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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4. 혼례(婚禮)   사람이 태어나 장성한 후 부부가 되는 일은 한 평생을 살면서 가장 큰 경사이며 이는 남녀 당사자는 물론 가정과 마을의 경사였다. 그래서 혼인을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하기도 했다. 혼례는 남녀가 성인으로서 부부관계로 맺음을 사회로 부터 공인을 받기 위한 의식 절차로 그만큼 축제의식이 강하다. 혼인은 부부사이의 육체적-정신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의미 외에도 가정이라는 사회 공동체의 기본단위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통과의례(通過儀禮) 중 가장 중요시되는 의식으로 꼽히고 있다. 지금은 혼례의 절차가 매우 간소화되고 엄숙함을 찾을 수가 없지만 전통혼례, 흔히 말하는 구식혼례는 과정과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다. 전통혼례는 유교사상의 바탕에 의한 가례(家禮)의 하나로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 등의 대례설(大禮說)과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길(納吉), 친영(親迎)으로 이어지는 절차의 4례설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문헌상에 나타난 것이며 지역 또는 가문에 따라 어느 정도의 조금씩 차이가 나는 다른 풍습이 있겠으나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두루 행해지는 풍속을 적는다.

  1) 의혼(議婚)   신랑과 신부가 될 연령이 되어 양쪽 집안의 어른들이 상대방을 구하기 위해 논의하고 중매(仲媒)를 통해 양쪽 집안의 의사를 서로 통한 후 혼례를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의혼(議婚)이라 한다.   혼담(婚談)이 오가고 상대의 인물 됨됨이와 집안 배경, 학식 등을 따져 사주(四柱) 택일(擇日)을 할 때까지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 중매쟁이였다. 요즈음 흔히 ‘뚜쟁이’ ‘뚜마담’이라고 해서 사회 부조리를 조장하는 못된 부류로 지탄을 받고 있지만 ‘중신아비(남자)\', \'중신어미(여자-媒婆라고도 함)’라 불리던 중매쟁이는 혼사 문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다. 중신아비는 양쪽 집안사정을 잘 알거나 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선택되게 마련인데 지체가 낮은 집안은 친척이나 방물장수가 이를 맡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중매쟁이의 역할이 크다 보니 책임도 막중하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별로 지우지 않는다. 흔히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석 잔이고 잘못하면 뺨이 석 대’라는 말이 있긴 해도 책임량이 적었던 것은 ‘팔자소관’이라는 운명론이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혼사가 이루어지면 중매쟁이에게는 옷이나 신발, 금전이 사례로 주어지는데 이를 흔히 ‘중신채’ 또는 ‘마당 삯’이라 부른다. 유교사회에서는 혼사의 결정권이 부모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첫날밤에야 겨우 배우자의 얼굴을 대하는 만큼 중매쟁이에 대한 믿음 또한 컸었다. 다만 중매쟁이의 말이 과장되거나 의심이 가는 경우에는 집안 사람들을 상대방에게 보내 은밀하게 탐색하는 예도 허다했다. 중매쟁이를 통해 혼담이 오가게 되면 집안에서는 가족회의를 열어 중지(衆智)를 모으게 되는데 이 때 혼인 당사자는 철저히 제외되는게 상례다. 엇비슷한 집안끼리 맺는게 일반적인데 특별한 경우 ‘기우는 혼사’는 금기시했다. 이런 과정에서 까다롭게 따지는 일이 불혼(不婚)조건이다. 동성동본(同性同本)은 물론이지만 이성동본(異姓同本)이라도 한 조상의 후손일 때, 특별한 관계일 때는 불가능하다. 김해허씨(金海許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 인천이씨(仁川李氏)의 경우가 그렇고 진주강씨(晋州姜氏)와 진양하씨(晋陽河氏), 진양정씨(晋陽鄭氏)도 서로 혼인을 하지 않았다. 진주의 강(姜), 하(河), 정(鄭) 3성의 불혼은 근래에 들어서 많이 완화됐으나 완고한 집안에서는 아직까지 고집하고 있다.

  2)선보기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혼인 당사자는 혼사에서 철저히 배제됐던 게 전통 유교사회의 풍속이었다. 따라서 ‘맞선’이라는 용어는 옛문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어 이는 근대에 와서 생겨난 풍속이라고 여겨진다. 중매쟁이에 의해 양쪽 집안에서 승낙을 하면 맞선을 보게 되는데 대부분 다방이나 음식점, 심지어 술집도 맞선 장소로 이용되지만 옛날에는 남자가 여자집을 찾아가는 게 보통이었다. 남자쪽에서 선을 보러 갈 때는 대개 어머니가 동행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가친척, 아버지도 참여한다. 처녀집에 들게 되면 양쪽 집안의 어른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정해진 방에서 일종의 상대방 탐색전과 같은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진다.   “우리 아들은 부족한게 많다...”“우리 딸도 마찬가지이다.....”라는 겸손의 말과 함께 은연 중에 자랑하는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는데 시간이 적당히 흐르면 딸이 등장하고 서로간의 신상(身上)에 대한 물음과 답이 오간다. 처녀는 등을 돌린채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있기 때문에 얼굴이나 신체를 정확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얼굴을 보자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물 한그릇 먹고 싶다’는 말로 처녀의 동태를 살필 기회를 갖는다. 말이 떨어지면 당연히 처녀가 일어나 심부름을 하는게 예의이고 이때를 이용하여 처녀의 행동거지나 얼굴을 본다. 총각은 처녀의 모습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지만, 처녀는 총각을 눈여겨 볼 여유가 없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처녀의 ‘문구멍 선보기’다. 가족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당사자만 남기고 모두 밖으로 나간다. 그렇지만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대부분 총각이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기 때문에 처녀는 총각의 생김새를 볼 수가 없었다. 한참 지난 후에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지면 총각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마당을 서성대며 기지개를 켜고 먼 하늘을 살핀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처녀는 문구멍으로 총각의 생김새를 보는 것이다.   선을 볼 때 약간의 군것질감을 내놓는게 상례다. 홍시, 엿, 찰떡이 주로 나오는데 처녀쪽에서는 입맛이 다시지 않지만 총각은 이런 것을 먹는 게 예의다. 먹는 모습에서 그 사람의 성격을 점치고 신체적인 결함을 찾아내는데 엿과 찰떡은 이런 의미 외에도 궁합이 잘 붙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총각은 처녀집에서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대접받는건 가급적 피한다. 불가피하게 식사를 하어야 할 경우에도 처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식사를 하게 되면 총각이 처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 들여지기 때문이다.   맞선의 결과는 서로가 중매쟁이를 통해 전달된다. 양쪽이 모두 좋다고 해야 성사가 되며 어느 한쪽이라도 싫다고 하면 허사가 되고 만다.   요즈음은 보기가 힘든 일이 되었지만 연애결혼이 아닌 중매결혼일 때는 맞선을 보게 되는데 옛날과 같은 복잡한 절차 대신에 서로 터 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처녀쪽이 더 적극적으로 남자를 다루는 일을 흔히 볼 수가 있다. 어차피 사람의 운명은 자기가 하기에 달렸는데 이같은 사고방식으로 여자가 더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게 현실적인 듯하다.   ‘반중매, 반연애’ 방식도 있는데 중매에 의해 만난 후, 일정기간 사귀다가 서로 마음에 들면 결혼을 하게 되는 풍속도 있다.

