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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1. 선진리성(船津里城 ; 史蹟 第50號)

  면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5㎞정도 떨어진 지점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泗川彎)의 동안(東岸) 중간(中間)에 위치하고, 구릉(丘陵)의 지형(地形)을 이용(利用)하여 구축(構築)한 평산성식(平山城式)의 토축(土築)으로 된 창성(倉城)이다.   이 창성(倉城)은 본래 법질도(法叱島)로 불리던 섬이었는데 임진, 정유재란 때는 밀려온 토사(土砂)로 인하여 서, 남, 북(西, 南, 北)의 삼면(三面)이 바다에 임(臨)하고 동쪽 일면(一面)만 육지(陸地)로 통하는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수륙요새(水陸要塞)였다. 그러나 지금은 간척사업(干拓事業)으로 인하여 서북의 이면(二面)은 바다에 연해 있으며, 성지(城地)는 모두 밭으로 개간(開墾)되어 고지(高地) 일부(一部)만 공원(公園)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성은 왜성(倭城)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군(倭軍)이 사천지역(泗川地域)을 장악한 후 이 곳을 중요거점(重要據點)으로 삼기 위하여 당시 왜장(倭將)이었던 모리길성(毛利吉成)이 성(城)을 보수(補修) 구축했다는 일본측(日本側) 기록(記錄) 즉,『도진가기(島津家記)』의 기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옛날 토성으로 추측되는 성>

  그러나 이 성(城)에 관한 우리의 관계문헌(關係文獻)이 많이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고적(古跡)을 고찰(考察)해 보면 결코 왜성(倭城)이 아니라는 확증(確證)을 얻을 수가 있다.   먼저 이 성(城)이 위치한 지명(地名)부터 살펴보면, 고려초(高麗初) 남도수군(南道水軍)에 설치한 12조창(漕倉) 중의 하나인『통양창(通陽倉)』이 자리한 곳으로, 조창(漕倉)이 설치될 무렵 이 곳의 지명(地名)을 통양포(通陽浦) 또는 통호포(通湖浦)라 하였다.

<옛 성문>

  이어 조선초기(朝鮮初期)에는 통양포(通陽浦)가 다시 통양포(通洋浦)로 변했는데 조창명(漕倉名)도 이에 따라<통양창(通洋倉)>이라 일컬었던 것이다.《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사천현조(泗川縣條)에 의하면 이 때가 태종(太宗) 3年(1403)의 일로써, 이 후 통양창(通洋倉)은 왜구(倭寇)의 빈번한 침입(侵入)으로 조운(漕運)이 폐지되고 조곡(祖穀) 운송(運送)은 육로(陸路)를 이용하게 되었다.

