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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10. 루정(樓亭)   우리 영남(嶺南)은 이른바 가야문화(伽倻文化)의 발상지로써 가히 문화(文化)의 고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왕릉고각(王陵古閣)과 무수한 루대정사(樓臺亭榭)며 노방(路傍)에 산재한 한편의 기와조각, 퇴폐한 성지(城址)의 일목일초(一木一草)에 이르기까지 선인(先人)들의 얼과 발자취가 담겨져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우리고장은 신라· 고려 때에는 불교문화(佛敎文化)가 번성(繁盛)하여 사찰(寺刹)이 많더니 조선조에 이르러 특히 영조(英祖), 정조대(正祖代)의 태평성세가 이루어지고 있던 때부터 여러 형태의 정자(亭子), 향각(亭閣) 및 산방(山房)과 누각(樓閣)이 곳곳에 세워져 지방의 선비들 뿐만 아니라 원근(遠近)의 현인(賢人)들이 이 곳에 모여 풍월(風月)도 하고 시회(詩會)로 한시(漢詩)를 짓거나 이기설(理氣設) 등을 담론(談論)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1).관해정지(觀海亭址)      현 선진공원의 남쪽 바닷가 언덕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다. 이 곳은 역사적으로 고려시대에 전국 12조창(漕倉) 중의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있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수륙(水陸) 양면의 격전지였다. 그리고 영조(英祖) 때에 이르러 진주조창(晉州漕倉)인 가산창(駕山倉) 이 생겼는데, 이 때 선진에는 조창 보호를 위하여 수군(水軍)의 진보(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운지(雲和) 육태림(陸台林)이 쓴 《남유록(南遊錄)》동성부(東城賦)에 의하면         \"가산창(駕山倉) 앞에 조선(漕船)이 있고, 직관(職官)은 비우당(備虞堂)에 있으되, 관해정(觀海亭) 밑 전선(戰船)에서 더러는 거처하도다. 관해정은 선진(船鎭)에 있으니 전선(戰船), 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등 각 1척씩을 두었다\"         고 하였다   가산창은 영조(英祖) 36년(1760)에 구해창(舊海倉)을 옮겨서 설치한 조창인데, 이로보아 선진(船鎭)의 관해정은 이 무렵에 창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관해정은, 구한말인 1889년 9월에 중수가 있었으며, 1908년에 이르러 오랜 비바람에 갈리고 씻겨서 도괴된 후 다시는 복원되지 못하고 다만《남유록(南遊錄)》을 쓴 육태림(陸台林)의 시(詩) 한 수(首)에 관해정의 정취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송림(松竹)속의 외로운 정자는 귤유(橘柚)의 정자인데   장천(長天)의 한결같은 빛은 거울처럼 푸르구나   남쪽에 오고간 역사속의 인물은 누구이던고   동쪽 하백(河伯)이 와서 걸음을 돌릴수 없었네   먼 섬의 자욱한 연기속에 오두막이 생생한데   늦바람 속 들리는 피리소리 고깃배를 뒤흔드네   소인(騷人)들 눈빛속에 물이되기 어렵구나.   높은 난간을 밀치고서 남극성을 바라볼 뿐이로다.      松竹孤亭橘柚亭 長天一色鏡中靑(송죽고정귤유정 장천일색경중청)   史遷南去遊伺壯 河伯東來步欲停(사천남거유사장 하백동래보욕정)   遠島浮인生蟹室 晩風飛笛廳漁舲(원도부인생잠실 만풍비죽청어령)   騷人眼孔難爲水 捫斗危欄望極星(소인안공난위수 문두위란망극성)      (註)   장천(長天) : 장부의 큰 뜻(시경;詩經)   사천(史遷) : 정(亭)의 위치가 역사적인 인물이 오고간 장소라는 뜻. 사천(泗川)의 동음어 (同音語)로도 됨.   하백(河伯) : 단군신화(檀君神話)에 나오는 용신(龍神). 처절한 싸움터의 뜻   해실(蟹室) : 게딱지 같은 오두막집. 서민의 집   소인(騷人) : 시인(詩人) 묵객(墨客)을 두고 이르는 말   난위수(難爲水): 바다가 조그만 물이 물같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 곧 대지(大志)가 작은 안중(眼中)에 없다는 뜻(맹자(孟子)의 관어해자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의 글귀로써 어쩌면 관해정의 정명(亭名)은 여기서 따왔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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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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