  3)궁합과 사주   우리는 흔히 난관에 부닥치는 경우가 있으면 ‘사주팔자(四柱八字)’ 타령을 하게 되고 남녀가 만나는 것도 연분이 닿아야 하고 궁합이 맞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 왔다. 전통혼례에 있어서의 궁합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궁합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혼례가 성사되지 않았다. 이 궁합이란 것은 혼인할 처녀-총각의 사주를 오행(五行)에 맞춰 길흉을 점치는 방술(方術)로 궁합을 전문으로 보는 이에게 가서 본다. 궁합을 보기 위해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보내게 되는데 사주란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말하는 것으로 신부집에서 사주(四星이라고도 함)를 받게 되면 비로소 궁합을 맞춰보게 된다. 이 궁합은 혼례 이후에 행복을 누리고 살 것인가, 아니면 서로 맞지 않아 생이별이나 사별(死別)을 할 것인지 미리 점치는 일인데 만약 불길하다는 괘(卦)가 나오면 그 혼사는 허사가 되고 만다. 다행히 궁합이 좋다는 결과가 나오면 신부집에서 신랑집에 혼례날짜를 택해 보내게 된다. 이를 택일단자(擇日單子)라 한다. 사정에 따라서는 양쪽 집안에서 상의하여 택일하기도 하는데 택일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음양의 이치에 따라 가장 좋은 날을 택하고, 이로써 혼담(婚談)은 모두 끝난다.   한가지 덧붙이는 민속으로는 반듯이 순서대로 혼인을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는데, 예컨대 형이 미혼인데 동생이 혼인을 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또 근래에는 오빠가 아직 미혼인데 여동생이 먼저 혼인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허용을 하는 풍조지만 행세께나 하는 집안에서는 이것도 금했다. 어떤 곳에서는 ‘굴뚝에 불 땐다’는 표현과 함께 수치스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4)봉채(封采)   혼례 날짜가 정해지면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사의를 표하게 되는데 이때 보내는 예물을 봉채(封采)라 한다. 이 예물을 담는 그릇을 ‘함(函)’이라고 한다. 싸릿대로 엮어 한지를 바른 함, 요즈음은 여행용 가방이나 트렁크로 대신하고 있는데 이 함은 신부가 혼인날 입을 저고리와 치마, 이불감, 솜, 반지와 같은 폐물(幣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예장지(禮狀紙) 또는 혼서(婚書. 일종의 성혼 인정서)를 함께 넣고 ‘앞돈’이라 하여 혼례일에 쓰라는 돈을 보낸다. 근대에는 신부집에서 시부모 요-이불과 옷, 집안 사람들의 옷, 먼 친척에게서는 버선과 같은 작은 것이라도 해 보내는데 이때 갖가지 음식이 담긴 바구니도 함께 들어 있다. 이를 상 보낸다고 하며 신랑집에서는 ‘상값’이라는 명목의 ‘뒷돈’을 신부집에 보냈는데 한가지 재미나는 점은 뒷돈은 끝단위를 맞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10만원이나 50만원, 100만원을 보내더라도 몇 천원이나 몇 만원이 모자라게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봉채함(封采函)을 혼례날 신부집에 가지고 갔다고 하나, 근대에 와서는 며칠 전에 보낸다. 물론 봉채함 속의 내용물도 옛날과 많이 다르다. 봉채함은 주로 저녁 무렵 신부집에 가져가는데 부잣집의 그 행렬은 으리으리해서 구경거리가 됐다. 밤이기 때문에 행렬이 가는 길을 밝히려 등롱(燈籠)꾼, 횃불잡이가 앞뒤로 늘어지고 여러 하인들이 둘러서서 따라가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봉채함을 지고 가는 사람을 ‘함진아비’라 부르는데 요즘은 신랑친구가 함을 지고 가는게 보편화되었으나 예전에는 신랑 집안의 하인에게 정중히 예복을 입혀 보내거나 마을사람 가운데 적당한 사람을 선택했다. 이를 선택할 때는 궂은 일이 없거나 첫아들을 둔 사람을 우선했는데 함을 지고 가면 노자를 내놨다.   근래에는 ‘함 사시오’라고 떠들썩하게 소리지르고 함값을 많이 받아내기 위한 흥정이 있기도 한데 ‘함진아비’는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기도 했다. 함진아비는 신부집에 들어갈 때 일부러 함의 걸바를 풀어 한 쪽 자락을 질질 끌면서 들어가기도 했는데 이는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는 표시이고 또한 융숭한 대접을 받기 위한 작전이기도 하다.

