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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11. 향사(享祠)   사당이란 조상 또는 명현(名賢)의 신주(神主)를 모신 곳이다. 신주를 모시는 기원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멀리는 고대(古代)로 소급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자(死者)에 대한 추념과 기원은 물론, 당시에 있어서는 일족(一族)의 안녕과 자손대대의 융성(隆盛)을 선조(先祖)의 영(靈)에 의하여 가호에 힘입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에도 영성사직(靈星社稷)을 제사지내는 외에 국가의 시조(始祖)를 모시는 시조묘(始祖廟)가 있었는데 각 족장(族長)의 시조묘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고대사회에 연원(淵源)을 갖고 또 그 당시 나름대로의 의례(儀禮)의 기반 위에서 신주는 일족의 상징으로 봉제(奉祭)되었을 것이지만, 시대의 추이(推移)에 따라서 고제(古制)에는 변화를 가져왔다. 불교(佛敎)가 전래되어 국교화(國敎化)한 후부터는 전래적인 의례(儀禮) 외에 사찰(寺刹)을 건립하여 선조숭배(先祖崇拜)의 관념을 종교적으로 명복을 빌고 내세의 평안을 빌었다. 고려말 성리학이 수용되면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의례가 생활화 됨에 따라서 경신숭조(敬神崇祖)의 관념은 보다 민간에 보편화되었고 격식화(格式化) 시키기에 이르렀다.   사당(祠堂)을 건립하고 신주를 모시는 일이 국가적인 성질의 것이건, 일족단적(一族團的)인 성질의 것이건 간에 경신숭조 사상에 그 기초를 두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는 현실적으로는 그의 일족단(一族團)을 떠나 그 향토(鄕土), 더 나아가서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진호신(鎭護神)의 상징으로 우리 역사상 걸출(傑出)한 인물을 추모하여 봉사(奉祀)하게 되었고, 국가에서도 특별한 배려를 하였으며, 임금이 직접 사액(賜額)또는 어제(御製)의 비문(碑文)을 내렸으며, 전지(田地)를 내렸던 것이다.   사당의 기원은 이미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나 조선왕조의 사당은 려말선초(麗末鮮初)에 새로운 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1389) 12월에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이 상소(上疏)하여 조상을 재사 함에 있어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쓰되 대부(大夫) 이상은 3세(三世)를, 6품(六品) 이상은 2세(二世)를 지냈고, 7품(七品) 이하 서인(庶人)은 그 부모만을 제사지내되 정실일간(淨室一間)을 택하여 신주(神主)를 모셔야 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 해 8월에 사대부가제의(士大夫家祭儀)가 반포(頒布)되어 이때부터 각 가정에서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시행이 잘 되지 않아서 공양왕 3년 6월에 다시 가묘(家廟)의 제(制)를 독려한 바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 중종(中宗)때에 조광조(趙光祖) 등의 건의로 나라에서 가묘(家廟)를 장려함에 따라 사대부(士大夫) 집안은 모두 사당을 짓게 되었고,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작으나마 집 모퉁이에 사당(祠堂)을 마련하는 등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한 가문(家門)이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것은 그 일족(一族)의 사당에 국한된 것이다. 그런데 학문(學問), 덕행(德行)이나 무력(武力)이 뛰어난 인물의 사당은 그 연고지 뿐 아니라 각 고장의 유림(儒林)과 백성에 의하여 각처에 세워져 전국민의 숭상(崇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사당(祠堂) 등이 있다. 오늘날 현존하는 선현(先賢)들의 사당들이 사적(史蹟) 또는 문화재(文化財)로서 지정되어 국가의 두터운 배려 아래 새 시대의 역사상으로 부각시켜 사전(祠典)으로서 제향되는 이유도 근원적으로는 경신숭조의 사상을 보다 강하게 인식케 하며, 나아가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복지증진을 새롭게 다짐하고 기원하는 염원(念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당도 우리에게 다만 옛날에 있었던 선열들의 역사적 사실이나 유적지로 기억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생동(生動)하는 민족의 정신적인 원동력과 민족의 슬기와 커다란 힘을 키워 주는 근원(根源)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선진리 신기>

■ 향재(享齋) ◈ 首陽齋(수양재) : 해주오씨 해주오씨 치제소이다. 재사(齋舍)내에 회관(會館)이 건립되어 있다.

<선진리 연호>

  ◈ 蓮湖齋(연호재) : 파평윤씨      • 蓮湖齋重建小記(연호재중건소기)      本齋(본재)는 僉正公(침정공) 諱良(휘량)의 典祀所(전사소)이다. 公(공)은 始祖(시조) 太師公(태사고) 坡平尹(파평윤) 華達(화달)의 十七世孫(세손)이며 李朝佐命功臣(이조좌명공신) 嘉善大夫(가선대부) 原平君(원평군) 諱(휘) 穆(목)의 孫子(손자)로서 司僕寺僉正(사복시첨정) 벼슬을 받아 朝廷(조정)에서 百官(백관)의 模範(모범)되셨고 兄弟(형제) 四人(사인)이 鄕里(향리)에 集賢書院(집현서원)을 創建(창건)하여 後學(후학) 等(등)이 學德(학덕)과 業績(업적)을 護揚(호양)하여 四風師君(사풍사군)이라 稱(칭)하였다. 其外(그외) 稱頌(칭송)을 받은 史蹟(사적)이 많이 있었건만 歲月(세월)이 오래되어 參考(참고)할 길이 없어 可惜(가석)하도다. 奈何(내하)오 後孫(후손)들의 恨聲(한성)이 가득 하던차 一九六九年 十月에 宗議(종의)를 열고 公(공)의 德(덕)을 追慕(추모)하고 享祀(향사)를 모시도록 決議(결의)한즉 公(공)의 十六世孫(십육세손) 翼成翁(익성웅)이 自費(자비)를 負擔(부담)하여 一九七十年 四月 一日에 着工(착공) 同年(동년) 十月 十八日에 竣工(준공)하니 垈地(대지) 八十坪(팔십평)에 正棟三間(정동삼간)과 門舍三間(문사삼간)으로 扁曰(편왈) 永慕齋(영모재)로 하였다. 年久歲深(년구세심)하야 頹落無地故(퇴락무지고)로 本齋(본재) 重建(중건)을 宗中(종중)의 合議(합의)로 一九九七年 四月 五日에 着工(착공) 同年(동년) 十月 二十六日에 竣工(준공)하니 垈地(대지) 百三十坪(백삼십평)에 正棟三間(정동삼간)과 門舍三間(문사삼간)으로 扁曰(편왈) 蓮湖齋(연호재)로 하였다. 後孫等(후손등)은 以後(이후)로 必(필)히 享祀(향사)에 參與(참여)하여 先祖(선조)의 遺德(유덕)을 追慕(추모)할 것이며 千秋萬代(천추만대)에 길이 奉享(봉향)할 것을 祈願(기원)하는 바이다.      一九九八年 十月 日   蓮湖齋重建推進委員長 僉正公 十六世孫 翼守 謹構   연호재중건추진위원장 첨정공 십육세손 익수 근기

<신촌리 화곡>

◈ 龍湖齋(용호재) : 김해김씨 • 龍湖齋記(용호재기) 臥龍山來自頭流而崛起南方勢若龍盤虎距而爲一靈峰也 西行數里有向南而爲村者曰龍見之花谷故通訓 와룡산래자두류이굴기남방세약용반호거이위일령봉야서행수리유향남이위촌자왈용현지화곡고통훈 大夫軍資監正金海金公諱顯穆後孫之世庄後負泗南十畝之沃野前有滄海萬頃之蒼波東有蓮花百世之呈 대부군자감정김해김공휘현목후손지세장후부사남십무지옥야전유창해만경지창파동유연화백세지정 媚西揖金鼇四時之淑氣亦足爲朝暮之勝槩也盖公之先駕洛璿源而世稱金氏三賢之一戊午名賢濯纓先生 미서읍금오사시지숙기역족위조모지승개야개공지선가락선원이세칭김씨삼현지일무오명현탁영선생 諱馹孫后公之世自咸州始奠居于此耕稼時禮自娪以終老焉今距公之世數百年于玆矣後孫仍爲世庄而門 휘일손후공지세자함주시전거우차경가시례자오이종노언금거공지세수백년우자의후손잉위세장이문 欄閥閱人皆淳謹雅則克守氈業而散居晉泗者多賢乂潤屋則未嘗一日忘先壟之爲事而恨未其肯搆 丙舍也 란벌열인개순근아즉극수전업이산거진사자다현예윤옥즉미상일일망선롱지위사이근미기긍구 병사야 往歲甲子秋後孫炳奎君謨其從弟連守君各首出巨貲爲基金又與三從叔嵓坤協謨大宗則皆樂爲之應而血肩 왕세갑자추후손병규군모기종제연수군각수출거자위기금우여삼종숙암곤협모대종즉개락위지응이혈견 担之築三架四楹于花谷盖其先壟皆在泗州故也門間雇舍奐然咸備足爲致齋之所也扁曰龍湖龍德豈不爲美 단지축삼가사영우화곡개기선롱개재사주고야문간고사환연함비족위치재지소야편왈용호용덕기불위미 耶盖取地名及飛龍在天利見大人之義也 日炳奎君踪余書室而跪言曰吾家世貧先世丙舍力綿未遑而今才 야개취지명급비룡재천이견대인지의야일병규군종여서실이궤언왈오가세빈선세병사력면미황이금재 肯搆也得吾子文將欲爲顯光吾祖之潛德懿行願惠一言以爲記文也 不文辭其請盖懇有不可終辭者曰春雨 긍구야득오자문장욕위현광오조지잠덕의행원혜일언이위기문야불문사기청개간유불사종사자왈춘우 露旣濡君子悉愓履之秋霜露旣降君子悽愴履之皆孝子傷時感物而爲追遠報本之道也今金氏諸君協心力以 로기유군자실상리지추상로기강군자처창리지개효자상시감물이위추원보본지도야금김씨제군협심력이 成其先父祖未遑之事則亦莫不爲孝事也雖然以是爲能事畢則曰非也于以供蠲吉而資齋宿焉以奉原野之 성기선부조미황지사즉역막불위효사야수연이시위능사필즉왈비야우이공견길이자재숙언이봉원야지 職又講敦和睦究孝悌忠信之道慕先祖之潛德懿行軆於心而行之以無子弟過然後方可以爲傷時感物而盡 직우강돈하목구효제충신지도모선조지잠덕의행체어심이행지이무자제과연후방가이위상시감물이개 追遠報本之道矣蓋相與勉旃役始於甲子추迄于乙丑春而實心相與者後孫英출敬洙喜洙玄洙鎭洙也 추원보본지도의개상여면전역시어갑자추흘우을축춘이실심상여자후손영출경수희수현수진수야 檀紀四千三百十八年 乙丑 正月 日 단기사천삼백십팔년 을축 정월 일 晉山 河 東 根 記 진 산 하 동 근 기 烏川 鄭 直 敎 書 오산 정 직 교 서

