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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9. 사원(寺院) 및 사찰지(寺刹址)   조선조의 중종(中宗)은 33년(1538)에 영을 내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실려있지 않은 국내 도처의 절을 모두 헐어내라 하였다. 신축하는 일도 일체 엄금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불우(佛宇)와 고적조(古跡條)에는 1,712개소의 절이 등재되어 있다. 불우조에는 현존하는 절을 실었고, 고적조에는 터전을 남겼거나 역사상에 저명한 것들을 수록하였다. 대략 조선조 초기까지의 사항이 이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절들이 임진왜란(壬辰倭亂)에 큰 피해를 입었다. 사적기(寺蹟記) 등에서 그런 피해의 기록을 읽을 수 있고 현존하는 대부분의 큰 절들이 임진왜란 이후에 복구된 것들이다.   조선조 말엽의 기록들이 남아 있다. 고장마다의 읍지(邑誌)가 그것이다. 이들을 망라하여 한 책을 만들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방불하게 되겠는데 현존하는 읍지들에는 1,942개소 절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註 : 국사편찬위원회편의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실려 있는 읍지(邑誌)에 의한 통계임) 이 수는 임진왜란 이전의 1,712개소 보다 오히려 증가한 수임을 나타내고 있다.   사원 건축은 불교(佛敎)가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고구려 불교는 중국에서 전하여졌다고 하며, 중국엔 채음이 인도로부터 귀국하면서 불법이 번져 A.D. 67년에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스님이 함께 불경을 가지고 돌아왔고 150년경에는 안식국과 월지국의 승려들이 불경을 가져와 번역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인도에서는 123년에 간다라 미술이 꽃피기 시작하고 319년에는 불교 미술을 급성장시킬 굽타왕조가 시작되고, 중국에서는 인도의 석굴사원을 본떠 366년에 사문(沙門)· 악승(樂僧)이 돈황천불동의 초고굴(草高窟)을 파기 시작하였다. 327년에는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순도(順道) 스님을 고구려에 보내어 불상과 경문을 전하였고, 이어 아도(阿度)스님이 고구려에 왔다. 이 분들을 맞아 고구려는 375년에 성문사와 이불란사를 첫 개원하였다. 384년에 동진(東晉)의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백제에 와서 불법을 전하였다. 이듬해에 첫 사원이 한산(漢山)에 개창되었다. 392년에 고구려왕은 불법을 승신하여 구복(救福)하도록 하고 평양에 절 아홉 곳을 지었다. 452년에 북위에선 부도를 세우는 등 불교를 부흥시키는 일을 하였다. 458년에 흑호자(墨胡子)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로 갔다. 498년에 고구려 수도에 금강사가, 백제 수도엔 대통사가 개창된다. 이즈음 북위에서는 용문석굴· 맥적산석굴· 병영산석굴· 운강석굴 등이 이룩되고, 낙양(洛陽)의 영명사가 창건되었다.   신라는 528년에야 불교를 공인하였다. 곧 영흥· 홍륜사 등이 개창되고 황룡사(皇龍寺)가 이루어져 540년에 솔거(率居)가 벽에 노송(老松)을 그렸다.   불교가 전래되기 시작하여 신라가 삼국(三國)을 통일하기까지의 삼국에서는 이상과 같은 불교의 활동이 중국· 일본과 연계되면서 진행되어 왔다. 하나 주목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가락국(駕洛國) 초기에 허황후(許皇后)가 탑상(塔像)과 함께 들어왔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이다. 경남의 남해(南海), 서해안(西海岸)일대에서는 배를 타고 들어온 불교에 대한 전설(傳說) 등이 전하여 오고 있다. 사서(史書)에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해로(海路)를 타고 들어온 불교가 있었으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테면 김해(金海)를 중심(中心)으로 가락국(駕洛國)의 남방불교(南方佛敎) 전래설화(傳來說話)는 가락국의 불교가 비록 정사(正史)에는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김해(金海) 및 사천지방(泗川地方)의 전설로서는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예로서 가락국의 시조(始祖)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0왕자중(十王子中) 7왕자(七王子)가 그들의 외삼촌(外三寸) 보옥선인(寶玉仙人)을 따라 속세의 인연을 끓고 가야산(伽倻山)으로 입산(入山)하여 삼년간 수도하다가 의령의 수도산(修道山)과 사천(泗川)의 와룡산(臥龍山)· 귀룡산(歸龍山;이 때 구룡사(龜龍寺)를 창건 했다 함)을 거쳐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운상원(雲上院)을 세우고 좌선(坐禪)한지 2년 후에 가락국 시조 62년, 신라 파사왕(婆娑王) 24년 음 8월 15일에 오묘한 진여(眞如)를 함께 대오(大悟)해 모두 성불(成佛)했다고 전해진다. 대부분의 사원들은 통일신라(統一新羅)의 후기에 가서 선종(禪宗)이 들어온 뒤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선종은 기성불교의 사상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수양하고 진리를 깨닫는다는 새로운 불교이므로 선종은 사원의 터를 인적이 희소한 심산유곡에 잡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 사원의 유적은 대체로 깊은 산중에 한정된 감이 있다. 이러한 사원에는 다소간 그 당시의 문화재(文化財)를 전하고 있으나, 목조건물(木造建物)은 고려시대 이전의 것이 전무한 편인데 비하여 석조물(石造物)은 각 시대의 우수한 작품이 적지 아니하다.   끝으로 건축구조를 대표하는 홍포(栱包)의 유형에서 보면, 전기(前期)는 화두아형(花斗牙形)의 핵심포계(核心包系)가, 후기(後期)는 다포계(多包系)의 익공계(翼工系)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이다. 다포(多包)· 익공계(翼工系)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는 중요 건축물에 채택되는 빈도에 따라 다포계시대(多包系時代)와 익공계시대(翼工系時代)로 나눌 수 있다. 다포계시대(多包系時代)는 고려 충렬왕대로부터 임진란 이전까지이고, 익공계(翼工系)는 임진왜란 이후 대한제국까지 성행하였다.      1)정수암지(淨水菴址)      사천현여지승람(泗川縣輿地勝覽) 기묘수정책(숙종25년 1699간)에 정수암은 현 남쪽 25리 거리 와룡산에 있다(재현남25리와룡산 在縣南二十五里臥龍山)이라 하였으니 마월원이 25리, 금물섬이 25리로 같은 거리인 것을 미루어보아 지금의 용치리 아니면 세암골 정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비 이현백(李顯伯)의 시가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천천히 걸어서 정수암에 오르니   여기가 극락세계 구품일래라   산승은 웃으면서 반가이 맞이하고   가을 빛은 눈속에 완연하구나   步上菩提境 蓮花九品臺(보상보제경 연화구품대)   山僧迎笑語 秋色眼中來(산승영소어 추색안중래)   2) 그 외      문헌상으로는 위 정수암지(淨水菴址)만 나와 있으나 용니미(龍踰)의 적시골, 세암골 등에 많은 절터가 남아 있으므로 앞으로 조사 발굴하여야 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에 \"적선사(積善寺).흥보사(興寶寺);모두 와룡산에 있다.\" 그리고 사천현여지승람기묘수정책의 불우조에 \"적선사(積善寺) 석유금무(昔有今無)\" 즉,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한글학회가 만든 한국지명총람에 적성사가 용니미 적성골에 있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 적성사와 적선사가 같은 절로서 변음되어 적성사로 불려지지 않았나 의구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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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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