  4) 대례(大禮)   혼인날이 되어 신랑이 혼례식을 올리기 위해 떠나는 초행부터 첫날밤을 보내고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오는 과정을 대례(大禮)라 한다. 그러나 간혹 신부집이 아닌 신랑집에서 혼례를 올리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극히 드문 일이다. 이는 신부집이 극히 가난할 때에 치르는 혼례로 첫날밤을 신랑집에서 보내는 것 말고는 격식은 마찬가지이다.     ① 신부 꾸미기   예나 지금이나 신부 단장은 매우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있다.   요즈음은 신부화장을 미장원에 맡기고 있지만 옛날에도 신부를 단장하는 전문가가 따로 있었는데 마을에 그런 사람이 없을 때는 이웃 중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의 손을 빌렸다. 신부 단장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수모(手母)라 했고 그는 신부 단장은 물론이고 혼례 때 신부가 취해야 할 몸가짐과 예의범절, 심지어 첫날밤을 지내는 규범을 가르치고 잔칫날의 행례(行禮) 절차를 연출하기도 했다. 부잣집에서는 수모(手母)가 조수를 데리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조수를 ‘겉시’라 불렀다.   옛날 처녀들은 화장한다는 것은 엄두를 못냈을 뿐만 아니라 신부화장이 최초의 화장이었는데 이것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이마나 목덜미의 솜털을 뽑고 화장하는데, 솜털을 뽑는 방법은 양손에 명주실을 팽팽하게 잡아당긴 후 살갗에 밀착시켜 아래위로 밀어 뽑았다.   부잣집에서는 덧머리나 다리를 얹어 큰 머리를 만들고 그 위에 족두리를 씌웠다. 덧머리는 머리 위에 얹는 딴머리이고, 다리(月子)는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 넣는 딴머리로 요즘의 가발과 같은 것이다. 덧머리나 다리는 값이 비싸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하기가 어려웠다.   신부는 연지-곤지를 찍고 녹의홍상(綠衣紅裳) 위에 수를 놓은 화려한 홍비단의 활옷을 입고 귀밑머리는 풀어서 쪽을 지어 용잠을 꽂았다. 신부는 반듯이 연지-곤지를 찍어야 했는데 연지(臙脂)는 본래 붉은 빛의 화장품으로 신부의 입술과 양쪽 볼에 둥글게 찍는 것을 말하며, 이마에 둥글게 찍는 것은 곤지라 부른다. 붉은 빛의 연지-곤지를 찍는 것은 성스럽고 경사스러운 날, 악귀가 붙지 못하게 하며 곱게 단장한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찾아오는 잡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주술이다. 잡귀는 붉은빛을 싫어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② 장가들기   신부가 몸단장을 하는 동안 신랑은 신부집으로 떠나게 된다.   옛날 사람들은 여자는 ‘시집을 가고’, 남자는 ‘장가를 든다’고 했다. 여자가 시집을 위해 신랑집으로 간다는 뜻이다. 신랑은 말이나 나귀를 타고 가는 게 일반적인 일이며 가난한 집에서는 걸어가기도 했다. 부잣집의 장가 행렬은 화려하고 웅장했지만 보통사람들은 단출했다. 행세깨나 하는 집에서는 조부, 숙부, 백부, 부친 등 신랑쪽 대표인 상객이 앞서고 다음에 말을 탄 신랑, 신랑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혹은 어린 삼촌, 오촌, 매형, 형뻘 되는 사람들로 구성된 중객이 따랐다. 그들은 신랑을 호위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어 신랑 손아랫사람들로 이루어진 후객이 따르는데 이들은 물건 운반과 행렬을 호위하며, 맨 끝에는 신랑의 동생이나 조카중 똑똑한 아이 한 두명 정도가 따르는데 이들은 신랑의 심부름을 맡는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혼례는 낮에 치르고 있지만 먼 옛날에는 밤에 혼례식을 올렸다. 대개 아침에 출발하면 신부집에 닿는 때가 해거름때였고 심하면 밤중에 닿았기 때문에 밤에 혼례식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 또 낮에는 신랑 신부 얼굴 대하기가 부끄러워 밤에 혼례식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따라서 신랑의 행렬에 따르는 청사초롱은 밤에 치르는 혼례 때 불을 밝히기 위한 풍습으로 내려 온 것이며 혼례(婚禮)의 글자도 예전에는 혼례(昏禮)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학자들의 주장도 나오고 있다.   신랑의 행렬 때 윗길과 아랫길의 두 갈래를 만나면 반드시 윗길을 택했고 고갯길을 피해 멀리 둘러서 평지를 이용하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윗길을 택하는 것은 아래보다는 위를 중요시했던 심리가 작용한 것이고, 고갯길을 피한 것은 혼인 첫날부터 고된 길을 가게 되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려운 고비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또 같은 신랑의 행렬이 맞닥뜨리면 서로 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세력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해 새벽에 출발하는 일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신랑 행렬은 반드시 신부집의 앞쪽을 택하는 것도 특징이다. 길의 방향이 신부집의 뒤로 나 있다면 둘러 가거나 심지어 들판의 농지를 이용하기도 했다. 신랑이 신부집에 당도하면 ‘대반(對盤)’이 나와 행렬을 안내하며 신랑 일행은 신부집 부근에 마련된 방에서 대기하며 혼례 때까지 쉬는데 이때 평복을 입고 왔으면 여기서 사모관대(紗帽冠帶)로 갈아 입는다. 이 사모관대는 정삼품 벼슬인 당상관의 관복으로 혼례날만큼은 벼슬을 한 것으로 여겼고 이 때문에 이 날은 고을 원님도 신랑에게 허리를 굽혀야 했다. 혼례식 시간이 되어 신랑이 신부집에 들어갈 때는 안내자가 팔짱을 낀 채 팔로 신랑을 신부집으로 밀어 넣는데 신부집 대문에 미리 준비해 둔 곡식가마니를 밟고 지나간다. 이는 농사가 주업(主業)이었던 시절에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습속이다.