  • 용호재기해설      와룡산은 지리산맥이 스스로 내려와 높은 봉우리 우뚝 솟아 일어나니 남쪽의 산세가 약하여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지나가는 형상이 되어 하나의 영봉이 되니라. 서쪽으로 몇 리 가면 남쪽으로 향하여 있이로서 신비스러운 는 한 마을이 있는데 말하기를 용현의 화곡이라 하니라. 이런고로 통훈대부 군자감정의 벼슬을 지낸 김해김공 휘 현목의 후손(後孫)이 대대로 살아온 전장으로 뒤에는 사남의 기름진 들을 짊어지고 앞에는 만경창파(萬頃蒼波)의 넓은 푸른 바다가 있음에 동에는 연꽃이 백세의 상긋한 기쁨을 드리고 서에는 금빛나는 큰자라가 사시절의 맑은 따뜻한 기운을 모아드리는 형상이고 또 아침해가 뜰때와 해질때의 현상을 다 드러나게 되고 공의 선대 선조는 김해 가락선원의 근원이고 이로써 세상에서 칭하는 김씨 삼현파의 하나인 연산조 무오사화의 명현(名賢) 탁영선생 휘 일손의 후손이다. 공의 세대에 스스로 함주에서 비로소 이 자리에 살 터전을 정하고 논 갈고 곡식 심어 거두고 글, 시, 독서의 예의로서 스스로 기쁘고 즐겁게 일생 늙음을 맞이니라. 이제와서 공의 세대가 수백년 지나므로 후손이 이로 인하여 대대로 살아온 세장 문간에 조상의 공적을 기둥에 걸어두고 사람이 다같이 순순하고 삼가고 맑게 대대의 세업을 지켜오면서 진주나 사천 등지로 흩어져 살면서 많은 재주있는 어진 후손들이 윤택 재옥을 선영의 무덤에 세울 것을 하루도 잊지않고 한이되어 오던차에 미기에 자랑스러울 병사(재사)를 세울 것을 지난해 갑자년 가을에 후손 병규군이 그의 종제 연수군과 의논하여 각각 맨먼저 거액의 기금을 내게 되었고 또 삼종숙 암곤과 협모하여 대종회에서 논한즉 다같이 즐겁게 호응 응락하여 씩씩하게 부담하고 기둥 네 개의 재옥 세채를 화곡에 지었는데 이는 다 조선(祖先)의 무덤이 사천에 있는 연고이니라. 고직이가 사는 집까지 크게 빛나게 구비하니 흡족하게 제사뫼시는 재(齋)가 되는 바이다.   편액하기로 호수의 용, 용의 덕을 의미한 용호재라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는 다 그의 지명을 따서 제명한 것이다. 나는 용 하늘에 있고 대인의 의로움을 나타냄이라. 후루는 병규군이 나의 서재에 나타나 무릅꿇고 말하기를 우리집안은 대대로 가난하게 살아오다 보니 선대의 유업을 끊어지지 않고 이어는 왔으나 힘이 없어 병사를 짓지 못하다가 이제야 능히 자랑스럽게 지었으니 나는 어르신네 선생님 글을 얻어서 우리 할아버지 조선의 숨은 덕과 빛나고 아름다운 큰 업적을 빛나게 나타내고자하니 원하옵건대 한마디 말의 은혜로서 기문이 되기 위함이라고하니 글을 잘못한다하여 사양하였으나 그의 청이 간절함이 있어 마침내 사양하는 것은 옳지못하다고 생각하여 봄비와 이슬이 이미 그대를 아름답게 적시고 이 때 그대의 근심, 그 공경스러움을 알고 , 서리 이슬 이미 내리고 그대의 서러운 슬픔을 밟아온 자취는 다 효도라. 그대의 상한 마음에 감동하여 느낄대라. 모든 일은 그의 근본에 보답하기 위하여 지나간 일을 그리워 함이 도리이다.   이제 김씨 여러분은 욕되지 않게 힘과 마음을 화합하여 이로써 그대의 아버지, 할아버지, 조선에 대하여 그를 게으름없이 이루지 못한일을 이룸으로써 효도에 대한 일을 그만 두지 말아서는 아니되니라. 그러나 이 일을 마쳤으니 이제는 아니하여서는 아니된다. 이로싸 정결하게밝고 좋은 날을 가려서 이 재로서 제사를 지켜나갈 것이다. 이로써 원래의 직분을 잘 받들어 나가고 또 돈독하고 화목하게 강구하여 효와 충신의 도리로 선조의 잠긴 즉, 숨은 은덕과 빛나고 아름다운 행적을 생각하여 몸과 마음으로 이 모든 행하는 행동에서 자제들의 과오가 없는 그런 후라야 바야흐러 상하고 아픈 마음을 느낄 때에 보다 다하여 추원부본의 도의의 깃발을 세워 서로 힘쓰기를 아니할소냐. 일을 갑자년 가을에 시작하여 을축년 봄에 마치니 서로 같이 마음과 정성을 다한자는 후손 영줄, 경수, 희수, 현수 진수이다.      단기 4318년 을축 정월 일   진산 하동근 글짓고   오천 정직교 글 쓰다.

◈ 敬慕齋(경모재) : 경주이씨 • 敬慕齋記(경모재기) 爲人子孫之職也는 莫善於報本이니 報本之意가 無他라 敬其心而尊其祖니 況乎其貽謨之遠과 遺澤之 위인자손지직야는 막선어보본이니 보본지의가 무야라 경기심이존기조니 황호기이모지원과 유택지 久而可不景慕乎아 盖人之情이 祖遠則慕亦昜至於衰故 或閣而尊之하고 或碑而傳之하야 以致不忘之 구이가불경모호아 개인지정이 조원칙모역양지어쇠고 혹각이존지하고 혹비이전지하야 이치불망지 義하니 是皆古今孝子慈孫之用心이 然也라 泗之南龍山之下에 有里回新復은 慶州李氏之世庄也而子 의하니 시개고금효자자손지용심이 연야라 사지남용산지하에 유리회신복은 경주이씨지세장야이자 孫이 仍居라 李氏之先은 新羅佐命功臣 諱謁平之遠世孫 諱居明 新羅蘇判公之後也而傳互 二十四世 손이 잉거라 이씨지선은 신라좌명공신 휘알평지원세손 휘거명 신라소판공지후야이전호 이십사세 孫諱達文하야 自錦山으로 移寓泗川하니 乃其始基之祖也라 自是以來로 曆世八九而嘗無一室寓慕耶 손휘달문하야 자금산으로 이우사천하니 내기시기지조야라 자시이래로 역세팔구이상무일실우모야 築者하야 春秋奠掃之禮를 沈泯하야 爲其子孫者之恨이 久矣러니 以戊午省楸之餘에 宗議齊發하야 축자하야 춘추전소지례를 심민하야 위기자손자지한이 구의러니 이무오성추지여에 종의제발하야 協謨于宗族間하니 以同聲相應으로 無不協贊하야 以乙未之春에 築室于龍山先塋之下하야 齋其名曰 협모우종족간하니 이동성상응으로 무불협찬하야 이을미지춘에 축실우용산선영지하하야 재기명왈 敬慕라하고 將欲春秋香火之儀와 宗族講論之計하니 爲人子孫之至行이 莫如屯也則豈不重且大乎아 경모라하고 장욕춘추향화지의와 종족강론지계하니 위인자손지지행이 막여둔야즉개불중차대호아 惟願諸後承은 日新于新而相與勉之하야 祖宗樹德 之美를 勿墜勿忘而永世久傳하리라 日에 鐘南鐘道 유원제후승은 일신우신이상여면지하야 조종수덕 지미를 물추물망이영세구전하리라 일에 종남종도 諸公이 訪余洙陽寓舍하야 請余一言記之어늘 余以不文으로 累辭不獲하야 謹按狀牒而略敍如右爲之記라. 제공이 방여수양우사하야 청여일언기지어늘 여이불문으로 누사불획하야 근안장첩이략서여우위지기라. 辛酉 三月 下浣 신유 삼월 하완 金海 金相淵 謹撰而書 김해 김상연 근찬이서