사적 제50호지정 표석

  《선조실록》에는 임진란 이후 이곳의 지명을 법질도(法叱島), 선창(船倉), 신채(新寨), 동양(東陽) 그리고 통양창(通洋倉) 따위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동양(東陽)과 통양(通洋)은 전사(轉寫)과정에서 통양(通陽)을 통양(通洋), 동양(東陽), 동양(東洋)으로 오사(誤寫)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신채(新寨)라 함은 사천고성(泗川古城 ; 읍성을 말함)과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나무울타리(목책)를 만들어 왜군이 주둔한 성채(倭寨)를 말한다. 조선후기에는 수군(水軍)의 진보(鎭堡)인 전선소(戰船所)가 설치되어<선진(船鎭)>또는<선소(船所)>라 했고, 구한말(舊韓末) 때는<화계(花溪)>라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병합(倂合)에 따라 연포동(蓮浦洞), 통양동(通洋洞) 일부를 편입시켜 오늘의 선진리(船津里)가 되었고, 성(城) 이름도 선진리성(船津里城)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다음은 조창지(漕倉地)로서의 선진(船津)에는 조창을 지키기 위한 창성(倉城)이 축조(築造)되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문헌(文獻)가운데<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와<사천현여지승람(泗川縣輿地勝覽)>고적조(古跡條)에 의하면,      古通陽倉 在縣南十七里 通陽浦上高麗初設倉收府近州縣租稅漕至京十二倉之   고통양창 재현남십칠리 통양포상고려초설창수부근주현조세조지경십이창지      一今有土城基址周三千八十六尺 《東國輿地志》泗川縣 古跡條   일금유토성기지주삼천팔십육척 《동국여지지》사천현 고적조      通洋倉城 在縣南十七里土築周三千八十六尺卽舊收稅之地. 新增戰船所 在縣   통양창성 재현남십칠리토축주삼천팔십육척즉구수세지지. 신증전선소 재현      南十七里通洋倉城中 《泗川縣輿地勝覽》古跡및 戰船所條   남십칠리통양창성중 《사천현여지승람》고적및 전선소조      즉, 동국여지지 사천현 고적조에   \"고려초(高麗初)에 설치한 고통양창(古通陽倉)은 현(縣)의 남쪽 17리, 통양포상(通洋浦上)에 있고 부근(附近) 고을의 조세(租稅)를 거두어 서울(당시는 개성(開城))로 조운(漕運)하였던 12조창(漕倉) 중의 하나로 지금도 둘레가 3,086尺이 남아 있다”   라고 하였고,      또 사천현여지승람 고적조와 전선소조에   \"통양창성(通洋倉城)은 현의 남쪽 17里에 있고 토성(土城)의 둘레가 3,086尺이며 즉 옛날에 조세(租稅)를 거두어 들인 곳이다. 전선소(戰船所)는 현(縣)에서 남쪽 17里인 통양창성(通洋倉城) 안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두 기록(記錄)에서 세 가지의 공통점(共通點)을 볼 수 있다.   첫째는 거리가 현청에서 17리(里)이고,   둘째는 조세(租稅)를 거두어들인 창(倉)이 있는 점,   셋째는 토성지(土城址)의 둘레가 3,086尺의 규모(規模)인 점이다.   여기에서 거리 17리는 1리를 약 540m로 계산하면 약 9.18Km가 되므로 당시 현청(縣廳)의 소재지(所在地)인 사천읍(泗川邑)에서 조창지(漕倉地)인 선진(船津)까지는 10여㎞ 정도가 되므로 지금의 거리와 비슷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토성지(土城址)는 창성(倉城)으로서 지금도 그 형적(形跡)의 일부가 역력히 남아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여지껏 이 토성지(土城址)는 옛 당병성(唐兵城)터, 또는 왜성(倭城)으로 잘못 알려져 온 것이다.   한편 \"통양창(通陽倉)의 위치가 동금동의 통창에 있었다는 주장(主張)이 있다. 그것은 옛날 삼천포시에서 펴낸<와룡산(臥龍山)의 정기(精氣) ; 1981년간>51~61쪽에 보면 \'통양창지(通陽倉址)\'에 관한 내용이 그것인데, 이의 내용(內容)을 보면 고려 때의 조창지(漕倉址)를 기술(記述)하면서 동금동의 통창을 통양창지로 오기하고 있다. 이는 어디서 나온 전거(典據)인지는 모르겠으나 선진에 삼천진이 설치된 내용을 보고 삼천포와의 지명이 비슷한 내용으로 잘못 비정(比定)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라는 사천군지의 내용이 있는데 대동지지 진주목의 진보혁폐조를 살펴보면 ‘삼천포보(三川浦堡;남쪽으로 74리, 말문면성(末文面城)이다. 둘레가 2천50척이며, 권관을 두었다가 뒤에 사천으로 옮겼고 또 고성으로 옮겼다.’라고 되어 있고 창고조에는 ‘별향창(別餉倉), 통창(統倉) ; 모두 말문면에 있다.’라는 기록에서 의문점은 해결되었다고 본다.   조창의 기능(機能)은 원래 국가경영(國家經營)의 재정적 세원인 조곡을 거두어 보관했다가 해로(海路)를 통하여 중앙에 조운(漕運)한 기지였으므로,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앙에서 판관이 파견(派遺)되어 이를 관장하였고, 한편으로는 해구(海寇)의 침입과 약탈(掠奪)을 막기 위해 창성을 쌓고 수군이 방어(防禦)하였으니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據點)이였다. 이와 같은 조창이 고려 초부터 이곳에 택지(擇地)된 까닭은 지정학상으로 서부경남의 중요 관문(關門)으로서 수륙요충지(水陸要衝地)였기 때문이다. 또 향토사적으로 고찰(考察)할 때 상고시대부터 이 지역은 일찌기 수도경작(水稻耕作)이 발달하여 물산이 풍부하였고, 또 바닷길이 열려 삼한 때부터 무역(貿易)을 시작하여 포(布), 철(鐵)등의 물자를 중국과 일본에 교역하였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임진난시 이 성을 중심으로 바다와 육지에서 두 차례의 큰 싸움이 있었다. 그 하나는 해전(海戰)으로서 선조 25년(1592년) 5월 29일 함선(艦船) 23척을 이끌고 여수본영(麗水本營)을 떠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은 선진(船津) 앞바다에 이르러 거북선을 앞세우고 왜적과의 치열(熾烈)한 싸움 끝에 적선(敵船) 13척을 모조리 쳐부수는 전과를 올렸으니 이 싸움이 이충무공의 제2차 해전으로 소위<사천해전(泗川海戰)>이라고 하며, 이 때 우리나라 해전사상(海戰史上) 처음으로 거북선이 등장(登場)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육전(陸戰)으로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무술년(戊戌年 ; 1598) 10월 초하루, 명나라 중로제독(中路提督) 동일원(董一元)은 마병(馬兵), 보병(步兵)으로 구성된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이 선진리성(船津里城)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공격했다. 적은 8000여명의 병력으로 아군(我軍)의 1/4정도였다. 이 때 보병유격장(步兵遊擊將) 팽신고(彭信古)는 적의 성채(城寨)를 공격하던 중 진중(陣中)에서 화포(火砲)의 오발로 탄약궤(彈藥櫃)에 인화(引火)되어 화염(火焰)이 치솟고 아군이 혼란에 빠지자 호기(好機)를 포착한 성채(城寨)의 적이 역습(逆襲)으로 나와, 먼저 팽신고의 포진지(砲陳地)를 유린하였다. 