 ③ 전안례(奠雁禮)   기러기는 혼례에 있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귀물(貴物)이다. 짝을 잃으면 구만리를 멀다 않고 찾아갈 정도로 금실 좋은 기러기를 닮아 한 평생을 해로(偕老)하라는 뜻에서 혼례식에서의 기러기가 상징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나무로 만든 기러기는 ‘기럭아비(雁夫)’에 의해 안겨져 왔다가 전안청(奠雁廳)에 신랑과 함께 들어간다. 장인이 먼저 대청에 올라가 서쪽을 향해 서고, 신랑은 서쪽에서 북쪽을 향해 꿇어앉는다. 의식이 끝나고 나면 신랑은 일어서서 장인에게 절을 한다. 교배례(交拜禮) 시작 전이나 끝난 후에 신부 어머니가 기러기를 신부가 있는 방에 던지는데 이 때 기러기가 바로 서면 아들을 낳고 넘어지면 딸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기러기가 바로 서는 예가 드물어 그만큼 아들 낳는 일이 힘들다는 뜻도 담겨 있다.   이 전안례를 소례(小禮)라고 하며 홀 부르는 사람(홀잡이, 홀아비라고 함)이 홀을 부르면서 식이 이루어진다.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유교사회에서 나온 예법이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 주인영서우문외(主人迎婿于門外)=주인이 문 밖으로 나가서 사위를 맞아 들임.   · 신랑하마공립(新郞下馬供立)= 신랑이 밀에서 내리라는 뜻으로 신랑은 초례청 밖에 선다.   · 찬인읍(贊人揖)=찬인(대반)이 신랑을 안내한다.   · 신랑답읍(新郞答揖)=신랑이 답례를 한다.   · 서취석(婿就席)=신랑이 상앞으로 다가선다.   · 궤좌(跪坐)=신랑이 꿇어앉는다.   · 시자집안이종(侍者執雁以從)=대반이 기러기를 갖고 신랑을 따라 들어온다.   · 포안(抱雁)=안부가 신랑에게 목안(木雁)을 주면 신랑은 기러기의 머리가 왼쪽으로가도록 두손으로 공손히 받들고 있는다.   · 안치어지(雁置於地)=신랑이 전안상 앞에 북향으로 꿇어 앉아 기러기를 전안상 위에 놓는다.   · 면복흥신(俛伏興身)=신랑이 허리를 굽혔다가 일어난다.   · 소퇴재배(小退再拜)=신랑이 조금 물러나 장인에게 큰절을 두 번 한다.     ④ 대례(大禮)   대례(大禮)는 교배례(交拜禮)와 합근례(合巹禮. 𢀷盃禮라고도 함)까지를 뜻하는데 이것이 혼례의 핵심이다. 교배례는 신랑과 신부가 처음 만나 서로 절을 주고받는 례(禮)이며, 합근례는 서로가 결합하는 뜻의 술을 마시는 행사다.   교배례는 신랑과 신부가 처음 대하는 성스러운 순서로 우리지방에서는 행례(行禮)라는 말을 더 많이 써 왔다.   신부집 마당에 차일을 치고 병풍이 둘러진 가운데 교배상이 놓인다. 동쪽에 신랑이 서고 신부가 서쪽에 서는데 대례상에는 쌀, 닭, 쪽바가지, 송죽(松竹), 초, 청홍(靑紅)실, 북어에 밤과 대추를 물린 것 등이 차려진다. 신랑이 먼저 나와 식장에 서 있으면 신부 입장이 있게 되는데, 서양에서는 신랑-신부가 함께 입장하지만 우리나라 신식 혼례는 신랑이 먼저 들어오는 것도 전통혼례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랑이 식장에 들어서고도 신부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딱딱하고 엄숙한 혼례식에 신랑-신부의 긴장을 풀어 주는 양념과 같은 ‘장난’으로 예식장이 웃음소리로 가득찬다. 대례의 중간 중간에 이런 ‘장난’이 삽입되는데 이 때문에 엄숙하고 성스러운 예식에 해학과 낭만이 깃들여 있기도 해 축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랑이 우두커니 서 있으면 “신부출(新婦出)”이라고 큰 소리로 신부입장을 독촉한다. 그래도 신부가 나오지 않고 홀 부르는 이는 “신부재출(新婦再出)”하다가 “신부삼출(新婦三出)”까지 부른다. 신랑쪽 사람들은 “신랑 다리 휜다”고 신부 입장을 독촉하는 농담을 하면 신부쪽에서도 지지 않고 “화장이 덜 끝났다” “신랑 신체 좀 점검하자”며 농담을 주고받아 식장은 웃음의 도가니가 된다.   신부가 입장하게 되면 혼례식은 절정을 이룬다. 신부가 방에서 나오면 그 앞에 하얀 배가 양탄자처럼 깔리는데, 이것은 함을 지고 올 때 멜빵으로 사용한 것으로 다른 사람이 밟으면 불길하다는 속설이 있어 신부가 걸음을 뗄 때마다 뒤에서 둘둘 말아 간다. 요즘도 신식예식을 할 때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이 역시 전통혼례 풍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혼례식 중에 신랑을 난처하게 만드는 장난이 계속되어 하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신랑 상에 가짜 안주를 얹어 놓아 신랑이 난처한 입자의 표정을 읽고 웃으면서 즐기는 것이다. 예컨대 나무를 밤처럼 깎아 놓거나 명태를 무치면서 빛깔과 모양이 비슷한 관솔을 잘게 썰어 놓는 일, 보리 잎으로 나물을 무치는 따위의 장난이 그것이다. 신랑이 이런 안주를 먹고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난처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모인 사람들 모두가 웃고 즐기는 것이다.   대례가 끝나고 나면 장모가 교배상에 올렸던 밤 대추 따위의 마른 제물을 신랑의 혼례복 소매 속에 넣어 주기도 했는데 이는 아들을 낳으라는 속설이기도 하다. 대례 때 신부가 웃으면 딸을 낳는다는 말이 있어 아무리 우스운 일이 벌어져도 웃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일이 전통혼례였다. 교배상을 차리는 일도 단순한 것이 아니고 저마다 상당한 뜻이 있었다. 지역에 따라, 집안 내력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송죽(松竹)과 청실홍실은 필수적이다. 