<신복리 신복>

  • 경모재기해설      사람은 자손된 직분으로서, 착함으로서 근본에 보답함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祖先)에 보답하는 듯은 다른데 없고 공경한 마음으로 그의 조상을 높임이라. 하물며 그의 자손에게 남긴 보훈이 멀다고 후세까지 남아있는 은덕이 오래 되었다고 가이 우러러 사모하지 않겠는가. 대개 사람의 정이란 먼 조상이면 역시 쉽게 생각하기에 이르게되니 쇠(衰)한 연고니라. 그러므로 혹 제각을 높이 지어 뫼시기도 하고 비를 세워 전하기도 한다. 그리하야 조상의 은덕을 잊지 아니하는 이치니라. 이는 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할아버지가 손자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사천의 남쪽 와룡산 아래 마을이 있는데 돌아가면 신복이다. 경주이씨 자손이 대대로 살아온 세장지다. 이로 인하여 사는데 이씨의 선대는 신라 때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의 먼 후손이며 휘 거명(居明)은 신라 소판공(蘇判公)의 후손으로 전하여 오고 24세손 휘 달문(達文)이 스스로 금산에서 사천으로 이우(移寓)하니 이것이 처음 터잡은 조상이다.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내려오면서 지낸 세월이 팔구대가 되어도 제사지낼 재실 하나 지어 놓은 것이 없었으니 봄, 가을 성묘, 시사때마다 깊이 골몰하여 오면서 자손된 자로 한이 되어옴이 오래더니 이로써 무오년 성묘시제 뫼신 후에 종원의 같은 발의로 종족간에 협력하고 꾀하여 같은 소리로 서로 상응하여 협력과 찬성을 아니함이 없더라. 이로써 기미년 봄에 재실을 용산 선영의 묘소 아래 세우고 재실의 이름을 경모재라하고 떳떳하게 봄, 가을 분향 제사(祭祀)를 드리니 종족간에 강론도 하고 계획도하니 사람된 자손으로서 도리를 행하게 이르렀다. 이와같이 모이고 두텁게 되니 어찌 중하고 또 크지 않은가? 원하옵건대 여러 후손들은 이어가고 날이 갈수록 새로, 서로같이 힘쓰라.   조상과 일가들이 세운 아름다운 덕을 떨어뜨리지 말고 잊지도 말며 오랜 세상을 오래오래 전하라. 어느 하루 종남(鐘南), 종도(鐘道) 제군이 나의 수양집에 ?아와서 나에게 한마디 말이 기문 글을 청하는데 나는 글을 잘하지 못하여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거역하지 못하고 이내 삼가히 글을 살펴보고 간략하게 우(右)와 같이 기문을 지어 쓰노라.      신유(辛酉) 삼월(三月) 하완(下浣)   김해(金海) 김상연(金相淵) 근찬이서(謹撰而書)

<신복리 신복>

  ◈ 崇慕齋(숭모재) : 삭녕최씨      • 崇慕齋 創建記(숭모재 창건기)      吾朔寧崔門(오삭령최문) 新復派(신복파)는 高麗(고려) 門下侍郞(문하시랑) 平章事(평장사) 天老(천노)와 高麗(고려) 門下侍郞(문하시랑) 平章事(평장사) 國子監大司成(국자감대사성) 樞密副使(추밀부사) 參知政事(참지정사)를 歷任(역임)하신 瑜價(유가)를 遠祖(원조)로 하여 其後(그후) 四世(사세) 不傳(불전)이고 五世孫(오세손) 含慶(함경) 殿연(전연)을 一世(일세)로, 二世(이세) 時玉(시옥)은 承奉郞司憲糾正(승봉 랑사헌규정), 三世(삼세) 守命(수명)은 承奉郞司設署令(승봉랑사설서령), 四世(사세) 上麟(상린)은 朝鮮朝(조선조) 初期(초기)에 大司憲(대사헌) 集賢殿(집현전) 直提學(직제학)을 지내시고 晋陽(진양)에 退老(퇴노), 矗石樓(촉석루)를 重創(중창)하셨고 五世(오세) 道源(도원)은 逸持平(일지평)으로 四郡(사군)에 有, 治績(유, 치적)하여 六世(육세) 景淵(경연)은 別侍衛副司正(별시위부사정), 七世(칠세) 目雯(목문)은 忠順衛(충순위)로 入泗川(입사천)하였으며 八世(팔세) 停(정)은 忠順衛(충순위) 九世(구세) 潑(발)은 參奉(참봉) 十世(십세) 振寧(진녕)도 參奉(참봉)으로 十一世(십일세) 斗南(두남)은 壬辰倭亂時(임진왜란시) 奉親(봉친)이 至孝(지효)하였고 倭賊(왜적)에 被擄(피로)되었을 때 奪劒歸還(탈검귀환)하여 復戶(복호)가 내리고 掌樂院(장낙원) 正加僉樞公(정가첨추공)에 贈職(증직)되었고 十二世(십이세) 貞立(정립)은 宣敎郞(선교랑) 自如道察訪(자여도찰방)을 지냈으며 吾新復派宗(오신복파종)의 始發(시발)이다.   그동안 齋室(재실) 建立(건립)을 宿願(숙원)하던중 西紀(서기) 一九八七年 泗南面(사남면) 忠勳峯(충훈봉) 十四世(십사세) 重謙(중겸)의 墓)묘) 先山(선산)을 泗川空軍(사천공군)의 不得己(부득이)한 懇請(간청)으로 貳九00萬(이천구백만)원에 賣却(매각)하고 一九八七年 四月 八日 先塋(선영)을 龍見面(용현면) 鞍岾山(안점산) 山嶝(산등)의 配(배) 端人(단인) 全州李氏(전주이씨) 墓(묘)에 移葬(이장) 合祔(합부)하여 碑及石物(비및석물) 一切(일절)을 新設(신살)하고 新基里(신기리) 六三八番地(육삼팔번지)에 位土畓(위토답) 九一0坪(구백열평)을 七八九萬(칠백팔십구만)원에 買入(매입)하고 新復里(신복리) 一二八番地(일이팔번지)에 百坪(백평)의 敷地(부지)를 壹四0萬(일백사십만)원에 買入(매입)하여 壹七五0萬(일천칠백오십만)원으로 一九八八年 十二月 十五日에 齋室(재실)을 竣工(준공)하여 崇慕齋(숭모재)라 命名(명명)하고 吾宗派(오종파)의 祭先致齋所(제선치재소)로 한다.   左(좌) 寄託金(기탁금)은 沙村(사촌) 募金額(모금액)인 바 其後(그후) 宗長(종장)으로부터 壹貳00萬(일천이백만)원의 寄託(기탁)이 있어 現在(현재) 積立中(적립중)이다.      西紀 一九九0年 十二月 日   顧問 崔允甲   고문 최윤갑   宗長 崔大卿   종장 최대경   有司 崔寅碩   유사 최인석   崔榮義 撰書   최영의 찬서

<신복리 신복>

  ◈ 永慕齋(영모재) : 창원황씨   • 永慕齋祭壇擴張重修記(영모재제단확장 중수기)   西紀一九七六年 五月에 現永慕齋를 創建하여 每年 合同時祀를 모셔오던中 時祀奉祭位牌가 年年增加하여 祭壇이 狹小함을 痛感하여 左記 芳名人의 自進 協贊助로 擴張重修하였음을 記錄存置합니다      西紀 一九八六年 十月 一日   後孫 永秀撰   후손 영수찬

