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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1. 효자해주오공규선기적비(孝子海州吳公奎善記蹟碑)

  선진리 신기마을 두곡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진년(丙辰年;1976년) 봄에 용현에 사는 오맹근(吳孟根)씨가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와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請)하므로 펼쳐보니 그의 조부(祖父) 효행록(孝行錄)이였다. 나는 졸문(拙文)이라 사양(辭讓)하다가 돌이켜 생각하니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根源)이므로 우러러 흠모(欽慕)하는 마음이 발동(發動)하여 이 글을 적게 되었다.   그 두루마리에 적힌 오효자(吳孝子) 규선공(奎善公)은 타고난 효자로서 유년시(幼年時)부터 성인(成人)이 된 후에도 조석(朝夕) 문안(問安)인사(人事)를 거르지 않았으며 달고 부드러운 음식(飮食) 봉궤(奉饋)등 자식(子息)으로서 기본(基本) 봉양(奉養)은 더 이상 거론(擧論)할 것 없고 부공(父公)의 병환(病患)에 약(藥)의 효험(効驗)이 없어서 하늘과 지신(地神)에게 축원(祝願)하여 회춘(回春)을 빌었으나 역시 차도(差度)가 없어 끝내 단지(斷指)를 결행(決行)하였었고 후(後)에 자당(慈堂)께서 숙환(宿患)이 위급(危急)할 때에도 그렇게 하여 수일간을 회생(回生)케 하였다. 전후 부모상을 당하여 육년 시묘(侍墓)를 살면서 비바람속에도 떠나지 않았으며 호랑이가 좌우에서 호위(護衛)하였다는 내용(內容)이 대략(大略)인데 그의 지성(至誠)스러운 효행(孝行)은 이를 다 적을 수 없다. 인근(隣近) 동민(洞民)들도 감화(感化)를 받았으며 사림(士林)들이 경모(敬慕)하여 그 사실을 적어 관(官)에 올리니 현감(縣監)이 가상(嘉尙)히 여겨 암행어사(暗行御史)와 감사(監事)에게 보고하였으나 조정(朝廷)에는 미치지 못하여 끝내 들어나지 않았으니 매우 한(恨)스러운 일이었다.

  아들 정영(正泳)씨가 항상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힘이 약해서 이루지 못하여 고민하더니 손자(孫子)인 맹근(孟根)등이 그의 조부(祖父)의 탁월(卓越)한 효행(孝行)이 잊혀질까 염려(念慮)하여 이번에 비석(碑石)을 세워 그 대략(大略)을 적어 후손(後孫)에게 전(傳)하니 그 할아버지에 그 아버지요 그 손자라 할만 하다. 나는 더욱 감동(感動)하여 그 대요(大要)를 뽑아 비명(碑銘)으로 삼는다.   세계(世系)는 관향(貫鄕)이 해주(海州)이며 상조(上祖) 인유공(仁裕公)은 고려(高麗) 검교감감(檢校監監)이니 십사세(十四世) 응정(應貞) 호해당(號海堂) 관(官) 형조참판공(刑曹參判公)께서 처음으로 사천(泗川)에 오셨다. 장남(長男) 대훈공(大勳公)은 선전관(宣傳官)이며 그의 증손(曾孫) 세희공(世熙公)은 하동(河東)으로 옮기시니 바로 효자공(孝子公)의 오대조(五代祖)이시다. 고(考) 치중(致仲) 비(妣) 밀양박씨(密陽朴氏)이며 효자공은 무술(戊戌;1898년)생이며 갑진(甲辰;1964년)에 가시니 묘(墓)는 하동군(河東郡) 진교면(辰橋面) 관곡리(冠谷里) 성평곡(省坪谷) 곤좌(坤坐)이다. 배위(配位) 김해김씨(金海金氏)의 묘(墓)는 양보면(良甫面) 지례(知禮) 정동(鼎洞) 곤좌(坤坐)이며 일남(一男)을 두었는데 정영(正泳)이며 정영이 맹근(孟根) 영근(永根) 수근(守根) 재근(在根)을 낳았으며 사위는 전주(全州) 이오현(李五玄)과 남평(南平) 문사윤(文士允)이다. 맹근은 인환(仁煥)을 낳고 그가 세원(世元)을 낳았으며 영근은 윤환(潤煥) 대환(大煥) 삼환(三煥)을 낳고 윤환이 세광(世光) 세철(世哲)을 낳았으며 재근이 승환(承煥) 경환(慶煥) 영환(英煥)을 낳았으니 여타(餘他)는 적지 않는다.   병진(丙辰;1976년)년 삼월 일   도연(陶然) 김해(金海) 김 정(金 正) 가려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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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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