병에 꽂은 소나무와 대에는 청실 홍실을 두르는데 이는 절개의 상징인 이 두 나무에 실을 두름으로써 절개를 지키고 실처럼 명(命)이 길어 백년해로(百年偕老) 하라는 듯이 담겨 있다. 상에 오르는 암탉과 수탉도 원래는 기러기를 상징하는 것이며 상서로운 새인 봉황을 뜻한다는 말이 있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일반적으로 쓰이는 대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 행친영례(行親迎禮)=小禮를 끝낸 신랑이 식장의 동쪽에 선다.   · 모도부출(姆導婦出:新婦出)=신부가 시자의 부축을 받으며 나온다.   · 서동부서(婿東婦西)=서쪽의 신부를 향해 신랑이 마주보고 선다.   · 진관(進盥)=물과 수건을 얹은 작은 상을 신랑과 신부에게 들여 받쳐준다.   · 서관우남부관우북(婿盥于南婦盥于北)=신랑은 남쪽에서, 신부는 북쪽에서 손을 씻는다.   · 관수세수(盥水洗手)=신랑은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튀기고, 신부는 여자 대반이 대신해서 세 번 물을 튀기고 손을 씻는다.   · 각정립(各正立)=원래대로 신랑-신부가 마주보고 선다.   · 부선재배-신부재배(婦先再拜-新婦再拜)=여자대반의 부축을 받아 신부가 신랑을 향해 두 번 큰절을 한다.   · 서답일배(婿答一拜)=신랑이 답례로 큰절을 한 번 한다.   · 부우재배(婦又再拜)=신부가 다시 큰절을 두 번 한다.   · 서우답일배(婿又答一拜)=신랑이 큰절을 한 번 더 한다.   · 각궤좌(각궤좌)=신랑-신부가 제자리에 꿇어앉는다.   여기까지가 교배례(交拜禮)이고 이어 합근례(合巹禮)가 이어진다.   · 진상(進床)=술과 안주를 작은 상을 신랑-신부 앞에 각각 놓는데 신랑은 밤, 신부는 대추이다.   · 시자침주(侍者斟酒)=신랑-신부 앞에 술을 각각 따른다.   · 초작제주(初酌除酒)=첫잔을 마시는 시늉만 한다.   · 재작재제주(再酌再除酒)=두번째 잔을 마시는 시늉을 한다.   · 우첨주(又斟酒)=대반이 세번째 잔을 친다.   · 삼작환작(三酌換酌)=대반이 세번째 잔을 친 후 신랑잔에 청실을 감아 신부쪽에 보낸다.   · 서읍부(婿揖婦)=신랑이 신부에게 읍을 한다.   · 거음(擧飮)=잔을 들어 마시는 척하고 안주도 집어먹는 시늉만 한다.   · 예필철상(禮畢撤床)=예가 끝나고 철상한다.   · 예필개복(禮畢改服)=신랑은 선 자리에서 예복을 벗고 신부집에서 마련한 새옷으로 갈아입는다.

 ⑤ 큰상   대례가 끝나면 신랑과 신부는 각자 정해진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평생에 한번 밖에 없는 상을 받게 되는데 이 상은 살림 형편에 따라 다르지만 온갖 음식이 차려진다. 그러나 실제로 먹는 것은 얼마 안되고 그대로 물리는데 신랑의 큰상에 남은 음식은 상객들이 돌아갈 때 담아주는 게 보통이다. 상객은 조부, 백부, 숙부, 당숙 등 신랑의 부친보다 항렬이 높거나 같은 항렬로 구성됐는데 이들은 혼례 후 식사를 끝내면 돌아갔다. 근래에는 우인대표와 신랑이 함께 큰상을 받고 신부도 동석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옛날에는 ‘첫날밤’이 되어야만 신랑-신부가 동석할 수 있었다. 상객이 돌아갈 때 신랑의 친구인 우인대표도 돌아갔는데 우인대표에게는 신부집에서 약간의 거마비(車馬費)를 주는 게 예의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이 변질되어 많은 돈을 달라는 우인대표와 적게 주려는 신부측 대표와의 흥정과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런 불건전한 형태는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⑥ 신방(新房)지키기   저녁이 되면 신부의 어머니나 언니가 신방(新房)을 꾸미는데 뒤로는 병풍을 치고 이부자리를 펴 놓는다. 또 요강에는 솜을 깔아 두는 한편 반짇고리도 두고 나온다. 반짇고리는 옛날 여자들의 상징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신부가 먼저 들어와 앉아 있으면 곧 신랑이 들어오는데 얼마 후 술과 안주를 간단하게 차린 주안상(酒案床)이 들어오고 신부가 술을 따라 권하면 신랑이 받아 마신다. 이 상을 주물상, 야물상, 차담상이라고 하는데 신랑-신부는 비로소 얼굴을 맞대고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었다. 이 음식은 신랑이나 신부가 혼례를 올리면서 긴장하고 주위의 시선과 체면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한 점을 감안, 요기를 하라는 뜻도 담겨 있다.   마를 재배하는 곳에서는 이 상에 마즙을 큰 대접에 가득 담아 주는 곳이 많은데 이 산마는 예로부터 정력제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다 즙의 생김새가 정액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모양이 남자의 생식기와 비슷하다는데서 신랑에게 먹이는 습속이 생겨난 듯하다.   주안상을 물리고 나서 신랑은 신부의 족두리를 끄르고 겉옷을 벗기는데 집안에 따라 옷고름만 풀어 주거나 버선 한짝만 벗겨 주기도 한다. 옷고름을 풀어주는 것을 ‘가슴 풀어 준다’고 하며 촛불을 끈 후에 신부를 안아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게 일반적인 일이다. 신랑이 어릴 때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도 뜻을 잘 몰라 시킨대로 하지않고 그대로 자기 혼자만 자는 경우도 있는데 그 때는 신부도 꼼짝없이 옷을 입은 채 그대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허다했다. 촛불을 끌 때도 입으로 불어 끄는 것은 금기시했고 숟가락이나 손가락으로 껐다. 또 포선(布扇)으로 끄기도 했는데 포선은 양쪽에 자루가 달린 한 자 정도의 천을 말한다. 