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용현향토사



용현향토사

6. 상례(喪禮)   우리의 통과의례(通過儀禮) 중 아직까지 옛 풍속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 상례(喪禮)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옛날에는 일가 친척들이 앞장서서 의식을 집행했지만 지금은 장의사에 맡기는 것이 다르긴 해도 의식 절차는 대부분 옛 풍속을 답습하고 있다. 장례란 사망하는 순간부터 망제(忘祭)를 지낼 때까지의 과정을 말하며 하나하나 모두가 망자(亡者)에 대한 지극한 정성이 깃들여 있다. 상례 역시 가문과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이면서 공통된 의식을 추려서 기술한다.

 1) 초종(初終)   초종(初終)은 운명한 이후 염(殮)을 할 때까지의 절차를 말하는데 환자의 병세가 위중해지면 사랑방에 거처하던 남자라도 안방으로 모셔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히고 아랫목에 누인 후에 자녀들을 모이게 한다. 자식들은 환자의 머리맡에 모여 앉아 유언(遺言)이 있으면 기록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운명을 지켜본다. 숨이 완전히 멎은 상태를 운명으로 여기는데 모든 자녀들이 운명을 지켜보면 망자(亡者)는 ‘복받은 사람’이 되고 만약 운명을 지켜보지 못한 아들은 ‘불효자’라고 생각했다.   젊어서 운명을 하게 되면 배우자나 자식들이 이름을 크게 부르는데 이는 저승길을 가던 망자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되돌아 올 것이라는 습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숨을 완전히 거둔 것이 확인되면 널빤지를 들여와 뒷문쪽에 놓고 그 아래에 짚 세뭉치를 괴고 위에 시신을 눕힌다. 발은 아랫목에 머리는 윗목으로 향하게 하는데 이것은 머리를 북으로 둔다고 하는 것이며 동쪽으로 눕히는 경우도 있는데 동향은 생성, 재생의 방위이므로 되살아 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다. 집안에 따라 널빤지 대신에 문짝을 사용하기도 한다.   운명과 동시에 상주(喪主)는 머리를 풀고 “아이고 아이고”하는 곡(哭)을 하고 여자들은 금은 따위의 패물을 떼고 곡을 한다. 그러는 한편 시신의 손발이 굳어지기 전에 살살 주물러서 곧게 편 다음 간단하게 묶고 명주솜으로 귀와 코를 막고 턱을 괴어 입을 다물게 한 후에 홑이불이나 명주로 시신을 덮는다. 중풍(中風)등의 고질(痼疾)로 수족이 오그라져 있다면 판자를 받쳐 염을 할 때까지 단단히 묶기도 한다.   고성이 나면 마을 사람들도 일손을 멈추고 출상(出喪)때까지 조용히 하는데 방아머리도 괴어 놓는 것을 예의로 여겼다.   특히 전(煎)을 부치지 않으며 고양이를 기르는 집은 모두 고방에 가두어 둔다. 고양이가 상가 지붕에 오르거나 굴뚝에 들어가면 시신(屍身)이 일어선다는 속신(俗信)이 있기 때문인데 상가에서는 서둘러 굴뚝을 짚과 같은 것으로 막는다. 만일 시신이 일어나면 죽은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가 와서 마치 산사람 대하듯이 “이런 행동하면 자식들이 놀라네”하면서 조용히 눕힌다.   상가에서는 남자 한사람이 죽은 이의 적삼을 들고 지붕위로 던져 올리면서 “돌아나 보고 옷이나 갖고 가소”하고 외치는데 이를 ‘혼 부르기’ 또는 ‘고복(皐復)’이라 한다. 지붕 위의 옷은 입관 후에 내려 깨끗한 곳에 보관했다가 다른 유의(遺衣)와 함께 출상후에 태운다.   고복이 끝나면 상주들은 남루한 옷을 입는데 망자(亡者)가 부친이면 오른쪽 어깨를, 모친이면 왼쪽 어깨를 내 놓고 한 팔만 끼어 입는다. 