<신복리 신복>

  ◈ 敬慕齋(경모재) : 밀성박씨      • 敬慕齋記(경모재기)      晋陽(진양)의 南(남)쪽 泗川(사천)의 臥龍山(와룡산) 아래 龍見面(용현면) 新復村(신복촌) 뒷편 언덕에 새로운 齋閣(재각)이 세워졌으니 여기가 敬慕齋(경모재)다. 여기는 密城朴氏(밀성박씨) 啞堂派(아당파) 一族(일족)의 世庄地(세장지)로서 그 先代(선대)의 靈位(영위)를 모시고 齋宿(재숙)과 精誠(정성)을 모우기 爲(위)한 곳이니 不侈不儉(불치불검)의 아담한 墓閣(묘각)이다. 朴氏(박씨)는 우리나라 閥閱中(벌열중)에서 가장 優位(우위)를 点(점)하는 바 모두 新羅(신라)의 始祖(시조) 朴赫居世王(박혁거세왕)을 唯一祖(유일조)로 받드나니 密城朴氏(밀성박씨)는 新羅(신라) 第五十四代(제오십사대) 景明王(경명왕)의 第一王子(제일왕자)인 密城大君(밀성대군)을 始祖(시조)로 삼는다. 高麗朝(고려조)에 이르러 여러 갈래로 分派(분파)되니 그 中(중)에서 門下侍中公派中(문하시중공파중)의 宗派(종파)인 銀杏山派(은행산파)에서 杜門洞(두문동)의 七十二賢中(칠십이현중)의 一人(일인)인 諱(휘) 詡(후) 號(호) 松隱先生(송은선생)의 第三子(제삼자) 諱(휘) 調(조) 號(호) 啞堂先生(아당선생)을 派祖(파조)로 삼는다. 先生(선생)은 圃隱(포은) 鄭夢周先生(정몽주선생)을 師事(사사)하다가 그의 被禍後(피화후)로 出仕(출사)를 避(피)하고 南下(남하)하여 晋陽(진양)의 東(동)쪽 月牙山(월아산) 아래 琴山面(금산면) 沙月里(사월리)에 터전을 잡으니 儒行(유행)과 德望(덕망)이 甚著(심저)하여 그의 雅號(아호)를 따라 啞堂派(아당파)라 하였다.   그 後(후)에 中祖(중조)로부터 第十五世(제십오세)의 參奉(참봉) 諱(휘) 思富公(사부공)이 泗川(사천)의 新復村(신복촌)으로 移居(이거)하니 後孫(후손)이 繁衍(번연)하여 第二(제이)의 世庄地(세장지)가 되고 여기에서 統營(통영), 陜川(합천), 固城(고성), 等地(등지)로 散居(산거)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그 雲仍(운잉)이 蕃衍(번연)하니 自然(자연)히 다시 派(파)가 細分(세분)되고 그 中(중)에서 通德郞(통덕랑) 五世孫(오세손) 文垢派(문구파)라 일컫고 여기에는 東鄕(동향)의 六世祖(육세조) 諱(휘) 景祿公(경록공)과 配(배) 咸安趙氏(함안조씨), 東元(동원)의 六世祖(육세조) 諱(휘) 景祐公(경우공)과 配(배) 竹山朴氏(죽산박씨), 東燮(동섭)의 六世祖(육세조) 諱(휘) 景祐公(경우공)과 配(배) 晋陽鄭氏(진양정씨), 東漢(동한)의 六世祖(육세조) 諱(휘) 景祉公(경지공)과 配(배) 晋陽鄭氏진양정씨), 東鎭(동진)의 六世祖(육세조) 諱(휘) 景興公(경흥공)과 晋陽鄭氏(징양정씨)의 靈位(영위)를 모셨다. 나무의 뿌리가 두터우면 그 枝葉(지엽)이 茂盛(무성)하고 물의 根源)근원)이 깊으면 그 流波(유파) 가장 長遠(장원)하나니 우리나라 姓氏(성씨)의 歷史(역사)로도 가장 오래되었거니와 또 名門(명문) 巨閥(거벌)의 後裔(후예)답게 爲先(위선)의 孝心(효심)이 至極(지극)하여 그 結晶體(결정체)로서의 齋舍(재사)가 그 先塋(선영)의 아래에 우뚝섰다. 이로써 先祖(선조)의 妥靈(타영)이 이루어지고 그 精神(정신)이 綿綿(면면)히 이어져서 後世(후세)에 餘蔭(여음)으로 蕃衍(번연)하고 또 빛날 것이다.   이 役事(역사)의 經始(경시)는 西紀(서기) 一九九五年 五月에서 仝年(동년) 七月이었고 이 일을 完成(완성)하기 爲(위)하여는 數年(수년) 前(전)부터 敬慕齋建立推進委員會(경모재건립추진위원회)를 열어 門中(문중)의 總意(총의)에 依(의)하여 構成(구성)하니 委員長(위원장)은 東元(동원)이요, 委員(위원)은 理生(이생), 東綺(동기), 三濟(삼제), 慶錄(경록), 東源(동원) 諸君等(제군등)이고 東綺君(동기군)은 有司(유사)를 爲(위)하여 힘썼다.   이 齋舍(재사)의 名稱(명칭)은 委員(위원)들의 合議(합의)에 依(의)한 것이요 그 正門(정문)은 聖道門(성도문)이라고 일렀으니 爲先(위선)의 精神(정신)에 符合(부합)되었다. 이 役事(역사)를 끝낸 뒤에 委員長(위원장) 東元君(동원군)의 請囑(청촉)이 있어 不佞(불녕)이 八耋(팔질)의 昏迷(혼미)와 不文(불문)임을 무릅쓰고 敢(감)히 그 顚末(전말)을 略述(약술)하여 後來(후래)의 證憑(증빙)을 도웁고자 이로써 記(기)를 삼는 바이다.      西紀 一九九七年 三月 日      前慶南大學校 金海 金 尙 祚 謹撰   전경남대학교 김해 김 상 조 근찬   晋州 姜 善 圭 謹書   진주 강 선 규 근서

◈ 尼陽齋(니양재) : 평산신씨 • 尼陽齋記(니양재기) 泗之鎭山 曰 尼邱其西는 卽平山申氏世庄也라. 其東距十里에 有闕謂花巖之 坡而斧堂役如하면 楸梓 사지진산 왈 니구기서 즉평산신씨세장야 기동거십리 유궐위화암지 파이부당역여 추재 成林者는 乃申氏中祖依履之藏也니라. 歲時省掃香火하고 惟謹每當霜露之卽無一畝宮하야 致齋之所爲 성림자는 내신씨중조의리지장야니라. 세시성소향화하고 유근매당상로지즉무일무궁하야 치재지소위 恨이라. 今年春後孫相謨하고 其族桓與楗이 就尼邱之陽에 建屋四溋하야 以寓瞻慕之誠하고 東置小軒 한이라. 금년춘후손상모하고 기족환여건이 취니구지양에 건옥사영하야 이우첨모지성하고 동치소헌 數間하여 爲後承繼業之所하니 於是에 齋宿有室綴食有座花樹會하고 而衣冠 整籩豆하여 嘉而登降肅하며 수간하여 위후승계업지소하니 여시에 재숙유실철식유좌화수회하고 이의관 정변두하여 가이등강숙하며 至若子姓之講學賓朋之燕飮이 皆於是而有賴焉이라. 因指山而扁之曰尼陽이라하고 匕復月將落之 지약자성지강학빈붕지연음이 개어시이유뢰언이라. 인지산이편지왈니양이라하고 비부월장낙지 使로하여금 其族等請記於余한데 余雖老昏會於仙庄非生而客其敢辭하리요 諸斯齋之勝을 可以吟想하사 사로하여금 기족등청기어여한데 여수노혼회어선장비생이객기감사하리요 제기재지승을 가이음상하사 니 而擧道之矣라 臥龍秀麗而當檻하야 可瞻仰於昕夕也라 金鰲縹緲而入簾하니 可揖遜於仙侶也라 北 니 이거도지의라 와룡수려이당함하야 가첨앙어흔석야라 금오표묘이입염하니 가읍손어선려야라 북 續泗水하고 前臨大海하야 包絡坤하고 維混涵太虛者라 雖顧컨대 虎頭神畵하야 詎能以描寫하니 以 속사수하고 전임대해하야 포락곤하고 유혼함태허자라 수고컨대 호두신화하야 거능이묘사하니 이 名狀也라 哉噫라 尼邱洙泗卽魯之名 山水而吾夫子之道學으로 根基京在是焉이라 今日地名之相符는 명상야라 재희라 니구수사즉노지명 산수이오부자지도학으로 근기경재시언이라 금일지명지상부는 顧非偶然矣이라 申氏之齋豈適爲慕先而設也라 其必曰講夫子之道想하고 夫子之風하니 積學種文不 고비우연의이라 신씨지재기적위모선이설야라 기필왈강부자지도상하고 부자지풍하니 적학종문불 陲世守 靑氈則申氏之盛庶見匹美乎라 齋魯而歷世先靈하니 亦將悅豫而享于芬苾矣라 惟願諸公은 各 수세수 청전즉신씨지성서견필미호라 재노이역세선령하니 역장열예이향우분필의라 유원제공은 각 於斯加勉焉니라 申氏는 海東大族으로 高麗名臣 壯節公之後也라 本朝寅齋先生玄孫花巖處士諱稐遺 어사여면언니라 신씨는 해동대족으로 고려명신 장절공지후야라 본조인재선생현손화암처사휘륜유 돈于泗上하고 其子諱伯喆當壬燹에 錄宣武勳하야 今日氏英之繁衍과 門戶相持者는 皆宣武公之九世十世賢仍也라 돈우사상하고 기자휘백철당임선에 록선무훈하야 금일씨영지번연 과 문호상지자는 개선무공지구세십세현잉야라 柔兆攝提格黃花節 孔巖 許 巑 撰 유조섭제격황화절 공암 허 찬 찬

