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포상팔국의 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남해안 일대의 해안 각 지역에는 기원전부터 소규모의 도읍국가들이 제각기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른 바 삼한시대의 국가들이다. 황해도에 후한의 낙랑군(樂浪郡)28))과 대방군(帶方郡)이 설치되고 이들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자, 이들 도읍국가들은 그 교역로 상에서 새로운 문물을 교류하면서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꾀하게 된다. 이들 도읍국가들은 반도내륙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비교적 선진문물을 일찍 받아 들였음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선진문물들을 토착화 시키면서 지역풍토에 맞는 국가체제를 정비해 나갔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서기 42년 이러한 도읍국가들 중 변진구야(弁辰狗耶)의 9간(干)이 모여 수로(水露)를 왕으로 추대하여 금관가야라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태동시킨다. 이 금관가야의 태동시에는 나중에 포상팔국으로 일컬어진 해안교역로 상 중요한 지점에는 각각의 도읍국가들이 저마다 토착적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금관가야의 등장 및 이들 포상팔국의 성장으로 나타나는 지역세력 끼리의 세력 확산은 필연적으로 인접국가와 마찰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그러한 마찰과 갈등의 결과로 결국 전쟁이라는 충돌사태에 까지 이르게 된다. <삼국사기>ㆍ<삼국유사> 전하는 ‘포상팔국(浦上八國, 201~212년)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포상팔국의 전쟁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 209년(내해이사금 14) 7월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라(加羅)를 침입하니 가라의 왕자가 신라에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내해이사금의 왕자인 날음(捺音, 利音이라고도 함)은 태자 우로(于老)와 함께 6부(六部)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포상팔국의 장군을 잡아 죽이고, 그들이 노략한 가라인 6,000여 명을 빼앗아 돌려보냈다. 이 전투에서 물계자(勿稽子)가 큰 공을 세웠으나, 날음으로 부터 미움을 받아 그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한다. <三國史記>,<國遺事> 신라 나해왕 14년(209) 가을 7월에 포상팔국이 모의하여 가라를 공격하니, 가라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으로 하여금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구원하게 하니 그들은 출격하여 팔국의 장군들을 쳐 죽이고, 그들에게 사로잡힌 6천인을 빼앗아 돌려보냈다.29) “물계자는 나해이사금 때의 사람이다. 집안이 대대로 미미하지만 사람됨이 활달하고 젊어서 장한 뜻이 있었다. 이때에 포상팔국이 함께 모의하고 아라국을 침입하므로 아라가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왕)이 왕손 내음(股音)으로 하여금 가까운 군(郡)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케 하니, 드디어 팔국병이 패하였다. (중략)그 뒤 3년에 골포ㆍ칠포ㆍ고사포의 3국인이 와서 갈화성을 공격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구원하여 삼국의 군사가 대패하였다.\"30) 제10대 나해왕 즉위 17년(212) 임진에 보라국ㆍ고자국(지금의 고성)ㆍ사물국(지금의 사천)등의 팔국이 힘을 합하여 변경을 침략하므로 왕이 태자 이음과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니, 팔국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때에 물계자의 군공이 으뜸이었다.31) 포상팔국난 또는 전쟁에 관한 기사인데 서로 유사한 내용이지만 다소의 차이는 보인다. 전쟁시점이 신라 나해왕 14년(서기 209년)과 나해왕 17년(서기 212년)으로 차이가 나고, 공격국도 가라국과 아라국으로 차이가 난다. 지배적인 설은 가락국(김해지역)이다. 