자식들은 부모를 돌아가시게 한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 행색을 하는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저승사자를 위한 사자상(使者床)을 차린다. 앞마당 한가운데 멍석을 깔고 사잣밥, 대머리밥, 개머리밥, 베머리밥으로 불리는 밥 세 그릇과 물 세 그릇, 소금 세 접시, 간장 세 종지, 돈 얼마를 상위에 놓고 그 옆에는 짚신 세 켤레를 놓아둔다. 저승사자는 세명이 오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돈은 노자의 하나다. 특히 소금과 간장을 놓는 것은 저승사자가 이것을 먹고 저승으로 가는 길에 목이 말라 자주 쉬어 가면 망자(亡者)도 쉴 수 있다는 뜻에서다. 상주들은 사자상 앞에 절을 세 번하며 상의 음식은 마당의 동서남북을 향해 흩어 뿌리고 그릇은 엎어놓는다.   상가에서는 상복(喪服)을 짓고 부고(訃告)를 돌리느라 바빠진다. 옛날에는 부음(訃音)과 고기(告期)를 따로 보냈으나 요즘은 한꺼번에 묶어 부고 하나만 보내고 있다. 부음은 어느 집안의 누가 어느 날 별세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고 보름 후에 발인 일시와 장지 및 하관 일시를 통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장례기간이 길었던 유교사회의 지체 높은 집안에서 행하던 풍속이다.   시신을 모신 뒤 제상을 차린다. 제상 위에는 혼백이 단긴 상자를 두는데 상자 안에는 백지에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 쓴 지방(紙榜)과 오색 실이 들어 있다. 상 왼편에는 담뱃대와 쌈지, 염낭, 안경을 얹어 놓는다. 식사 때가 되면 평소와 같이 제상 앞에 음식을 차려 놓는데 아침과 밤에는 ‘아침제’와 ‘밤중제’를 올리며 그럴 때마다 곡을 한다. 곡을 할 때 아들 딸 며느리는 “아이고 아이고”하며, 사위 조카 등은 “어이 어이”하는데 근래에는 핵가족화와 더불어 사위-조카를 구분하지 않고 “아이고 아이고”하기에 이르렀다.

 2) 염습과 입관      시신을 목욕시키고 옷을 입히는 것을 염습(殮襲)이라 한다. 그리고 시신을 관에 안치하는 것이 입관(入棺)이다. 시신은 향나무 삶은 물이나 쑥 삶은 물로 씻는데 시신을 옷을 벗기고 흩어불로 덮은 다음 솜이나 수건으로 물을 찍어 온 몸을 고루 닦아 내고 마른 수건으로 다시 한번 고루 몸을 닦아 말린다. 여자는 머리를 빗기고 버드나무로 만든 비녀로 쪽을 지어 주며 맏상제는 쌀 세 수저(버드나무로 만든)를 입에 떠 넣고 입을 다물게 하니 이를 ‘마지밥’이라 부른다. 이는 시신이라도 굶겨서는 안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상주들은 바지와 동정이 없는 저고리를 입히고 겉은 삼베, 안은 명주로 된 두루마기, 즉 수의(壽衣)를 입힌다. 그리고 시(時)에 맞춰 염을 한다. 시신의 자세를 고르게 하고 임시로 묶었던 매듭은 목욕을 할 때 풀었으니 조선종이 꼰 끈으로 차례로 묶어 14매듭을 지어 놓는다. 집안에 따라 12매듭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입관을 할 때는 미리 준비해 둔 관의 뚜껑을 벗기고 비단으로 된 ‘곽이불’을 깐 다음 시신을 뉘어 놓고 참종이로 뭉쳐 싼 짚을 시신이 움직이지 않도록 관속을 채운다. 망자가 입던 옷으로 관을 채우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시신을 목욕시킬 때 자른 손톱과 발톱을 담은 주머니도 관속에 넣고 관 뚜껑을 닫는데 이때 상주들은 임종 못지 않게 슬프게 운다.   요즘은 입관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상객들이 시신 앞에 절을 하지만 옛날에는 입관이 끝난 후라야 문상객을 받았다. 