이 때 유격장 아국기(芽國器)와 엽방영(葉邦榮)이 성채 북쪽의 고지에서 잔병(殘兵)을 수습, 적 출격대의 배후로 돌아 성으로 돌진(突進)하여 성에서 나온 적을 괴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나 아군은 먼저 기병제장(騎兵諸將)의 전열(戰列)이 흩어져 북으로 패주했다. 이 싸움에서 아군은 수 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당시 치욕(恥辱)의 전흔(戰痕)이 지금의 선진리성 어귀에 위치한<조명군총(朝明軍塚)>인 것이다.   중국(中國)《명사(明史)》券21 동일원조(董一元條)에는 당시의 전투상황(戰鬪狀況)을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하였다.      「(前略) 寨三面臨江, 一面通陸, 引海爲濠, 海艘泊寨下千計, 築金海,   「(전략) 채삼면임강, 일면육통, 인해위호, 해소박채하천계, 축김해,      固城爲左右翼. 一元分馬步來攻, 步兵遊擊彭信古大棓擊寨, 碎其數處.   고성위좌우익. 일원분마보래공, 보병유격팽신고대부격채, 쇄기수처.      衆軍進逼賊濠, 毁其柵. 忽營中礮裂, 煙焰漲千. 賊乘勢衝擊, 固城援賊亦至   중군진핍적호, 훼기책. 홀영중포열, 연염장천, 적승세충격, 고성원적역지.      騎兵諸將先奔, 一元亦遠晉州.....」   기병제장선분, 일원역원진주.....」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26년 ; 1531, 6월 간행) 산천조에   ‘통양포(通洋浦);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로 되어 있고 고적조에는 ‘통양창성(通洋倉城);현 남쪽 17리 지점에 있다. 토축(土築)이며 둘레는 3천86척인데, 곧 옛날 세(稅)를 거두던 곳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을 볼 때 통양창성과 통양포는 같은 지점이 아니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는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대동지지(고산자 김정호가 철종13년 ; 1662부터 고종3년 ; 1866에 집필함) 진보혁폐조에   ‘삼천포보(三千浦堡); 남으로 20리에 있는데 진주로부터 통양포(通陽浦)로 옮겼다. 성종(成宗)19년에 성을 쌓고 권관(權管)을 두었는데 후에 고성으로 옮겼다. 선조30년 정유재란에 석만자(石曼子)가 이 곳을 근거로 일어났다. 울산의 도산(島山)과 순천의 왜교(倭橋)를 삼굴(三窟)이라 칭한다. 이 보에 있는 성을 왜증성(倭甑城)이라 한다.’ 로 기록되고      창고조에는   ‘통양창(通陽倉); 고려 12개 조창(漕倉)의 하나이다. 창성(倉城)은 현 남쪽으로 17리에 있는데 나무로 쌓았고 둘레는 3천86척으로 선조 정유재란 때 석만자가 이 곳을 또한 근거로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누정조에는   ‘비우당(備虞堂);남쪽으로 20리에 있는데 배가 정박한다.’ 라고 되어 있다.      사천군지 830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사천현여지승람’이 아니고 ‘사천현읍지(1832년간)’임을 바로 잡고자 한다.   《사천현여지승람(泗川縣輿地勝覽)》(1699年刊)에 의하면      “숙종조(肅宗朝)때 선진리에는 수군(水軍)의 전선소(戰船所) 즉, 진보(鎭堡)가 설치되어 전선(戰船), 병선(兵船) 각 1척과 사후선(伺侯船:偵探船) 2척이 상시(常時) 배치되어 해안방어(海岸防禦)에 임하고 있었다. 성내에는 비우당(備虞堂)과 수전군기고(水戰軍器庫), 그리고 관해정(觀海亭)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병력(兵力)으로는 수군(水軍) 40, 주사사(舟師射) 및 포격(砲格) 도합 156명이었다.”      사천현여지승람기묘수정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증전선소조에 전선소는 현의 남쪽17리 지점 통양창성 안에 있고 전선1척, 병선1척, 사후선2척, 수군군기고가 선소에 있다. 군기고에는 흑각궁100장, 교자궁5장, 편전304부, 통아304개, 장전304부, 별대전20부, 조총7병, 삼혈총1병, 화약372근, 연환8200개, 장창8병, 환도8병, 오방신기5면, 각기5면, 황자총통1병, 별황자총통7병, 대변량23석, 증미10석, 미식3석, 별향미283석10두7합6리5분, 전선가미675석12두4승3합5리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1832년에 간행된 사천현읍지 진보조에   ‘진보는 선진에 있으며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벌장 1인, 병선장 1인, 군기감관 1인이 있다.   (진보 선진 전선1척 병선1척 사후선1척 벌장1인 병선장1인 군기감관1인;鎭堡 船鎭 戰船一隻 兵船一隻 伺候船一隻 伐將一人 兵船將一人 軍器監官一人)’      또 수군군기고조에는   \"수군군기고는 선진에 있고 무기로는 흑각궁 55장, 교자궁 135장, 수노궁 10장, 구기편전304부, 별대전 20부, 철갑주 68부, 저자총 3부, 지차중구철환 810개, 지차대수철환 178개, 지차대염환 20개, 수철환 75개, 중수철환 40개, 차중수철환 25개, 차중수철환 86개, 지지차수철환 25개, 지차중염환 61개, 차대수철환 27개, 소소수철환 100개, 유제현자총 13위, 정철백자총 4위, 정철별황자총 4위, 염환 3개, 정철자포 24위, 잠철 24개, 황자총 5자루, 삼혈총 1자루, 현자숙동포 2위, 조총 17자루, 황자동숙포 2위, 소연환 19350개, 화약 770근, 화승 17사리, 천혈추 2, 화전 90자루, 삼지창 11자루, 단창 13자루, 환도 8자루, 철방패 30좌, 임기 1면, 오방신기 10면, 고초기 10면, 나팔 1쌍, 태평소 1쌍, 멸화기 12면, 화철 5, 구석소(잠자는데 필요한 것)장막 1건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공해(公廨)조에는   ‘비우당이 현 남쪽 20리 선진에 있다. (비우당 재현남이십리선진 ; 備虞堂 在縣南二十里船津)’라는 기록도 보인다.      비우당에 대하여 조금 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통양포와 비우당은 현기에서 20리라고 되어있고 선진성, 선소, 통양창성은 17리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약간 거리가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조금널을 지나 신촌마을 아래, 현재 재향군인회에서 방파제를 막아 놓은 곳에 옛날에 굴강같이 배를 정박할 수 있었던 곳이라는 구전(口傳)이 있는 것을 보면 이 곳이 아닌가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육태림(陸台林)이 쓴<동성부(東城賦)>에 의하면,      “능로군(能櫓軍) 145, 포수(砲手) 34, 화포수(火砲手) 110, 사궁(射弓) 30명 등이 상주(常 駐)하고, 영조 35년(1760)에 설치한 진주 가산창(駕山倉)의 방어임무 뿐 아니라 수시로 부조(赴操)할 때 호위를 맡았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비석

