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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천진혼무(泗川鎭魂舞)   1)개설   사천진혼무는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선진리성 일대 육지와 바다에서 전사한 조명연합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살풀이 춤의 일종이다.   이 춤은 선진리성 일대에서 산발적으로 추어졌으며 진주, 사천, 통영 등지에 거주하던 선무당과 기생들을 중심으로 이어져 오던 춤인데 정확한 발생년도는 알 수 없으나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1900년 전후에 무당춤이 왕성하였으며 그 보다 훨씬 이전에도 추어졌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는 가산창의 발달로 인하여 각종 놀이패가 성행하여 선진리 일대의 인근을 순회하며 공연하였고 선진리성 위에서는 당산제(堂山祭)가 열리면서 무당춤이 연희되었으며 선진공원 아랫편 바닷가에서는 용신제(龍神祭)가 열리면서 무당굿과 살풀이춤이 이어졌다.   진혼무는 이 일대에서 전사한 원혼(怨魂)들의 넋을 달래는 춤이다. 단순한 무당 살풀이와는 다른 몇가지 특이점(特異點)을 발견할 수 있다. 살풀이춤 전반부에 전사한 군인들의 원혼을 불러내는 칼춤(장검무)이 시연(試演)되는 것과 칼춤의 반주음악으로 경기도 무당굿에서 흔히 사용되는 진쇠장단이 사용된 점이다. 이는 진주, 사천 등지에 거주하던 개성이나 경기도 출신 기생과 선무당이 진혼무를 연희(演戱)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무당굿과는 달리 선무당과 기생이 진혼무를 연희하여 좀더 아름답고 예술적인 춤사위로 발전시켜서 실로 특이하고 개성적인 높은 예술감각이 접목된 춤이라 할 수 있다.

  2)유래(由來)와 전승계보(傳承系譜)   진혼무의 역사적 유래는 사천문화원장을 역임하고 향토사연구소장이신 최영의씨와 오필근 사천문화원장의 고증(考證)에 의하여 발굴한 진혼무로써 1900년 전후(前後) 및 1920~1930년대, 그리고 1950년대에도 선진리성에서 살풀이 무당춤이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00년 이전에도 이 일대에서의 진혼무가 연희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으나 정확한 전승계보는 1900년 전후, 그리고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의 춤사위를 원형으로 현재의 춤사위가 재현(再現) 연희되고 있다.   진혼무가 계속적으로 이어오지 못하고 중도(中途)에 사장(死藏)된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였으나 이는 우리 민족의 전통성과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일제침략의 산물(産物)로써 어쩔수 없는 우리 민족 암흑기의 불운(不運)으로 결론 지울 수 밖에 없다. 불행중 다행으로 1952년 사변시(事變時)에 진주에 거주하던 김충실(한국무용가) 여사의 선진리성 사찰에서의 진혼무(칼춤과 살풀이) 연희는 매우 귀중한 전통무용(傳統舞踊)의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때 김충실여사는 현장에서 무당 한사람과 진주에서 초빙된 기생(일명 해주댁)과 만나게 되어 살풀이 춤을 연희하게 되었으며 그 당시 해주댁의 증언에 의하여 해주댁 본인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도 선진리성에서 해주댁의 살풀이춤이 연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당시에 연희되었던 춤사위를 살펴 원혼들을 진혼하기 위한 칼춤과 살풀이 춤을 재구성하여 연희하였던 것이다.   이 때 사용하던 칼은 무당들의 신칼이 아니라 임난때 군인들이 사용하던 군인칼을 사용하여 춤을 추었다.   1984년 경상대학교사범대학체육교육과 이영희교수와 오필근 사천문화원장, 최영희 사천향토사연구소장 등 사천지역 문화계 원로(元老)들이 진혼무 발굴, 재현의 필요성을 인지(認知)하고 발굴작업에 착수하여 5년간의 역사적 고증과 현지 탐방 및 각종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1988년 음력 10월 1일 조명군총(朝明軍塚)에서 진혼무를 시연(試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사천지역 근처, 진주와 통영에는 교방청(敎坊廳)과 권번(券番)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 기생들과 선무당들이 각종 행사와 연희 장소에 초빙되어 춤을 추었던 사실은 각종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선진지역 진혼무와 전혀 무관(無關)하다고 할 수 없다.   현재의 진혼무는 1900년 전후의 선진리 일대 무당굿을 모체(母體)로, 1920년대와 1930년대, 진주 해주댁(강귀례)의 살풀이춤을 근거(根據)로 하여 1950년대 김충실 여사가 재구성 연희한 살풀이 진혼무를 전수(傳授)받은 이영희교수의 진혼무로 이어지고 있다. 이 진혼무는 무당춤과 살풀이춤을 무대화(舞臺化) 시킨 예술성과 철학성을 동시에 접목시킨 점이 특색이다.   이 진혼무는 1991년 제23회 경남민속예술제에서 유일하게 무용종목으로 입상하였으며 그 역사성과 전통성 및 민속학적 중요성을 학계(學界)로부터 공인(公認)받았고 경남 해안지방의 중요한 민속무용의 발굴이라는 심사평이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400주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임란의 쓰라린 역사를 재인식하고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과 민속예술을 발굴, 계승, 전승시킨다는 점에서 진혼무의 역사적 예술적 의의(意義)는 매우 크다고 할수 있다.   사천진혼무의 전승계보(傳承系譜)는 다음과 같다.      ◇사천진혼무 전승계보◇   1900년 전후 (팔도무당 및 선무당)   ↓   1920년대 및 1930년대(강귀례;일명 해주댁)   ↓   1950년대(김충실;한국무용가)   ↓   1988년 사천진혼무재현,연희(이영희교수)