문상객이 갓을 쓴 경우에는 갓줄을 베로 달아 조의를 표하고 고인과 친한 사이면 술잔을 올리고 “어이 어이”하고 곡을 한 후에 절을 두 번 했다. 그리고 상주와 맞절을 하며 “비감한 말씀 올립니다”하고 위로의 뜻을 전한다.   또 요즘은 이런 장례 절차를 장의사에서 대행해 주고 관과 상여도 마련해 주지만 옛날에는 관이나 상여를 마을에서 준비했다. 살만한 집에서는 미리 오동나무를 켜 놓았는데 관을 짜고 남은 나무로 제상을 만들었다. 그 제상은 기제사(忌祭祀) 때도 이용됐다. 또 상여는 큰 마을에서는 나무로 화려한 단청까지 해 ‘상여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두고두고 썼고 그렇지 않을 때는 직접 꽃상여를 만들었다. ‘여자는 일생에 두 번 꽃가마를 탄다’는 말도 시집올 때와 저승갈 때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입관이 끝나면 상주들은 성복(成服)을 하게 되는데 따로 성복제를 지내기도 한다. 시신이 놓인 방 앞에 큰상을 차리고 그 위에 굴건제복(屈巾祭服)등 상복 일체를 놓는다. 상복 입은 사람들이 모두 그 앞에서 절을 두 번한 후에 상복을 입는다. 상복은 상주만 입고 4촌 이상은 백관이라 하여 두건만 쓴다. 70년대 가정의례준칙이 발표되고 상복 입는 것을 금지시킨 후 검은 양복에 삼베 완장을 차거나 옷깃에 나비형의 삼베 표시만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지만 너덜너덜한 상복에 지팡이를 짚고 엉성하게 삼은 짚신을 신었었다. 지팡이는 부친이 상을 당했을 때는 대나무를, 모친은 버드나무를 사용한다. 이는 부친이 자식을 키울 때 정성을 들이느라 마디가 있으며 속상하여 속이 비었기 때문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어머니는 애를 태워 속이 들어 찬 것이라는 뜻이다. 요즘은 부친과 모친의 역할이 옛날과 거꾸로 된 세상이니 지팡이도 세상 따라 바꿔야 하지 않나 싶다. 상복을 다 입고 나면 다시 서열대로 서서 상주가 술을 따라 올리며 지팡이를 양손에 맞잡아 들고 곡을 한 후에 절을 한다.

 3) 출상      상주가 큰방에 들어가 관을 들고 사방으로 머리를 돌리며 세 번씩 들었다 놓는다. 마당에 나온 관은 6개의 가로 밀대가 딸린 넉자 길이의 밀대에 얹고 그 위에 상여를 얹는다. ‘영여(우리지방에서는 애이라고 함)’에는 고인이 평소에 아껴 쓰던 담뱃대, 쌈지, 갓, 신발, 술잔, 초와 촛대, 혼백상자를 넣는다. 출상 준비가 끝나면 앵여 앞에 하직상을 차린다. 집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받는 상이다. 술과 간단한 음식을 차린 하직상 앞에서 맏상제가 잔을 올리고 모두 그 앞에 절하며 발인축문(發靷祝文)을 읽는다. 그리고 다시 잔을 올리고 곡을 한다.   열 두명의 상여꾼이 상여를 들어올리고 선소리꾼의 지휘에 따라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돈 후에 집 정면을 향해 상여를 세 번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이것이 하직인사이다. 그리고 상여 머리를 대문을 향하게 하고 집을 나서는데 상여 행렬 맨 앞에 소동(少童)이 앵여를 메고 뒤에는 명견대 즉 만장(輓章)이 따른다. 옛날에는 북을 치고 칼춤을 춰 잡귀를 몰아내는 사람이 따랐다고 하나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상여 뒤에 상주가 따르고 두건을 쓴 일가 친척과 음식과 그릇을 챙겨가는 사람들이 맨 끝에 따른다.   발인이 끝나고 상여가 나가게 되면 상주는 물론이고 조객들도 숙연해진다. 이제 영원히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상두꾼들의 운상(運喪)은 앞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데 앞소리를 하는 사람은 요령을 흔들어 요령 소리와 앞소리를 박자삼아 움직인다. 