  한편 대원군(大院君)은 연해지방(沿海地方)을 중심으로 하여 해안방어(海岸防禦)의 요충(要衝)과 변방의 중요(重要)한 곳에 많은 진(鎭)을 설치했다. 이 때 외적(外敵) 방어에 효과가 많은 포군(砲軍)을 많이 양성(養成)하였는데 포군은 조총(鳥銃)을 주로 사용하는 총수(銃手)와 화포(火砲)를 사용하는 포군(砲軍)이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舊韓末) 때인 1895년(高宗32) 통제영(通制營)을 비롯하여 각 도(道)의 수영(水營) 이하 모든 군영(軍營)을 해체하고 배를 비롯한 모든 장비(裝備)는 군부(軍部)로 넘어 갔는데, 선진(船津)에 진보(鎭堡)도 이때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앞서 1894년(고종31년)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났을 때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선진리성내(船津里城內)에 있던 군기고(軍器庫)의 무기(武器) 일부를 탈취하여 하동군(河東郡) 옥종면 대곡리와 북방리에 걸쳐 있는 고성당산(高城堂山)에서 포덕35년(1894) 일군(日軍)과 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선진리성(船津里城)은 일제 때 일제당국(日帝當局)에 의해 임진란시(壬辰亂時) 일본군(日本軍) 전승지(戰勝地)라 하여 일인들의 관심을 끌은 바 있고, 1936년 5월에는 이 성지(城址)를 고적(古跡) 제81호로 지정(指定)하기도 하였다.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비>