<온정리 온정>

  • 니양재기 해설      사천의 진산은 니구산(尼邱山)이고 그 서쪽은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살아온 세장지이다. 그 동쪽 십리거리에 있는 화암(花巖) 언덕 부당(斧堂)에서 엿볼 것 같으면 노나무, 가래나무 수풀을 이룬 것은 이내 신씨 중조(中祖)의 의리(依履)의 장(藏)이니라. 해마다 때에 맞춰 성묘하는데 청소하고 향화(香火)하여 제사 지내고, 오직 삼가히 정성으로 매년 상로시제 때 집없이 치제함이 한이 되더니 금년 봄에 후손들이 서로 모의하여 그 족인인 환(桓)과 건(楗)이 같이 시작하여 양지바른 언덕에 기둥네개의 집을 세우니 이로써 지성을 다하고 첨모(瞻慕)하는 집이다.   동쪽에 작은 집 수칸을 지어두니 후손들이 이어가게 되는 바로써 이 재(齋)에서 자고 먹고, 제사 뫼심에 공손하고 엄숙하게 오르내리니 아름답다. 뿐만 아니라 자제들을 가르치고 배우며, 손님과 벗을 접대하고 대접하는 데는 다 이 재에 힘입음이 있더라. 이로 인하여 산을 가르켜 이름하기를 니양재(尼陽齋)라하고 다음달에 낙성하기로 하여 그 족인(族人) 환(桓)과 건(楗)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는데 나는 늙고 비록 혼미하나 손님에 대하여 감히 사양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이 모든 니양재가 휼륭함을 가히 생각하고 이는 도학(道學)을 숭상하는 도리(道理)라하고 와룡산은 아름답고 빛나며 당함에서 우러러보니 조석으로 해 지고 뜨는 것을 볼 수 있고 금오산이 저멀리 아득하고 넓게 보이고 발안에 들며 가이 겸손하고 사양함이 선녀극선 같으랴.   북에는 사수(泗水)에 속하고 앞에는 큰 바다가 곤방으로 둘러싸서 다다르니 오직 한 덩어리가 되어 잠기어 하늘같이 터져있고 비록 돌아보건대 호랑이 머리같은 형상을 어찌 그리 능하게 귀신같이 잘 그린 명장(名將)의 형상이다. 아아! 니구수사(尼邱洙泗;니구산이 있는 수양땅 사천)는 그 아름다움이 중국 노나라의 공부자(孔夫子 ; 공자)가 노닐던 산천과 같으며 도학(道學)의 기틀을 다지는 서울 성균관 대성전과 같으니라. 오늘날 땅이름이 중국 지명과 서로 상통부합됨을 돌이켜 보건대 우연한 것이 아니리라. 신씨 재실은 어찌 조선(祖先)을 숭모하게 됨을 알맞게 세움이니라. 그는 말하건대 반드시 공자의 가르침의 근본을 배워 쌓고 신씨 조상대대로 전하여 온 유풍(遺風)을 떨어뜨리지 않고 지킴으로서 신씨의 번성함과 아름다운 짝 됨을 나타내 봄으로 재(齋)는 노나라 역대 세상으로 선영 역시 장차 미리 즐겁게 분향 향사(享祀) 드림이니 오직 원하옵건대 신씨 제공들은 각자 이와같은 힘을 더 한층 더하여 힘쓸지어다.   신씨는 해동조선 즉 한국의 대족(大族)으로 고려 명신(名臣) 개국공신(開國功臣) 장절공의 후손이다. 본조 이씨조선에 인재선생 현손 화암처사 휘 륜이 유독 사천 위에 자리잡아 살았고 그의 아들 휘 백철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라는 녹훈(錄勳)을 제수(除授)받고 오늘날 신씨가 아름답게 번창하고 문호를 서로 지키고 유지하게 된 것은 다 선무공의 구세 십세의 어진 후손이다.   유조(柔兆) 섭제격(攝提格) 황화절(黃花節)   공암(孔巖) 허 찬(許 巑) 찬(撰)

<온정리 온정>

◈ 誠慕齋 (성모재) : 평산신씨 평산신씨 치재소이다.

<온정리 온정>

◈ 竹林齋(죽림재) : 평산신씨 평산신씨 치재소이다.

<온정리 온정>

◈ 敬慕齋(경모재) : 평산신씨 평산신씨 치재소이다.

<온정리 온정>

◈ 溫誠齋(온성재) : 군위방씨

• 溫誠齋建立實記(온성재건립실기) 泗川은 自古로 多有名勝古跡之地라 市治西南 約三踵之許에 有船津浦는 壬亂時에 倭敵海戰跡也라 사천은 자고로 다유명승고적지지라 시치서남 약삼종지허에 유선진포는 임란시에 왜적해전역야라 其下 臥龍名山이 東秀如屛하고 三浦活海가 晋城連天이라. 中有一區 地闢하여 五穀百果가 展于 기하 와룡명산이 동수여병하고 삼포활해가 진성연천이라. 중유일구 지벽하여 오곡백과가 전우 沃野하며 天種魚鰕가 絶味鮮風하니 此溫井里者는 無比奧陽樂地라 維公의 姓은 方氏요 軍威는 貫也라 옥야하며 천종어하가 절미선풍하니 차온정리자는 무비오양락지 라 유공의 성은 방씨요 군위는 관야라 諱는 繼岦이요 贈通政大夫라 配는 淑夫人全州李氏요 墓는 溫井里 案山 癸坐에 公墓合祔라. 휘는 계립이요 증통정대부라 배는 숙부인전주이씨요 묘는 온정리 안산 계좌에 공묘합부라. 公은 自幼로 事親至孝하며 耕讀自案하고 訓敎子弟로 爲單一生하니 鄕人이 稱頌其賢하다. 自陜川으로 공은 자유로 사친지효하며 경독자안하고 훈교지제로 위단일생하니 향인이 칭송기현하다. 자협천으로 移居于此而子孫이 仍居爲하야 雖無繁衍이나 以勤儉淸素로 敦睦力行과 生業潤으로 守堅門戶하니 이거우차이자손이 잉거위하야 수무번연이나 이근검청소로 돈목역행과 생업윤으로 수견문호하니 皆公의 厚德餘蔭이라 自公以下 累代墓域이 或近或遠하여 歲時奉享과 春秋省事之會에 常恨無 개공의 후덕여음이라 자공이하 누대묘역이 혹근혹원하여 세시봉향과 춘추성사지회에 상한무 寓慕之所러니 一九九七年春에 諸孫等의 發議로 合謨協力하여 構一舍于洞麓하니 其規模가 三架四 우모지소러니 일구구칠년춘에 제손등의 발의로 합모협력하여 구일사우동록하니 기규모가 삼가사 楹으로 不侈雅淡하고 淸潔溫凉이라 役畢而世孫인 然楨 道楨이 訪余請扁額과 記文하니 余不固辭故로 영으로 불치아담하고 청결온량이라 역필이세손인 연정 도정이 방여청편액과 기문하니 여불고사고로 扁額曰 溫誠者는 引其洞名과 後孫의 誠意者也라 今世政勢變遷으로 未及先靈誠虔者不知其數거늘 편액왈 온성자는 인기동명과 후손의 성의자야라 금세정세변천으로 미급선영성건자부지기수거늘 此方氏非其非凡之誠이면 能然者乎아 壯哉라 登此齋者는 必修其身하고 追慕先祖遺謨하며 常講 차방씨비기비범지성이면 능연자호아 장재라 등차재자는 필수기신하고 추모선조유모하며 상강 天倫花樹之誼하면 在天之靈이 必垂慶福於諸孫無窮矣리라. 諸方氏는 勉哉어다. 천륜화수지의하면 재천지영이 필수경복어제손무궁의리라. 제방씨는 면재어다. 一九九八年 十月 日 일구구팔년 십월 일 慶州 金 慶 圭 撰幷書 경주 김 경 규 찬병서

<온정리 용정>

◈ 龍岡齋(용강재) : 경주이씨

• 龍岡齋記(용강재기) 泗水之南有一村落古可云龍頭洞者也 衆溄顧祖而 拱立諸澗有源而不捨秀麗之氣獨華于此直十全之地也 사수지남유일촌락고하운용두동자야 중봉고조이 공립제간자원이불사수려지기독화우차직십전지지야 往歲首春欲營齋舍於此而合族告論則詢謨僉同玆豈非大幸歟經始之際遠近諸族殫心竭力負者負荷者荷不 왕세수춘욕영재사어차이합족고론즉순모첨동자기비대행여경시지제원근자족탄심갈력부자부하자하불 匝月而工告斷乎此盖追感先人未遑之意而不日成之者也嗚乎山雖비遠而返顧其祖水雖長而必有其遠而況 잡월이공고단호차개추감선인미황지의이불일성지자야오호산수비원이반고 조수수장이필유기원이황 人之於祖先哉凡爲吾族者不計派分之近源顧念祖先於是愛育之恩則爲其子孫者豈無敦睦之誼哉尊祖敬宗 인지어조선재범위오족자불계파분지근원고념조선어시애육지은즉위기자손자기무돈목지의재존조경종 之道不外乎此而烝嘗之曰合族于此則是亦古人同居之遺範也昔蘇明允有言曰觀吾譜者孝悌之心油然而生 지도불외호차이증상지왈합족우차즉시역고인동거지유범야석소명윤유언왈관오보자효제지심유연이생 譜不過序氏族而猶有生孝悌之心而况擧族齋會於一室奉其烝嘗則其爲追感者當如何哉從玆以往긍爲敎導 보불과서씨족이유유생효제지심이황거족재회어일실봉기증상즉기위추감자당여하재종자이왕긍위교도 幾十萬年繼繼承承而진修厥德無忝厥祖望于諸族也 기십만년계계승승이진수궐덕무첨궐조망우제족야 檀紀四二八五年 玄의 執徐榴夏裔孫鐘玟 謹識 단기사이팔오년 현의 집서류하예손종민 근식

