, 1987년 12월, 74쪽~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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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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