  무술전투(戊戌戰鬪) 당시 왜장(倭將)이었던 도진의홍(島津義弘)의 후예(後裔)들이 1918년경, 이 성터의 일부 토지를 매수(買收), 또는 기부(寄附)받아 공원(公園)으로 조성(造成)하고, 공원정상(公園頂上)에다 <사천신채전첩지비(泗川新寨戰捷之碑)>라 새긴 비석(碑石)을 세웠으며, 때때로 일군(日軍) 장성(將星)들이 그들 선조(先祖)의 전적지(戰跡地)라 하여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碑石)은 해방(解放)되던 그 해 주민들에 의해 파괴(破壞)되었다. 다만 그때 심은 벚나무 천 여 주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78년 사천군에서 사업비(事業費) 4,700여 만 원을 들여 선진리성 경내(境內)에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비(李忠武公泗川海戰勝捷碑)>를 세우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께서 이 곳 선진(船津)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을 격파한 국난극복사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 일인들이 세웠던 비석(碑石)자리에는 6.25전쟁(戰爭)때 산화(散華)한 공군장병 전몰자(戰歿者)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충령비(忠靈碑)>가 우뚝 서있다.

공군장병 전몰자 충령비

  현재 경내에는 편의시설 1동과 돌계단 70m가 설치되어 있고 입구에는 1989년부터 부지를 매입하여 넓은 주차장을 마련하므로써 이 곳을 찾는 관광객의 편의 뿐 아니라 공원(公園)으로서 면모(面貌)를 새롭게 하고 있으며 1997년부터 매년 4월 초순에 벚꽃축제가 열리고 있고 1999년 부지 내에 열린문화마당을 축조하여 청소년들의 새 놀이공간으로 조성되고 있다.

열린문화마당은 문화관광부가 문화공간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농촌지역에 공연예술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사업으로 전국 처음으로 선진에서 첫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1999년 4월 2일 개장한 열린문화마당은 선진리 773번지 일대 선진리성 안에 있으며 330명의 관람석의 갖춘 연면적 176평 규모이다. 1998년 8월 사천시가 문화관광부에 신청서를 제출해 그해 9월 대상지역으로 확정된 뒤 국비 5000만원과 시비 5450만원 등 1억여 원을 들여 1999년 1월 대지면적 1726㎡, 시설면적 582㎡, 건축면적 15㎡의 규모로 공사에 착공해 1999년 3월말에 완공했다. 이 열린문화마당이 개장되므로써 그동안 별다른 야외 공연장이 없던 우리지역에서 다양한 야외 공연이 펼쳐질 것으로 보여 지역민에게 한 차원 높은 문화예술을 선사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새천년을 맞아 2000년 1월 1일 새천년맞이 시민 소원기원매향행사를 이충무공의 얼이 살아 숨쉬는 선진리성 문화마당 뒤편에 매향비를 건립했다. 향나무는 사천청사의 한 그루와 삼천포청사의 한 그루를 12만 시민의 의미로 1만2천본의 향으로 읍면동 14개의 향함에 넣고 12포의 소금으로 덮고 그 위에 와룡산의 단단한 바위로 덮개를 하고 그 위에 봉명산의 바위를 세워 글을 새겼다. 매향행사가 일어난 시기는 대개 고려 말이나 조선조 초기 나라가 외침에 시달리고 있을때 북쪽에는 여진족의 침략이 끊이지 않고 남쪽에는 왜구의 침탈이 빈번한 때 우리 조상들이 외침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미륵보살의 환생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사천에는 곤양면 흥사리에 고려 우왕 13년(1387)에 달공이란 스님이 남녀신도 4천1백명과 더불어 미륵보살이 환생하기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면서 향을 땅에 묻은 흥사매향비와 향촌동의 조선조 태종 18년(1418)에 이지역 승려 및 신도 30여명이 스륙무차대회(水陸無遮大會 : 聖凡, 道俗, 貴賤, 上下의 구별없이 일체평등으로 財施와 法施를 하는 대법회)를 베풀면서 포락(浦落)에 향목을 묻어 뱃길에 행운을 빈 매향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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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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