  • 용강재기해설   수양 사수 남쪽 촌락이 있는데 말하기를 용두동(용머리)라 하니라. 여러 봉우라를 비로소 돌아보니 서로 떠받들고 서서 여러 골짜기의 물이 근원이 되어 그 아름다움을 버리지 아니하고 홀로 빛나고 아름다움이 열가지 온전한 땅이로다.   지난해 봄에 재사를 짓고자 족인(族人)들이 모여서 고론한즉 다같이 다행한 일이 아니냐하고 일을 시작할 즈음에 원근의 여러 족인들이 서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이고 지고하여 달이 돌아오기도 전에 공사를 마치니 이는 다 조선(祖先)에 대한 추모(追慕)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뜻이 시작한 날부터 오래 가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다.   오호라 산이 비록 멀지 않으나 그 물 근원을 돌이켜 보건대 물이 비록 길다해도 그 근원은 하물며 사람의 선조(先祖)에 비할손가. 무릇 나의 종족(宗族)들은 불계(不計)의 파분과 근원을 생각하지도 않고 이 또한 애육의 은혜인데 그 어찌 돈목(敦睦)의 의(誼)가 없겠는가. 조상을 존중하고 겨레를 공경하는 도리는 제외하고 춘추사시 제사 모시고 일가 집안끼리 합족하는 것은 옛 우리 조상들이 모여 살던 선령들의 후손에게 남겨준 유범(遺範)이니라.   옛날 고대 중국에 소명윤이 말하기를 우리 소씨 족보를 볼 것 같으면 효제지심(孝悌之心 : 부모를 섬겨 효도를 다하는 마음)이 유연하게 퍼져 생기고 서문(序文)은 기히 기록치 아니하더라도 씨족(氏族)이 같이 생겨남에 있어 효제지심하고 하물며 거족적(擧族的)재실에 모여 회의도하고 제사도 뫼시고 조상(祖上)을 추감당함이 어찌 같지 않으랴.   이에 따라 서로 다같이 가르치고 이끌어 몇 십만년 자손 대대로 이어가 오직 스스로 닦고 수양하여 덕을 궐(厥)하고 조상을 궐하지말고 제족들은 욕됨이 없기를 바라노라.   단기4285년 임진(壬辰) 5월 후손 종민 근식

<통양리 통양>

◈ 膽慕齋(담모재) : 밀성박씨 밀성박씨 치재소이다.

<석계리 석계>

  ◈ 登龍齋(등용재) : 은진송씨      • 登龍齋記(등용재기)      泗川治南(사천지남) 二十里(이십리) 峰臺山下(봉대산하)에 石溪村(석계촌) 있으니 恩津宋氏(은진송씨)의 世居地(세거지)라 宋氏(송씨)는 高麗判院事(고려판원사) 諱(휘) 大原(대원)을 始祖(시조)로 하여 十三世(십삼세) 諱(휘) 國澤(국택) 四友堂(사우당) 孝貞公(효정공)의 孫(손) 諱(휘) 良弼(양필) 武科(무과) 別將公(별잔공)이 現(현) 大田(대전) 大淸湖(대청호) 水沒地區(수몰지구) 懹德(양덕)에서 泗川(사천) 龍見面)용현면)에 移居(이거)하여 田園(전원)을 開拓(개척)하고 터전을 잡은지 三百餘年(삼백여년)에 屹然(홀연)한 齋舍(재사)는 宋氏(송씨) 子孫(자손)들이 入鄕(입향)한 先祖以下(선조이하) 累代(누대)의 追慕(추모)와 奉享之場(봉향지장)이 없어 恨歎(한탄)하고 遺風(유풍)과 餘德(여덕)이 永久(영구)히 泯感(민감)될까 念慮(염려)하여 該子孫(해자손)이 宗論合議(종론합의)하고 敷地(부지)와 材木(재목)을 마련하여 入鄕祖(입향조) 別將公(별장공) 墳塋下(분영하)에 創建(창건)하니 齋號(재호)를 登龍齋(등용재)라 하였다. 其規模(기규모)가 緻密(치밀)하고 階砌(계체)는 方正(정벙)하여 堂室(당실)은 따스하니 後孫(후손)들이 齋戒(재계)하고 先祖(선조)의 崇慕(숭모)와 歲祭奉享(세제봉향)과 宗員間(종원간)에 族誼(족의)를 講論(강론)하면 祖上(조상)의 英靈(영령)이 기쁘게 降臨(강림)할것이어니 어찌 偉大(위대)하다 않겠는가. 또한 오늘날의 祖上(조상) 받드는 精誠(정성)을 永遠繼承(영원계승)하면 저 臥龍山(와룡산)과 함께 萬世(만세)에 길이 이어갈 것이다. 從前(종전)에 寤寐不忘(오매불망)하던 誠力(성력)을 늦추면 齋室(재실)을 짓지 않음만 못하니 더욱 銘心(명심)할 것이며 炎天(염천) 어느날 交友四範(교우사범)이 나의 書室(서실)을 찾아 齋記(재기)를 請(청)함에 祖上(조상) 崇慕(숭모) 한얼 賀禮(하례)하고 意思(의사)에 依準(의준)하여 先奉(선봉)의 孝誠(효성)에 感動(감동)하고 記文(기문)을 씀이라.   光復後 丙子 中秋 金海 許 轐 道 謹撰書   광복후 병자 중추 김해 허 복 도 근찬서

<구월리 구월>

◈ 隱月齋(은월재) : 합천이씨 합천이씨목사공파(陜川李氏牧使公派) 치재소이다. 1978년 무오(戊午) 10월 16일에 건축되었다.

<송지리 신송>

◈ 五鷄齋(오계재) : 진주강씨 진양강씨 치제소이다.

<송지리 신송>

  ◈ 永慕齋(영모재) : 평산신씨   • 永慕齋 創建記(영모재 창건기)      一世(일세) 申崇謙(신숭겸), 十九世(십구세) 申襘(신괴) 入泗川(입사천), 二十世(이십세), 二十一世(이십일세), 二十二世(이십이세), 二十三世(이십삼세), 二十四世(이십사세), 溫井(온정) 尼陽齋(니양재) 二十五世(이십오세) 永慕齋(영모재) 有(유)함. 尼丘山下(니구산하) 泗水之南(사수지남) 十里許(십리허)에 有松旨(유송지) 琴聞村(금문촌)하니 是域(시역)은 平山申氏(평산신씨) 尊居(존거)가 厥惟久矣(궐유구의)라 西紀(서기) 一九四七年 丁亥春(정해춘)에 龍見面長(용현면장) 楗(건)이 與昆季宗族(여곤계종족)으로 熟議曰(숙의왈) 昔曾子(석증자) 敎訓(교훈)에 祭之以禮(제이이예)는 可以孝矣(가이효의)라하셨거늘 吾等(오등)은 時享祭室(시향제실)을 創建(창건)하기를 結議(결의)하여 同年(동년) 八月에 竣工(준공)하고 齋號曰(재호왈) 永慕齋(영모재)라. 五代祖(오대조) 致坤(치곤)을 奉安(봉안)하시고 每年(매년) 十月 時享祭禮(시향제례)를 行于(행우) 三十餘年(삼십여년) 則可以神人(즉가이신인)이 以和(이화)하여 將錫祚于無窮矣(장석조우무궁의)라 西紀(서기) 一九七九年己未春(기미춘)에 宗均(종균), 載熙(재희), 昌熙(창희), 斗熙(두희), 學熙(학희), 連熙(연희), 福均(복균) 相議曰(상의왈) 維坤(유곤), 道坤(도곤)은 兄弟之血肉故(형제지혈육고)로 同齋連享致禮爲可也(동재연향치예위가야)라하니 多數(다수) 宗族(종족)이 無違結議贊同(무위결의찬동)이어늘 以此而如右略記(이차이여우약기)함      西紀一九七九年 己未 二月      後孫 斗 熙 撰   후손 두 희 찬   昌寧 曺 秉 坤 書   창녕 조 병 곤 서