큰 상여의 상두꾼은 33명이지만 보통 12명이 상여를 맨다. 앞소리꾼의 소리는 대개 회심곡이지만 더러는 상항에 따라 즉흥적으로 지어내기도 한다. (상여노래는 민속노래 참조)   상여 행렬이 장지(葬地)의 반쯤 왔을 때 노제(路祭)를 지낸다. 상여를 내려 놓고 병풍을 친 앞에 앵여를 놓은 다음 그 앞에 돗자리를 깐다. 간단한 제물을 차려 맏상제부터 차례로 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한 후에 곡을 하고 물러 선다. 상주가 끝나면 친지들도 따라 절을 한 후에 노제가 끝나면 상두꾼까지 합석해 음식을 고루 나누어 먹는다. 장지 가까운 산기슭에서 상여를 다시 멈추고 앵여 앞에 제물을 차려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한다. 산에서는 산신제(山神祭)와 무덤을 파기 전에 개토제(開土祭)응 지내고 하관을 하면 관을 안치한 후 상주가 옷에 흙을 싸서 관 위에 세 번 붓고 나면 매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관이 보이지 않게 되면 혼백 상자만 모시고 상주들은 돌아간다. 그런데 요즘은 출상할 때 여자상주도 장지까지 따라가지만 우리 지방에서는 마당에서 작별을 하고 장지에는 따라가지 못하였다. 여자들은 ‘삼오날’에야 남자 상주들과 함께 산소를 찾아가는데 이 ‘삼오날’은 여자들에게 산소의 위치를 알리고 무덤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를 살피는데 큰 뜻이 있다.   출상 다음날에는 재우제(再虞祭), 3일째에는 삼우제(三虞祭)를 지내고 초하루 보름에 삭망(朔望), 석달만에 졸곡제(卒哭祭)를 지냈다. 요즘은 49재를 흔히 지내고 있지만 옛날에는 3년상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탈상을 할 때까지 집안에 빈소를 마련하고 하루 세끼뫼(밥)를 올리고 담배를 피워 주었다. 빈소가 았는 방은 방문의 창호지 바른 쪽이 바깥으로 나오게 거꾸로 달아 빈소가 있는 방임을 표시했다.   흔하지는 않지만 예봉, 혹은 아봉이라고 하는 가매장도 있었는데 명당자리를 구할 때까지 6-12개월간 가매장하는 풍습으로 상주는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대접하며 꼭 산사람 대하듯 한다. 그러다 좋은 묏자리가 생기면 비로소 초상을 친다. 아득한 먼 옛날에는 무덤 옆에서 시묘살이를 했지만 이런 풍습은 사라진지 오래다.   또 부모중 먼저 세상을 떠나면 3년상을 지내고, 뒤에 세상을 떠난 경우에는 2년상을 지냈다. 또 한가지 부모, 백부모 숙부모 등 부모의 형제가 많은 집에서는 자칫 대가 끊기는 일도 있었다. 부모는 물론이고 부모의 형제가 세상을 떠나면 탈상할 때까지 부부관계를 금했기 때문에 부모의 형제분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면 자연히 부부관계를 못해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상례는 집안에서 사망했을 때의 풍속이고 객사(客死)를 했을 경우에는 시신을 집안에 들이지 않고 사망현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럴 경우의 상례는 집안에서의 절차를 그대로 적용하지만 비명횡사(非命橫死) 했을 때는 반듯이 원한을 풀어 주는 굿이나 불법(佛法)이 뒤따랐다. 요즘은 아파트와 같은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집안에서는 숨을 거둘 지경이 되면 일부러 영안실이 있는 병원으로 옮겨 사망토록 하는 일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집보다는 영안실에서의 장례가 편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