요약컨대 포상팔국의 난은 당시 아라가야(阿羅伽耶, 김해지역)ㆍ아라국(阿羅國, 함안지역) 중심의 가야권이 해상무역을 강점하려 하고, 인근 국가를 장악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해상국가들이 강력하게 저항한 전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전쟁이 있기까지에는 이들 인접국가간의 오랜 기간 동안 크고 작은 마찰 및 무역갈등, 세력의 각축 관계 등 여러 이유들이 누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상팔국의 전쟁을 통하여 보면 포상팔국의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김해ㆍ함안 중심의 가야권 세력과는 전혀 별개의 정치 사회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선진문물의 이동경로를 고려하여 본다면 이들 지역은 김해ㆍ함안 중심의 가야권에 앞서서 선진문물을 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ㆍ함안중심의 가야권이 선진문물을 접하기 위하여 포상팔국의 여러 국가들과 선린 및 충돌을 일으키고, 급기야 포상팔국을 그들의 세력영향권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하자 포상팔국은 여기에 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이 전쟁의 과정 중에 포상팔국의 군대는 부산 앞 바다를 지나 갈화성(울산)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으며, 주로 해전(海戰)의 양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삼국사기>ㆍ<삼국유사>에 나타난 기록을 비추어 보면 포상팔국의 연합세력이 김해ㆍ함안 중심의 가야 세력보다 전력이 훨씬 막강하였다고 볼 수 있고,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김해ㆍ함안 지역의 가야 세력은 어쩔 수 없이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가야권 및 포상팔국들은 고스란히 신라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포상팔국을 초기부터 가야권에 넣어서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며, 포상팔국은 신라ㆍ가야 연합군에 패배하여 해체된 이후에 가야문화권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포상팔국은 그 지리적 특성상 신라 가야권과 교류를 자주 하였다기보다는 마한지역과 지속적인 교역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포상팔국의 전쟁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문헌사학계는 <삼국사기>ㆍ<삼국유사>의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亂)」이란 기록에 근거, 4세기대를 전기가야의 분열ㆍ쇠퇴기로 보고 있다. 「포상팔국의 난」은 마산(骨浦國)ㆍ고성(古自國)ㆍ사천(史勿國) 등 서부경남 해안지역의 8개 소국(小國)이 김해 금관국의 패권에 도전한 전란으로 신라가 군사를 보내 금관국을 구했다는 내용이다. 문헌사학계는 이 전란을, 전기가야연맹의 맹주국 금관국이 낙랑에서 들여온 선진문물을 가야 여러 나라에 다시 분배함으로써 유지해왔던 맹주권을 잃기 시작한 ‘사건’ 또는 ‘계기’로 보고 있다. 부산대 역사교육과 백승충 교수는 “3세기 이후 낙랑군의 쇠퇴, 신라의 성장으로 전기가야의 맹주인 김해지역의 위상이 약화됐는데, 이때 8개 소국이 금관국을 공격한 것”이라며 포상팔국의 난을 실제로 있었던 ‘사건’으로 본다. 이어 그는 “4세기 대가야는 내분으로 소용돌이치던 시기로 이 시기에 전기연맹체는 침체의 길을 걸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홍익대 사학과 김태식 교수는 “포상팔국의 난은 실제 전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단절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이 전란을 실제 전쟁보다는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는 ‘계기’ 로 파악한다. 그는 “이 전란은 낙랑군의 약화ㆍ소멸과 이에 따른 선진문물의 교역 단절로 인해 각 지역 세력들이 할거와 전기 연맹체제의 붕괴 조짐을 보인 4세기대(代) 가야지역의 혼란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비약적 발전기로 보는 고고학계는 앞선 시기보다 풍부하고 우수한 유물들을 근거로 4세기대를 전기가야, 즉 김해 금관국(일명 금관가야)의 최고 전성기라고 주장한다. 경성대 신경철 박물관장은 “김해 대성동ㆍ동래 복천동의 4세기대 고분군에서 나온 철제 갑옷ㆍ투구ㆍ말장식품 그리고 화려한 청동기(巴形銅器,筒形銅器 등)는 4세기가 금관가야의 최고 전성기임을 증명하는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이들 유물은 4세기대 김해 지역에 말을 이용한 격렬한 정복전쟁 그리고 일본과의 대외교섭을 장악했던 막강한 지배층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4세기대의 이러한 유물들은 같은 시기 신라 및 일본에서 나오는 유물보다 50년~100년을 앞지르는 선진문물”이라며, “4세기대는 금관가야(금관국)의 비약적 발전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4세기대 금관가야 지배집단의 양대축은 김해 대성동 및 동래 복천동 고분군 등 두 집단인데, 김해 쪽이 우위를 차지했다”고 덧붙힌다.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