<송지리>

  ◈ 茅田齋(모전재) : 咸安趙氏   함안조씨 절도공후부윤공파의 치재소이다.   • 茅田齋記(모전재기) 曾子曰 愼終追遠이라 民德이 歸厚矣라하시니 夫追遠之道가 不在他而其誠이니 致其誠意則庶見其如 증자왈 신종추원이라 민덕이 귀후의라하시니 부추원지도가 부재지이기성이니 치기성의칙서견기여    在之靈而非齋舍則無致誠之所也라 故로 肯堂而肯構也라 金龜之西五鷄之南에 有一名基하니 前左諸 재지영이비재사칙무치성지소야라 고로 긍당이긍구야라 금구지서오계지남에 유일명기하니 전좌제    山이 嵬峨穹崇하니 若仁人君子拱而立하고 遠近諸澗이 湊合抱回하야 不見其澨漏而貯明光照吉星하야 산이 외아궁숭하나 약인인군자공이립하고 원근제간이 주합포회하야 불견기수루이저명광조길성하야    自成一局하고 沙堤蒼壁이 隱然如屛하고 復以紅黃土色으로 粧點於長林豊草之間하니 眞佳絶界也니 자성일국하고 사제창벽이 은연여병하고 복이홍황토색으로 장점여장림풍초지간하니 진가절계야니    天藏地秘하야 不輕以示人而趙氏先墓가 適當其中하야 天厚眷顧而人 多歆羨 子也라 古有村落이러니 천장지비하야 불경이시인이조씨선묘가 적당기중하야 천후권고이인 다흠선 자야라 고유촌락이러니    自趙氏墓局之後로 洞遷於他하니 卽今之三松者也라 是歲首春에 遠近雲仍이 以報本追遠之誠으로 자조씨묘국지후로 동천여타하니 즉금지삼송자야라 시세수춘에 원근운잉이 이보본추원지성으로    營建齋室于階下하니 地形이 平坦하야 不借丁夫之畚鍤이요 而勢符合하니 豈用堪輿之經下이러요 영건재실우계하하니 지형이 평탄하야 불차정부지분삽이요 이세부합하니 기용감여지경하이러요    此所謂天藏地秘者也요 萬斧齋作하고 群能이 盡巧하야 不匝月而工告斷手하고 錫名以茅田하니 非但 차소위천장지비자야요 만부재작하고 군능이 진교하야 불잡월이공고단수하고 석명이모전하니 비단    仍舊傳襲而其寓意深矣라 夫茅之僞物이 甚微而其用이 最賢하니 一則縮酒而供祭者也라 一則用沙而 잉구전습이기우의심의라 부모지위물이 심미이기용이 최현하니 일칙축주이공제자야라 일칙용사이    稞將者也요 一則索鋾而升屋者矣니 夫斯齋也를 覆之以瓦以猶以茅稱之는 全取其縮酒稞將之意也라 과장자야요 일칙색도이승옥자의니 부사재야를 복지이와이유이모칭지는 전취기축주과장지의야라    世局이 奇變하야 不知享先之僞何等事而後孫之誠意如一하니 可以僞世之模楷而觀感而興起者가 想赤 세국이 기변하야 불여향선지위하등사이후손지성의여일하니 가이위세지모해이관감이흥기자가 상적    不鮮矣러니 慕仰之心이 油然而生하나니 其僞 世敎警頹俗者宜何如也哉아 是僞之記焉이라. 불선의러니 모앙지심이 유연이생하나니 기위 세교경퇴속자의하여야재아 시위지기언이라.    後孫 相黙, 性一, 性洪, 性權, 性壯, 炯奎, 得奎, 之功이 赤不小也리라 후손 상묵, 성일, 성홍, 성권, 성장, 형규, 득규, 지공이 적불소야리라

  • 모전재기문해설   증자가 말씀하시기를 끝냄을 신중히 하고 조상의 덕을 추모하라. 그러면 사람들의 덕이 후하게 돌아오리라 하시니 조상의 덕을 추모하는 도가 다른데에 있지 않고 그 정성에 있나니 성의를 다하면 살아 계시는 것과 같은 영혼을 볼 것이로되 재사(齋舍)가 아니면 치성을 드릴 곳이 없는지라 그래서 이 집을 짓는 것이다.   금구의 서쪽에 있는 오계산 남쪽에 이름난 좋은 땅이 한 곳 있으니 앞과 왼쪽의 모든 산이 높고 높아 하늘과 같으니 어질고 사람다운 군자가 공수(拱手;공경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개어 잡음)하고 선 것과 같고 멀고 가까운 여러 산골짜기의 물이 서로 합하여져 모이는 것이 안고 돌아서 그 흐름이 보이지 아니하며 밝은 빛이 쌓이고 길성(吉星)이 비추어져 스스로 한 국(局;풍수지리에 혈(穴)과 사(砂)가 합하여 이룬 지대)을 이루고 모래 언덕과 푸른벽이 그윽하고 은근하여 병풍을 친 것과 같고 다시 붉고 누른 흙이 덮히어 길고 큰 숲과 풍성한 풀밭으로 사이를 단장하니 참으로 아름답고 빼어난 곳인지라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둔 곳으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곳으로 함안조씨의 선대묘소가 마침 그 가운데 알맞게 자리하고 있어 하늘이 두터히 돌보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느니라 옛날에 사람이 살던 촌락이였으나 함안조씨의 묘가 마련된 후로는 동네가 다른 곳으로 옮기니 지금의 신송, 평송, 장송의 삼송이라 이 해 첫 봄에 원근의 운잉(雲仍 ; 운손(雲孫)과 잉손(仍孫)이라는 뜻으로 대수(代數)가 먼 자손을 이르는 말)이 조상에 보답코자 추원(追遠 ; 조상의 덕을 추모함)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층계를 아래 두고 재실을 세우니 지형이 평탄하여 일꾼들의 가래를 빌리지 아니하고 집안의 단합된 힘이 서로 조금도 틀림이 없이 꼭 들어맞으니 어찌 감여(堪輿 ; 하늘과 땅)를 써서 경서를 하찮케 할 것인가   이 곳은 천장지비(天藏地秘 ;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 둠)한 곳이요, 여러개의 도끼로 재실 짓는 일을 하고 능력있는 목수 무리가 기교를 다하여 한달을 넘기지 않고 일을 다하여 손 뗀 것을 고하고 그 이름을 모전(茅田)이라고 지으니 다만 전하여 내려오는 옛것을 그대로 답습함이 아니요 그 이름을 붙힌 것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라.   대체로 모(茅)라는 물건이 매우 작으나 그 쓰임이 매우 요긴한 것이니 하나는 축주로 제사를 공양하는 것이요, 하나는 모래와 함께 써서 술을 부어 강신하는 것이요, 하나는 새끼를 꼬아서 집을 이는 것이니 이 재사를 기와로써 덮고도 오히려 모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온전히 이를 축주(縮酒; 제사때 세 번째로 올리는 잔의 술을 모사(茅沙)에 조금 따르는 일 또는 그 술)하고 과장(稞將; 앞으로 강신을 계속 하는 일 → 여기서의 축주나 과장이라는 말은 조상의 향사를 뜻하는 말임)하는 의미를 취함이라 세상 판국이 기이하게 변하여 선조에 대한 향사가 무슨 일인지를 모르는 이가 많지만 후손의 성의가 하나 같으니 가히 세상에 모범이 될 것이요 보고 느끼어 흥기(興起; 세력이 왕성하여 지는 것)할 자가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어 진다. 조상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 형세가 왕성히 나타나니 그 세상의 가르침을 도우고 퇴속(頹俗; 문란해진 풍속, 퇴풍)을 경계함이 마땅히 어떠하리요 이에 기문으로 붙이노라   후손 상묵, 성일, 성홍, 성권, 성장, 형규, 득규의 공이 적지 않느니라.