  3)진혼무 춤사위 순서(기본박 중심으로)   ⓐ 춤사위 준비(전방에 장검을 둔다)   ⓑ 회전하면서 오른팔을 비켜드는 춤사위   ⓒ 무릎을 굽히면서 장검을 드는 춤사위   ⓓ 장검을 비켜드는 춤사위   ⓔ 장검을 양손에 직각으로 세우는 춤사위   ⓕ 장검을 세우고 천천히 윤회하는 춤사위   ⓖ 군인을 상징하는 의상을 벗는 춤사위   ⓗ 의상을 벗고 무릎을 굽히는 춤사위   ⓘ 양손을 들고 회전하는 춤사위   ⓙ 수건을 돌리면서 회전하는 춤사위   ⓚ 수건을 뿌리면서 전진하는 춤사위   ⓛ 수건을 양손에 들고 후진하는 춤사위   ⓜ 오른손을 위로하고 왼손을 아래로하여 우측으로 이동하는 춤사위   ⓝ 왼손수건을 위로 뿌리는 춤사위   ⓞ 수건을 놓고 오른손을 위로하는 춤사위   ⓟ 오른손을 위로 들고 전진하는 춤사위   ⓠ 양손을 위로 들고 연풍대 준비 자세   ⓡ 양손을 아래로 하고 전면을 향하는 춤사위   ⓢ 오른손을 앞가슴에 올리고 왼손을 뒤로하는 춤사위   ⓣ 왼손으로 수건을 뿌리는 춤사위   ⓤ 왼손의 수건은 머리위에 올리고 오른손의 수건은 지면으로 향하는 춤사위   ⓥ 수건을 어깨에하고 앉은 자세로 춤춘다   ⓦ 수건을 군총에 뿌리고 왕생극락을 염원하는 춤사위

  4)무복(舞服)과 무구(舞具)   진혼무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당시 무당이 한지(韓紙)에다 붓으로 그림을 그려서 조선시대 군인들의 갑옷 형태를 상징하여 춤을 추었다고 한다. 또한 실제로 긴 쌍장검(雙長檢)을 양손에 들고 춤을 추었는데 이러한 형태는 무당굿을 할 때 제1마당에서 영혼을 불러내는 고대 무당굿의 한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와서 김충실여사가 현지 선진리에서 이미 사망한 해주댁과 만나서 살풀이춤을 추던 시절에는 과거의 무당춤이 상당히 현대화되고 무대예술화된 춤으로 재구성되어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천진혼무는 큰 의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상도 예술성이 담긴 의상으로 변모되었는데 한지에 그림을 그린 병사의 갑옷은 순수한 우리나라 비단으로 아름답게 디자인되어 상징적으로 갑옷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나 역시 무대의상화(舞臺衣裳化)된 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쌍장검도 목검(木劒)으로 제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벼운 중량(重量)의 쇠붙이를 사용하여 장검(長劍)을 제작할 수 있다면 가능한 1920년대의 원형에 가까운 장검을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로 사료된다.   현재의 각종 살풀이 춤보다는 좀더 길고 폭이 넓은 백색(白色) 장천(긴천)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사천진혼무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사천진혼무 후반에 무사형태(武士形態)의 의상을 벗은 다음 하얀 소복(素服)으로 살풀이춤을 추게 되는데 긴장천으로 조명군총에다 덮어주는 연희장면은 진혼무의 고형(古形)을 상징하는 특색있는 춤사위로 간주되고 있다.

