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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이장군의 집터>

1. 이장군과 용머리   때는 임진왜란 전 용정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이다.   지금의 용정마을을 옛날부터 용머리라고 불러 왔는데 이 마을에는 본관이 경주인 이씨들이 살고 있는 집성촌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중 합천이씨가 한 가구 살았는데 합천이씨인 터벅머리 영감의 나이가 오십이 넘도록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어 고심하던 중 평소에 찾아가곤 하던 구룡암에 가서 스님에게 이 고민을 이야기하니 여기 구룡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부부가 지극정성으로 100일 기도를 한 결과 부인에게 길조의 태몽이 있은 후 곧 태기가 있었다. 열 달 만에 해산하려 할 때 집안에는 서기가 자욱이 서리고 마을 어귀에는 까치들이 날아들어 신생아의 출산을 축복해 주었다. 출산을 하고 난 후 일주일 만에 산모가 기저귀를 빨고 집에 돌아와 보니 방안에 있어야 할 아기가 없었다.

<이장군이 돌팔매질할때의 돌>

  산모는 당황하여 온 방안을 ??히 뒤지다 문득 천정을 보니 아기가 천정에 등을 붙이고 아랫쪽을 보고 웃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있고부터 아기 부모는 이 일을 동네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극비에 붙이고 아이의 양육에 각별히 힘을 기울었다. 아이가 밖에서 활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부터는 힘이 세고 통솔력이 뛰어나 언제나 동네 아이들의 놀이대장이 되었다. 돌팔매질을 할 때마다 동네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멀리 던졌다. 8세 때는 성인들과 맞먹는 힘을 발휘하여 동네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또한 생각도 깊어 어른스러움을 보여 주었다.    아이의 부모는 나날이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를 구룡암으로 보내어 공부를 시키기로 결정하고 용머리에서 곧바로 구룡암으로 향했다. 물론 구룡암의 주지 스님도 쾌히 승낙하여 그 곳에서 숙식하며 학문과 무술연마에 정진토록 하였다. 묵묵히 공부만 하던 소년의 거동을 지켜보던 주지스님이 하루는 소년의 방으로 들어가서 잠자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잠을 자는 모습이 보통 사람과 달라 몸을 만져보니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고 밖에서 움직이다가 갓 들어온 사람의 체온이었다. 주지 스님은 한밤중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여 밤마다 소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매일 밤 소년의 옷은 이슬에 젖어 있었으며 바지가랭이에는 젖은 흙이 묻어있고 손발은 차가왔다. 다음날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한밤중에 밖으로 나가는 소년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형체만 바라보며 뒤를 밟았으나 걸음이 얼마나 날샌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수 십 번 반복했으나 결국은 종적을 놓쳐 버렸다가 오랜 시일이 지나면서 지나가는 길목을 차츰차츰 줄여 미리 대기하여 있다가 지나가는 것을 밟아 소년의 수련하는 장소를 찾게 되었다. 그 수련 장소는 구룡산의 봉화봉으로 확인을 하고 밤이 이슥하여지자 단단히 준비를 하고 봉화봉 주위에서 숨어 기다렸다. 소년은 정확한 시간에 봉우리에 올라서서 호흡을 가다듬은 후 신체 단련의 한가지로 달리기를 하는데 얼마나 빠른지 소년이 달리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발자국의 흔적이 없어 계속 앞으로 추적한 결과 첫발자국이 와룡산 아래 봉우리에 찍힌 흔적이 발견되고 다음은 와룡산 제일봉에 발자국을 남겼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산 봉우리에서 저산 봉우리 위만 건너 다녔다. 하룻밤에 몇 번이나 봉우리를 밟는지 지켜보기 위하여 제일봉 밑에 숨어서 지켰는데 옷자락이 펄럭하고 지난 뒤는 벌써 흔적을 놓인 후였고 발자국은 정확하게 먼저 밟았던 자리를 어김없이 밟고 지나갔다. 첫닭이 울 때까지 300번을 왕래한 흔적을 막대기를 꺾어 모은 숫자가 말해 주었으며 하룻밤의 훈련 과정을 지켜보기 위하여 소년의 뒤를 이렇게 추적하여 갔다.    와룡산 중턱에 한 도승이 바위 위에 정좌를 해있고 그 아래 소년이 부복하여 있었다. 그 도승은 와룡산에서 은거하는 도인으로서 앞일을 내다보고 천기를 읽을 줄 아는 분이였다.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유능한 인재를 길러 나라의 기둥으로 삼으려고 이 소년을 찾아내어 학문과 병술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였다. 이러한 사실을 몇 개월에 걸쳐 쭈욱 지켜본 구룡암 주지스님은 혼자 자책하고 궁리 했으나 도저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자기 능력이 못 미침을 깨닫고는 소년의 집을 찾아 갔다. 스님은 그간의 사정을 소상하게 부모님께 전달하고 대책을 강구했으나 별로 신통한 방법이 없었다. 일단 소년을 집으로 불러들여 바깥출입을 통제하였다. 이미 소년은 마을의 누구에게서나 이장군이라는 칭호로 불리어지고 있었다.