  • 茅田齋 上樑文( 모전재 상량문)    述夫 墓而起閣은 所以萃祖考之精神이요 祭則致齊는 于以觀子孫之誠力이라 肆肯堂而肯構하니 怳如 술부 묘이기각은 소이췌조고지정신이요 제즉치제는 우이관자손지성력이라 사긍당이긍구하니 황여 見而如聞이라 恭惟處士公曁左尹公은 實是吾趙門之中興祖라 英姿赫赫하고 世德彰彰이라 貞節公之後裔요 견이여문이라 공유처사공기좌윤공은 실시오조문지중흥조라 영자혁혁하고 세덕창창이라 정절공지후예요    節度公之賢胤으로 祖孫相依하고 臥龍山之巨麓이요 艅航山之正脉으로 遠近俱通이라 西山之宅에 절도공지현란으로 조손상의하고 와룡산지거록이요 여항산지정맥 으로 원근구통이라 서산지택에    共聞百世淸風이요 北溪之庭에 永見三樹休蔭이라 懷瑜握瑾하야 縱未售於當時나 積義累仁하야 공문백세청풍이요 북계지정에 영견삼수휴음이라 회유악근하야 종미수어당시나 적의누인하야    永有裕於來裔라 今幷享于宗閣하니 由世代之始分이요 將修建于茅田하니 取墓道之密邇라 曷敢緩其 영유유어래예라 금병향우종각하니 유세대지시분이요 장수건우모전하니 취묘도지밀이라 갈감완기    新建乎아 闔族이 同議並力이요 將有增於舊制矣일새 匠氏가 殫巧獻圖라 依山傍野하니 己占形勝之地요 신건호아 합족이 동의병력이요 장유증어구제의일새 장씨가 탄교헌도라 의산방야하니 기점형승지지요    去茅覆瓦하니 亶取永久之謀라 優爾大祝奉禮之廳이 寔我思誠追遠之所라 修樑玆擧에 善頌式陳이라 거모복와하니 단취영구지모라 우이대축봉례지청이 식아사성추원지소라 수량자거에 선송식진이라    兒郞偉抛樑東하니 臥龍山色이 古今同이라 吾祖當年如在室하니 衆人咸仰伯夷風이라 兒郞偉抛樑西하니 아랑위포랑동하니 와룡산색이 고금동이라 오조당년여재실하니 중인함앙백이풍 이라 아랑위포량서하니    茫茫碧海百帆低라 一家基業이 能如此하니 上有鰲岑下有溪라 兒郞偉抛樑南하니 川流曲曲 망망벽해백범저라 일가기업이 능여차하니 상유오잠하유계라 아랑위포량남하니 천류곡곡    作淸潭이라 欲識箇中奇絶景인데 源頭活水碧如藍이라 兒郞偉抛樑北하니 尼山秀色이 靑無極이라 작청담이라 욕식개중기절경인데 원두활수벽여람이라 아랑위포량북하니 니산수색이 청무극이라    五鷄六狗如鳴吠하니 山勢相從原不息이라 兒郞偉抛樑上하니 羲和迎送日來往이라 松柏蒼蒼圍墓道하니 오계육구여명폐하니 산세상종원불식이라 아랑위포량상하니 희화영송일래왕이라 송백창창위묘도하니    夜回明月暎欄傍이라 兒郞偉抛樑下하니 香蔬式穀이 滿于野라 合族同心時供祭하니 子孫誠力其天也라 야회명월영란방이라 아랑위포량하하니 향소식곡이 만우야라 합족동심시공제하니 자손성력기천야라    伏願上樑之後에 門欄이 益光하고 子孫孔碩이라 美哉山樂哉邱에 先祖考軆魄所妥요 侖焉堂奐焉室에 복원상량지후에 문란이 익광하고 자손공석이라 미재산락재구에 선조고체백소타요 륜언당환언실에    諸子孫思廬所齊라. 제자손사려소제    歲在 中元 戊子 春三月 念從日 甲申 巳時 세재 중원 무자 춘삼월 염종일 갑신 사씨 處士公 十二代孫 性香 謹頌 처사공 십이대손 성향 근송            • 모전재상량문 해설      기록하노니. 묘소에 집을 짓는 것은 돌아가신 조상들을 추모하는 정신을 모으는 바요, 제사에 재개를 이루는 것은 자손의 성력(誠力)을 보는 것이라. 이에 집을 지으니 확연히 보고 듣는 것 같도다. 공손하게 생각을 해보면 처사공과 좌윤공은 실로 우리 조씨가문의 중흥조라. 영자(英姿)가 혁혁하고 세덕(世德)이 창창하다. 정절공의 후예요 절도공의 후손으로 일가 친척이 서로 의지하며, 와룡산의 기슭이요 여항산의 정맥으로 원근이 곧게 통하는 곳이다. 서산서원에서는 정절공 어계 할아버지의 백세청풍 기개를 들을 수 있고 삼수정에서는 북계 수천 할아버지가 손수 심은 세그루의 나무그늘을 바라본다.   구슬을 품고 구슬을 져서 비록 당시에 발배이지 모르나 의를 쌓고 인을 쌓아 길이 후예에게 여유가 있다. 이제 아울러 종각에 행사하니 세대에 비로소 나늘림에 말미암고 장차 모전에 집을 세우니 모도의 가직함을 취함이라. 어찌 감히 신끈을 늦추리라 합족이 의논을 같이하고 힘을 합치고 장차 구제에 더함이 있을새 장씨가 교를 다하여 도를 드린다. 산을 의지하고 결을 결하니 이미 형승에 따름을 점쳤고 떼를 바르고 기와를 덮으니 단지 영구할 꾀를 취함이라 넉넉한 대축 봉례하는 청사가 진실로 우리 정성하고 추원하는 곳이라 신들보를 이에 들매 좋은 송을 써베푼다. 아랑위 포랑을 동으로 하니 와룡산빛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도다.   우리 조고 당년에 집에 계심같으니 중이다 백이바람을 흠앙한다. 아랑이 포량을 서에하니 망망한 벽해에 백짐대가 나직하다. 한집의 기업이 능히 이 같으니 우에 오잠이 있고 아래에 시내가 있다. 아랑위 포량을 남에하니 내가 흘러 구비구비 맑은 못을 지었다. 그 가운데 기절한 경계를 알고져 할진대 원두에 산물이 푸르러 쪽같다. 아랑위 포량을 북에 하니 니산에 빼어난 빛이 푸르러 다함이 없다. 다섯 닭과 여섯 개가 울고 짖는 것 같으니 산세가 서로조차 쉬지 아니한다. 아랑위 포량을 위에하니 휘화가 맞고 보내여 날이 오고 간다. 송백이 창창하야 묘도에 둘렀으니 밤마다 명월이 난간곁에 비친다. 아랑위 포랑을 아래하니 향기나 물과 좋은 곡식이 들에 차도다. 합족이 동심하야 때로 제사를 바치니 자손의 성력이 천성이로다. 업드려 원컨대 상량한 뒤에 문란이 더욱 빛나고 자손이 심히 성할지라. 아름다운 산과 좋은 언덕에 선조고의 체백이 편하신 바요 좋은 땅과 좋은 집에 여러자손의 사례가 간조롬하는 바이다. 세재 중원갑 무자춘 삼월 염후일 갑신 사시 처사공 십이대손 성향 근송

  • 茅田齋序(모전재서)    泗之南一舍地에 儼然有一巨岳이 雄鎭乎固泗之兩界曰臥龍山이니 山北에 有金龜上天形하고 下有靈龜沒泥局하니 사지남일사지에 엄연유일거악이 웅진호고사지양계왈와룡산이니 산북에 유금구상천형하고 하유영귀몰니국하니 迺我先祖處士公及其孫左尹府君衣履之藏也而築齋舍하고 因地名而爲顔하니 卽茅田齋也라 내아선조처사공급기손좌윤부윤의리지장야이축재사하고 인지명이위안하니 즉모전재야라    學生公이 以端廟生育六漁溪先生之曾孫이요 中廟朝靖國勳臣節度公之子로 避壬辰亂入泗川하야 학생공이 이단묘생육육어계선생지증손이요 중묘조정국훈신절도공지자로 피임진란입사천하야    隱居于介峙山窟嶝之下러니 厥後子姓이 蕃衍하야 雖無達官聞人이나 文翰이 尙不絶하야 相守箕裘之業하니 은거우개치산굴등지하러니 궐후자성이 번연하야 수무달관문인이 나 문한이 상불절하야 상수기구지업하니    此亦祖先之遺澤餘蔭이라 斯齋之經營이 未遑於先人之世하니 子孫之茹恨이 久矣러니 今年春에 차역조선지유택여음이라 사재지경영이 미황여선인지세하니 자손지여한이 구의러니 금년춘에    一門이 齊會爛議하야 始構茅舍하니 終始監役者는 後孫且植性洪也라 登斯齋也하야 仰西山之淸 인문이 제회란의하야 시구모사하니 종시감역자는 후손차식성홍야라 등사재야하야 앙서서지청    風하고 望北溪之三樹하면 此皆先蔭之久而不泯者也니 凡我宗族布濩東西者가 各盡孝悌之道하야 蘋藻之供에 풍하고 망북계지삼수하면 차개선음지구이불민자야니 범아종족포호동서자가 각진효제지도하야 번조지공에    特盡如在之誠하고 花樹之樂에 永叙式好之誼하야 以無忝所生으로 爲意則豈非吾宗紹先裕後之道乎아 특진여재지성하고 화수지락에 영서식호지의하야 이무첨소생으로 위의즉기비오종소선유후지도호아    余忘其孤陋하고 畧叙顚末하야 謹序于楣爾라 여망기고루하고 략서전말하야 근서우미이라    後孫 性 香 후손 성 향         • 모전재서 해설      사수 남쪽 삼십리 지점에 한 큰산이 있어 고성과 사천 사이에 웅진하니 가로되 와룡산이니 산 북편에 금귀상천형이 있고 아래는 영귀몰니국이 있으니 이에 우리 선조 처사공과 그 손자 좌윤부군의 리의를 감춘 곳으로 재사를 짓고 지명으로 인하여 편액을 하니 즉 모전재라. 학생공이 단묘생육신인 어계선생의 증손이요 중묘조 정국훈신 절도공의 아들로써 임진란을 피하여 사천에 들어와서 개재산 굴등 아래 은거하더니 그후 자성이 번연하여 비록 달관과 문인은 없으나 문한이 오히려 끝어지지 아니하여 서로 기구지엽을 지키니 이 또한 조선의 기친 은택과 남은 음덕이라. 이 재사 경영이 선인의 대에 미치지 못하니 자손의 한 됨이 오래더니 금년 봄에 일문이 모여 란만이 의논하여 비로소 모사를 얽으니 종시로 역사를 감독한 자는 후손 차식과 성향이라. 이 재사에 올라 서산서원의 어계 할아버지의 백세청풍 숭고한 정신을 우러러 기리고 북계 할아버지가 심은 삼수정의 세그루 나무를 우러러 보는 것은 다 선음의 오래도록 없어지지 아니한 것이라. 무릇 우리 종족이 동서에 포만한 자가 각각 효제의 도를 다하야 빈조의 공양에 특별히 여재의 정성을 다하고 화수의 길김에 길이 식호의 의를 펴여서 난바를 더려이지 아니함으로써 뜻을 한즉 어찌 우리 종중에 선조를 잊고 후손을 넉넉케 하는 도가 아니랴 내가 그 고루함을 잊고 대략 전말을 펴서 삼가 들보에 부치노라      후손 성 향         (함안조씨 부윤. 숭의공파 세보 언행록에서 발췌한 내용임)

□ 제단(祭壇) ◈ 진양강씨(晋陽姜氏) 제단 금구마을 남쪽, 멧골 위쪽의 땅고개에 있다.

◈ 인동장씨남산공파(仁同張氏南山公派) 제단 금구마을 북쪽, 고동골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남산공파의 입사천조 기적비가 있으며 1998년에 설치되었다.

◈ 평산신씨제정공파(平山申氏齊靖公派) 제단 연호마을 서쪽, 구강으로 가는 농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 남평문씨 순질공파(南平文氏 純質公派) 제단 송지리 궁장산 하단에 위치하고 있다.

◈ 영일정씨문충공파(迎日鄭氏文忠公派) 제단 관동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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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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