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양향토사



곤양향토사

제2절 후삼국시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화려한 귀족문화를 꽃피웠던 통일신라도 중대 말인 혜공왕 때부터 하대에 이르자 점차 국력이 쇠퇴해졌다. 진골ㆍ귀족간의 대립, 왕권쟁탈전 등 심각한 국기변동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정치적으로 강력했던 왕권이 귀족들의 왕권을 둘러싼 항쟁에 의해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항쟁은 혜공왕 4년(768) 7월에 일어난 일길창(一吉樹:7두품) 대공(大恭)이 그의 아우 아찬(阿樹:6두품) 대렴(大廉)과 모반하여 서울과 5도의 주ㆍ군에서 모두 96명의 각간(角干)들이 참가하여 3개월에 걸쳐 서로 싸워 크게 혼란하였다. 지배층간의 내란으로 자연 왕권의 지배력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혜공왕대에 대아찬(大阿樹:5두품) 김융(金融)의 반란(770), 이찬(伊樹:2두품) 김은거(金隱居)의 변란(775) 등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왕권은 약화되고 김양상(金良相)이 상대등이 되면서 중대정권에서 강력한 왕권에 의하여 배제되었던 귀족세력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김양상이 하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선덕왕으로 등극하였다.(780) 중앙정치체제의 혼란은 자연 농민에 대한 수탈로 나타나고, 민심은 흉흉하게 변해졌으며,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어 진성여왕대에는 정부의 조세독촉에 상주(사벌주)지방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난을 일으켰고 이것이 농민항쟁의 첫 시발이었다. 이외에도 원주 지방의 양길(梁吉), 그의 부하인 궁예(弓裔), 죽산(죽주)지방의 기훤(箕萱), 전주의 견훤(甄萱)등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상주 농민출신인 견훤의 후백제, 신라의 왕자인 궁예와 궁예를 제거한 왕건이 세운 고려, 신라 이렇게 후삼국이 진행되었다. 왕건이 고려를 세워 통일의 대업을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 8년(924)조에 나타나고 있는 사건인데, “경명왕은 정월에 사신을 후당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도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공납했다”고 한 점이다. 천주란 강주(진주)의 속현인 천주현(泉州縣) 즉 지금의 의령 지방이고, 절도사 역시 당(唐)의 관직명이며, 지방세력자인 왕봉규가 신라조정과 대등한 위치에서 후당(後唐)과 외교 교섭을 벌였다는 특이한 사건인 것이다.   견훤이 925년 거창 등 20여 성을 공격하여 취하자 천주절도사 왕봉규는 강주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다.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란 강주(康州:진주)의 권지사(權知事)라는 의미로, 강주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실제적인 지역통치자인 셈이다. <삼국사기> 경애왕(景哀王) 4년(927) 3월조에 의하면 “후당의 명종(明宗)이 권지강주사 왕봉규로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을 삼았다.”고 하였다. 왕봉규는 견훤에게 병합당하기 전에도 이러한 명칭으로 임언(林彦)이란 사신을 또한 후당에 파견하여, 그를 회화장군으로 봉한 데 대한 회례(回禮)로서 명종에게 예물을 보낸 것이었다. 왕봉규는 진주를 중심으로 아무데도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세력집단을 이루고 독자적으로 후당과 외교하면서 사무역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 뱃길의 출항지는 사천 지역의 어느 포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6)   이런 부분 역시 후 삼국 때에도 사천ㆍ곤양지역은 후삼국의 어느 국가로부터도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기록이라 하겠다. 즉 포상팔국시대부터 후삼국시대까지 곤양 사천ㆍ진주지역은 중앙의 특정 지배세력에 지배복속되기 보다는 기회만 되면 어느 지배 계층에도 예속되지 않고, 가급적 독자적 정치행보를 지향하려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36)사천시사편찬위원회, 사천시사(상), 2003, 384~389쪽.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