 나이가 20세가 되니 훤칠한 키에 딱 벌어진 어깨하며 대장부의 기개가 철철 넘쳐흐르고 눈은 용의 눈을 박은 듯 하여 누가 보아도 범상치 않은 얼굴이었는데 대장부의 표상으로 삼을 만 했다. 학문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사서삼경과 제자백가는 물론 자기에게 필요한 학문을 두루 습득하여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완벽한 선비요 무인이었다. 이 때만 하여도 나라를 다스리는 조정에서는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여 출중한 인재는 빛도 보기 전에 죽이는 당파싸움이 계속되는 세상이라 부모의 마음은 애가 탔다. 부모 마음으로는 이장군이 행여나 나라의 역모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결국은 자식을 죽이기로 하고 이장군이 잠든 뒤 부엌칼과 몽둥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칼로 찌르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놓고 나왔다. 천하 없는 장사라도 그렇게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고는 살 수 없다는 판단을 한 후였다. 이튿날 아침 소에게 여물을 끓여주기 위하여 밖으로 나온 아버지는 기절을 할 듯이 놀랐다. 언제 끓였는지 쇠죽솥에는 여물이 가득히 삶겨져 있고 마당도 깨끗이 쓸리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인에게 물었으나 그녀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는 사실이었다. 행여나 하고 아들의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방안에는 피 흘린 흔적이나 시체도 없고 깨끗이 치워진 방에 이불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 두리번거렸으나 이장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부는 근심 속에 아침밥을 들고 있는데 인기척이 있어서 방문을 열어보니 마당에는 어젯밤에 죽인 자식이 멀쩡하게 서있는데 머리에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있었다. 심한 운동을 하고 온 뒤였다. 조반을 끝내고 이장군은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간의 이야기를 하였다. 사실은 부모가 자기를 죽이기 위해 모의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자기는 국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일념뿐이라는 것과 역모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리고 꼭 자신이 역모를 꾀하여 멸문지화의 한을 남길까 두렵다면 자기가 죽어 가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말씀드렸다.

<이장군이 탔던 말>

  이미 이장군의 몸에는 창칼이 불침하므로 흉기로는 죽일 수 없고 꼭 죽이려면 자기 겨드랑이에 세 개의 비늘이 붙어 있는데 그것을 떼어내고 삼대(대마의 줄기)로 허벅지를 세 번 때리면 죽을 것이란 말을 했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조 서 말과 참깨 서 말을 함께 묻어주라는 유언을 하였다.   부모는 이장군이 죽은 뒤 아들의 유언대로 지금의 송지리와 구월리의 경계지점에 있는 똥멧등에 조 서 말과 참깨 서 말을 함께 묻어 주었다. 이장군이 죽은 뒤 송지리 해변에 백마 한필이 나타나서 해지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길게 울부짖고는 용머리마을의 끝자락에 있는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죽었다고 한다. 그 때 말이 부딪힌 바위에 구멍이 생겼는데 그 모양이 용의 눈과 같다하여 용안바위 또는 구멍바위라고 하는데 그 바위가 지금은 세월의 흐름에 견디지 못하여 구멍부분이 침식되어 반으로 갈라져 있다. 한편 이장군의 행적이 서울까지 전해져서 조정에서도 알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을 몰래 보내어 진상 조사를 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밀파된 풍수는 이 곳에 도착하여 구룡암 주지스님의 안내로 이장군이 뭍혀 있는 무덤과 주위의 지세를 살펴보고는 좋은 장소임을 알고 묘위에 앉아서 대나무를 3자 길이로 잘라 끝을 뽀족하게 다듬어서 묘 중앙부를 깊이 찔렀다. 그러자 대나무 속으로 선혈이 철철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급히 무덤을 파헤치자 서기가 하늘을 메우고 안개처럼 뽀얗게 휩싸인 가운데 백마를 탄 이장군이 말에서 떨어지는 것이 스님의 눈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참깨와 조는 그 숫자대로 군사가 되어 어마어마한 병력이 되어 집결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장군은 말에서 떨어지면서 풍수를 보고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의 기상을 한번 힘 있게 펼쳐 곧 닥쳐올 난리를 막고 나라를 구했을 텐데 당신 같은 소인배 때문에 천추의 한을 남기고 간다”라는 말을 남기고 말 위에서 추락하여 사라져 버리고 무덤 주위는 안개만 자욱하였다. 이것을 본 스님은 길게 탄식하고 자취를 감추어 다시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용머리에 가면 그가 태어난 본가의 집터가 있고 말 형상의 바위와 그 당시 이장군이 돌팔매질을 하던 바위가 세 개 남아 있는데 장정 네댓 명이 겨우 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이것이 천추의 한을 남기고 간 이장군과 용머리의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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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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