두루마기 족자처럼 생긴 이것은 혼례 때 신랑의 얼굴 가리개로 이용했던 것으로 촛불을 끌 때는 양쪽에서 돌돌 말아 쥐고 불을 껐다.   신랑이 신부를 다룰 때도 주의해야 할 일이 많았다. 잠자리에 든 신랑이 신부를 맞을 때 먼저 머리를 만지면 상처(喪妻)한다는 말이 있고, 또 가슴을 먼저 만지면 흔히 젖니종이라 말하는 유종(乳腫)을 앓는다는 속설이 전해져 온다. 이 때문에 신부의 발을 맨 먼저 만진다고 한다. 신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바깥에서는 ‘신방 지키기’란 놀이가 진행된다.   ‘신방훔쳐보기’라고 해도 탈이 없을 정도로 뚜렷한 명칭은 없지만 주로 여자들이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 문을 뚫고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주로 기혼여성, 일가친척들에 의해서 벌어지는 이 행위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사람이 보지 않으면 귀신이 보기 때문에 지켜보며, 옛날 백정의 아들이 장가를 들어 첫날밤에 “신부를 잘 다루라”는 어른들의 당부를 칼질을 잘 하라는 얘기로 알아듣고 신부에게 칼질을 했다는데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해 망을 보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 비슷한 이야기로 신랑은 무조건 벗겨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고 신부는 참아야 한다고 배웠다. 첫날밤에 신랑이 옷은 안벗기고 살갗을 벗기자 신부는 울면서 “벗기네, 벗기네”하자 바깥에서 듣고 있던 신부어머니는 “참아라, 참아라”하다가 큰 탈이 났기 때문에 이를 살피는 뜻으로 신방을 훔쳐 본다고 한다. 이는 좀 과장된 이야기이고 신랑.신부가 어리기 때문에 첫날밤에 뜻하지 않는 소동이나 실수가 있을까 봐 생겨난 풍속이고 또 하나는 신부에게 흑심(黑心)을 품었던 마을 총각이 나타나 해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게 옳을 듯하다.

 ⑦ 신랑다루기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을 지내고 나면 모든 호기심과 긴장이 일시에 사라지고 신부집도 ‘가족화’되고 처가 식구들도 새신랑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게 돼 새출발의 의미가 한층 새로워진다. 신랑은 대개 신부집에서 사흘 정도 머무르게 되는데 첫날밤을 새운 다음날 새벽이면 장인 장모에게 인사를 하고 떡국이나 깨죽, 잣죽을 신랑방에 들여준다. 첫날밤을 새운 신부는 큰방으로 신랑은 또래의 처가 식구들과 아침을 먹는다.   때로는 신부와 겸상을 하기도 하지만 옛날 풍속이 부부간의 겸상을 용납지 않았기 때문에 신랑의 아침밥은 처남이나 가까운 처가의 남자친척들과 함께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침 밥상에서부터 장난이 시작되는데 이것은 종일 진행될 신랑다루기의 전초전쯤으로 여기면 된다. 예컨대 밥그릇에 행주나 작은 그릇을 깔고 위에만 밥을 수북하게 담는 일이나 막걸리 대신 뜨물을 주전자에 담아와 부어 주는 일, 보리잎으로 나물을 부치고 명태무침에 관솔가지 넣기, 국그릇에 소금 듬뿍넣기 등 신랑을 골탕 먹이는 장난은 필수적인 놀이였다. 이것을 두고 혹자들은 신랑과 가족간의 정(情)을 빨리 붙여 넣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고 신랑의 성격을 알아내는 방법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아침상을 물리고 나면 본격적인 신랑 다루는 놀이가 시작된다. 신랑이 신부측 친인척과 동네의 청년을 대접하는 형식으로 음식을 차리고 초청을 하는데 이것을 얼굴을 익히는 행사의 하나이다. 술이 몇 순배 돌면 청년들은 친인척과 합세, 신랑을 ‘처녀 훔쳐간 도둑’으로 몰아 함을 지고 올 때의 멜빵으로 신랑을 묶어 키 큰 장정이 어깨에 메거나 대들보 등에 매단다. 묶이지 않으려는 신랑과 묶으려는 사람들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지만 결국은 발목이 묶이게 마련이다. 이 때 신부는 자기의 방에 들어가 있고 ‘장난’의 현장에는 없다. 신랑을 매달아 놓은 후 마른 명태나 방망이로 발바닥을 쳐 신랑이 비명을 지르게 하는데 신랑은 일부러 ‘나 죽는다’하고 엄살을 부린다. “어젯밤 신부를 어떻게 다루었나?, 한가지도 빼지 말고 실토하라” “어젯밤 상에 무슨 음식이 들어 왔더냐?. 물목을 대라.” “처녀를 공짜로 훔쳐가면 되느냐? 그 값을 내 놔라.” 따위의 ‘협박’에 못 이겨 신랑은 “빙모님 나좀 살려 주소”하고 소리를 내지른다. 그러면 장모가 “우리 사위 살려 달라”며 술상을 내 오는데 처음에는 술상이 보잘 것 없고 그럴 때마다 신랑을 더 세게 다루고 신랑은 장모에게 좀 더 많이 차려 오라고 사정한다. 그렇게 조금씩 음식이 나와 상이 그득해지면 신랑은 그대로 둔 채 자기들끼리만 음식을 먹는다. 신랑이 “나도 좀 먹자”고 묶인 몸을 풀어 달라고 하면 “신부를 데리고 오라”고 채근하고, 그러면 신랑이 장모에게 “제발 그렇게 해 달라”고 사정한다. 신부가 못 이기는체하고 나타나면 이번에는 “신부에게 노래를 시켜라” “서로 입을 맞추어라” 등등의 난처한 일을 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신랑 다루는 놀이는 단순한 ‘장난’ 이전에 큰 뜻이 담겨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처가의 친인척과 마을 청년들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하게 되고 정을 돈독히 할 수가 있다. 아주 가까운 친인척이 아니면 모르고 지내는 오늘의 세태와 비교하면 전통혼례의 신랑 다루기는 대단히 지혜로운 행사라고 보여진다.