  5)무용음악(舞踊音樂)   사천진혼무 음악은 진쇠장단, 살풀이장단, 자진살풀이장단, 굿거리장단을 주장단(主長短)으로 사용하고 있다.   진혼무는 살풀이춤의 일종(一種)이기 때문에 살풀이장단과 굿거리장단이 등장하고 있으나 특이한 점은 경기도 지방과 경기도 이북에서 많이 사용하던 진쇠장단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선진지역은 통양창의 발달로 인하여 충청도, 경기도, 전라도 지방등 타지방과의 문물교류(文物交流)가 활발하였으며 특히 인근지방인 진주와 통영의 권번 출신 기생중에는 경기도 이북지방 출신의 기생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무당과 합동으로 굿을하고 살풀이춤을 추는 경우 진쇠장단의 등장은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해주 출신인 해주댁과 역시 경기도 이북 출신인 김충실 여사의 살풀이 춤으로 이어지는 사천진혼무는 진쇠장단이 자연스럽게 오늘날까지 반주음악으로 사용되어 이어져오고 있다.   사천 진혼무의 주장단 형태는 다음과 같다.

  6)사천진혼무 전승방안(傳承方案)   사천진혼무는 단순한 무당굿이나 살풀이춤과는 구별되는 독특(獨特)한 예술적, 민속학적 특색을 갖고 있다. 진혼무의 예술성과 철학성, 그리고 민속학적 특색은 해주댁과 김충실 여사의 공동작업으로 이어지는 무대예술의 선구자적 작품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며, 전란(戰亂)과 동란(動亂)속에 맥을 이어온 무용예술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意義)를 ?아야한다. 진혼무는 김백봉류의 살풀이춤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춤사위를 감지(感知)하여야 하며, 김백봉류의 춤사위를 이어받은 이영희교수의 춤으로 전승되어온 의식무용(儀式舞踊)으로서 이러한 춤사위의 원형(原形)과 무용의상(舞踊衣裳), 소도구, 무용음악 등을 정리하고 보존하여 지속적(持續的)으로 전승할 수 있는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가)사천진혼무의 춤사위 특징을 비교 분석하고 예술성과 민속학적 중요성을 인지하여야 한다.   나)조명연합군 전몰위령제를 좀더 의식화(儀式化)하여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행정적, 재정적 지원이 요청되며 조명군총을 성역화(聖域化)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다)사천진혼무를 지방문화재 또는 국가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춤사위 원형보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라)사천진혼무의 춤사위 보존 및 전통예술의 계승발전 차원에서 이 진혼무의 전승자(傳承者)이며 무대예술화한 김충실여사의 인간문화재 지정(指定)이 필요하다고 본다.

★ 참고문헌 ★ 사천군지편찬위원회 「사천군지」1990. 8. 30.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 「경상남도사」 1988. 8. 25. 사단법인사천문화원「사천.곤양읍지(역본)」1989. 12. 20. 「사천현여지승람」영인본 「사천읍지」영인본 「사천환여지승람」영인본 「조선왕조실록」cd-rom 사천문화원 「수양문화(제9호)」 1993. 12. 30. 사천문화원 「수양문화(제10호)」 1994. 12. 30. 김부식 「삼국사기」 이재호역 1997. 6. 30. 솔출판사 일연 「삼국유사」 이재호역 1997. 3. 15. 솔출판사 이행 외 「신증동국여지승람」 민족문화추진회 편 1996. 8. 1. 솔출판사 이백산 「남양역사와 문화이야기」 1997. 5. 1. 남양향토사연구회(남양사랑회) 사천문화원「임란과사천」 1998. 11. 20. 이순신「난중일기」 허경진역 1997. 5. 20. 한양출판 조중화「다시쓰는임진왜란사」 1996. 6. 15. 학민사 조중화「바로잡은임진왜란사」 1998. 11. 15. 도서출판 삶과꿈 한국토지공사「내고향 문화유산을 찾아서(상, 하)」 1998. 3. 5. 솔출판사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편「우리고장 문화유산」 1998. 4. 25. 개마서원 진주문화원「진주루정지」 1995. 12. 30. 진양문화원「국역진양지」 1991. 2. 사천문화원「사천의 역사와 임진왜란」98년도학술심포지움자료 1998.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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