 ⑧ 신행(新行)   신부가 신랑집, 즉 시가(媤家)로 가는 례(禮)를 신행(新行)이라 한다. 우귀(于歸) 또는 회가, 근친이라고도 하는데 혼례식이 신부집의 잔치라면 신행은 신랑집의 잔치이다. 요즘은 흔히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결혼 청첩장에는 우귀일이란 표시가 반듯이 있었는데 이는 신부가 신랑집에 가는 날을 뜻한다. 적어도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예식장에서의 혼례는 신부집에서 행하는 대례로 치르고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신랑집에서 폐백(幣帛)을 드리는 등 옛날의 전통을 답습했으나 어느덧 폐백마저도 예식장에서 치러 ‘신행풍속’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이 ‘신행풍속’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혼례식을 마친 후 신부가 시집을 갈 때까지 친정에 머무는 기간이 길었는데 길게는 3년이 넘는 경우도 있다. ‘간다 간다 하는 년이 아이 셋이 되어도 안 간다’는 속담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우귀는 좋은 날을 택해서 정하지만 가문이나 지방의 풍속에 따라 달라 3日 또는 7日, 1개월, 3개월, 1년, 3년 우귀도 있다.   신부집이 부자일수록 우귀는 길었다. 신부집에서 사흘 정도 머물렀던 신랑은 혼자 돌아가고 신부는 친정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동안 신랑은 처가에 뻔질나게 찾아와 놀다 가곤 했는데 옛날부터 사위는 ‘백년손님’이라 하여 손님 대접만 받고 돌아가기 때문에 처가식구들로 부터 보이지 않는 눈총을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신부가 친정에 있는 동안 봄이 되면 시댁에 춘복(春服)이라 하여 시댁식구의 옷을 지어 보내는 등 철따라 옷을 마련했고 추석등 명절에도 옷과 음식을 보내야 했다. 여기에는 사돈에게 안부 편지도 함께 보냈다.   철따라 옷과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하인을 시켜 보내면 시댁에서는 하인에게 빈손으로 보기가 뭣하여 답례를 하게 마련인데 기껏해야 술 한독과 떡과 같은 음식이 고작이며 선물이 아니라 며느리가 길쌈해서 옷을 지어 보내라는 것이였다. 신부집에서는 철따라 시댁에 선물을 보내다 보니 살림이 축나게 마련인데 양반 행세를 하려다가 살림이 거덜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고 ‘딸 많은 집 기둥뿌리도 안 남는다’는 말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신부는 친정에 살아도 편안하지 않았다. ‘3년각시 속곳 부뚝막에 말려 입고 시집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인데 이는 워낙 바쁘다보니 자기 옷이나 변변하게 차려 입을 여가가 없다는 말이다. 시댁에 보낼 옷 장만하랴, 시댁에서 보내준 삼-무명을 베로 짜서 보내려면 자기 옷 관리는 못하는 게 당연했다. 보통의 가정에서는 혼례 사흘 후 신랑과 함께 신행을 가게 되는데 절차와 풍속은 우귀일의 기간에 관계없이 비슷하다.   또 하나의 풍속으로는 ‘길 틔우기’라는 습속이 있다. 이는 이웃집 처녀-총각끼리 혼례를 했을 때, 특히 신부집의 어른이 연로(年老)해서 여자의 일손이 꼭 필요한 경우에 이런 풍습을 따랐다.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올리는 절차를 끝내면 곧바로 신랑집으로 신행을 갔다가 식이 끝나고 다시 신랑-신부가 신부집에 와 첫날밤을 보내는 것이다. 신부집 잔치와 신랑집 잔치가 같은 날 한꺼번에 치러지는 것으로 절차를 줄일 수 있는 대로 줄인다. 그리고는 신랑 신부는 각자의 집에서 살게되는데 주로 신랑이 신부집에 놀러와 자는게 예사였다. 신부가 신랑을 따라 시집에 가게 될 때 신부는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의 손잡이를 만지거나 솥뚜껑을 세 번 달싹거린 후에 떠난다. 이것은 자기가 살았던 집에 마지막으로 하직하는 뜻이다.   신부는 가마를 타고 가는데 가마가 없으면 달구지를 이용하더라도 걸어가는 법은 없다. 택시가 생긴 이후부터는 택시를 이용했다. 시집으로 가는 행렬은 신랑이 장가들 때보다 더 요란스럽다. 말탄 신랑과 가마 탄 신부의 일행에는 상객(주로 신부의 아버지)과 ‘웃각시’(신부의 올케나 언니), 신부를 거드는 ‘하님’(언니나 친구)이 있고 살림살이와 예단함도 함께 지고 간다. 예단함에는 시부모의 바지저고리, 시삼촌과 시형제의 저고리, 기타 시댁의 친인척에게 줄 버선이 있고 예단음식으로 여러가지를 장만한다.   신부가 시집으로 떠나고 나면 ‘뒷상’이라 하여 술과 떡을 마을 집집마다 돌리면서 잔칫날 애써 준 노고에 감사하는데 이를 ‘후렴잔치’라 부른다.   신랑마을 입구에 닿아 신랑이 가마문을 열어주면 신부는 내려 웃각시와 하님의 부축을 받으며 앞서가는 신랑을 따라 가는데 이 때 신부는 보(褓)로 얼굴을 가린다. 시댁 입구에 다다르면 짚단에 불을 질러 놓는데 신부는 이 불을 뛰어 넘는다. 이 때 콩이나 팥을 신부의 얼굴에 뿌리기도 한다. 이는 잡귀를 쫓고 부정을 태우는 의식이며 일부 지방에서는 바가지를 밟아 깨도록 하는 일도 있다. 바가지 깨지는 소리에 잡귀가 도망가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신부가 집안에 들어오면 미리 차려진 마루의 제단(祭壇)에 오르는데 신랑은 왼쪽에, 신부는 오른쪽에 서서 두 번 절하고 잔을 올린 후 다시 절을 한 번 하여 조상에게 새 사람의 입가(入家)를 고한다.   이것이 끝나면 신랑은 집안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리기에 바쁘고 신부는 정해진 방에 자리잡고 상객은 아랫방에 자리를 정한다. 큰방에서는 예단 올릴 준비를 서두르는데 폐백은 조부모, 백부, 부모, 중부, 숙부, 고모, 이모, 형제의 순서대로 절을 하고 술을 권한다. 신부를 부축하는 하님이 신부 대신 술을 따라 올리면 절 받은 사람으로부터 쌀 한 되씩 받아 갔다고 하나 요즈음은 ‘절값’이라 하여 돈을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술을 권하고 안주를 드릴 때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는 엿이나 찰떡을 드렸는데 이는 엿과 찰떡이 입안에 붙어 잔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폐백이 끝나면 신부는 큰방의 솥자리라고 말하는 아랫목에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앉아있고, 마을의 할머니와 부녀자들은 신부를 보기 위해 찾아와 방안에 앉아 신부를 살핀다. 그러면 ‘초순배’라 하여 간단한 음식상이 들어오는데 신부는 잠시 요기를 하고 웃각시는 구경하러 온 할머니와 부녀자들에게 술을 돌린다. 조금 지나면 신부와 상객은 큰상을 받게 되는데 이때도 신랑이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로 상을 물리며 남은 음식은 싸서 신부집에 보낸다. 그런데 신랑의 상객은 즐겁지만 신부의 상객은 고이 기른 딸자식을 남의 집에 맡기고 간다는 상념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셔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가는 경우도 흔했다. 저녁이 되면 신부 또래의 이웃 부녀자들이 찾아와 간단한 음식을 즐기며 노는데 이것은 같은 마을에 살게 된 여자끼리 서로 얼굴을 익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신랑집에서 첫밤을 보낸 신부는 새벽녘에 시부모에게 인사를 드리며 신부가 일을 하는 것은 보통 사흘이 지난 뒤부터다. 그런데 한가지 晋陽지방에서 전래되는 신행풍속 중에서 신랑이 상처(喪妻)를 하고 새장가를 들었을 경우 빈소(殯所)가 아직 있으면 신부는 남자 갓을 쓰고 빈소에서 절을 올렸다. 그것이 끝나면 빈소도 철거됐다.   신부는 사흘이 지나면 부엌에서 일을 하게 시작하는데 첫 음식은 신부가 시집올 때 준비한 반찬으로 차린다. 이를 ‘첫밥’이라 부르는데 요즘은 신혼여행을 다녀와 시댁에서 처음으로 부엌에 나아가 음식을 할 때 간단한 밑반찬을 미리 준비해 와 상에 올리는 풍속은 예전의 습속을 흉내낸 것이다. 시집온지 사흘째 되는날 신랑은 처가에 다녀오는데 이를 재행(再行)이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늦을 경우도 있지만 이 때 신랑은 반듯이 담뱃대를 사 가는 것을 잊지 않는다.   신랑이 재행가는 것을 ‘장모 눈물 닦아주러 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딸을 시집 보내고 애닯아 하는 장모를 안심시켜 주기 위한 뜻이 담겨져 있다. 신랑은 처가에서 사흘 정도 머무는데 이때 장모는 사위를 데리고 일가 친척집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시킨다.    옛날의 혼인은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예물(禮物)에 대하여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살림살이의 정도에 맞춰 예물을 준비하고 잔치비용도 품앗이로 했던 만큼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잔치음식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이웃에서 형편에 따라 ‘떡 한 말’ ‘묵 한 함지’ ‘떡국거리 한 말’ 따위로 부담했다. 또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일을 해주었기 때문에 혼인은 마을잔치가 됐는데 이는 상부상조(相扶相助) 정신을 생활화했던 우리 조상들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이기도 하다. 또 하나 다른 지방에서는 대표적인 혼례음식을 국수로 여겨 “국수 언제 먹여주느냐”는 말로 결혼 여부를 묻지만 우리지방에서는 떡국을 으뜸음식으로 여겨 “떡국 안 먹여 주느냐”라는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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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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