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용현향토사



용현향토사

4.봉수대지(烽燧臺址)   봉수(烽燧)라 함은 고대(古代) 통신(通信) 방법의 하나로 인편에 의한 방법 외에 높은 산에 올라가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하던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정식 法으로 제정하여 실시한 것은 고려시대 즉, 의종(毅宗)3년(1149)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曺晉若)의 제의에 의하여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하되 평상시에는 1개씩 올리고 2급(急)에는 2번, 3급(急)에는 3번, 4급에는 4개씩 올렸다. 조선조에 이르러 세종(世宗)때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마련하였는데, 고려 때 4급에 비해 1급이 더한 5거화(炬火)로 그 신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1 거화 ~ 평시에는 횃불 1개   ∴ 2 거화 ~ 적이 나타나면 2개   ∴ 3 거화 ~ 적이 국경을 넘어올 기미가 있으면 3개   ∴ 4 거화 ~ 적이 국경을 넘어오면 4개   ∴ 5 거화 ~ 적과 접전을 하면 5개를 올렸다.   횃불을 올리되, 만약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어서 연락을 할 수 없을 때 는 봉졸(烽卒)들이 다음 봉수지까지 차례로 달려서 전달되도록 했다. 서울에서는 5원(員)이 병조(兵曹)에게 보고하고 지방에서는 오장(伍將)에게 보고 했는데, 각 봉수대의 인원(人員)은 연해(沿海)와 변경지방은 군사(軍士) 10명, 오장(伍將) 2명, 기타 내륙지방에는 군사 6명, 오장 2명을 배치하고 이들은 봉화대 근처의 거주자(居住者)라야만 했다. 또한 봉수대에 배속되는 봉군(烽軍)은 다른 군역(軍役)에 종사할 수 없으며 오직 망보는 일에만 종사하게 했다.   봉화대는 표주(標住)를 세워 경계를 설정하고 거짓 봉화와 단순한 방화를 막론하고 그것이 경계선의 백보 이내에서 일어났을 때는 해당 진영에서 단속하게 했는데 이들은 대개 사형에 처해졌다 하며, 한편 봉화대 주위에서 는 무당이나 토속에 의한 잡신제사를 금했다고 한다.   봉수로(烽遂路)는 기점(起點)에서 간봉(間烽)과 주봉(主烽)으로 구분되는데 남해(南海)에서 초기(初起)되는 간봉(間烽)의 경로를 살펴보면 아래 도표와 같다.      間烽(九)初起(南海)→臺方山(이하晉州)→角山→鞍岾山(泗川)→望晉山(이하晉州)→笠巖山(丹城)→金城山(三嘉)→所峴山(陜川)→金貴山(이하居昌)→渠未屹山→龜山(知禮)→高城山(金山)→訥伊項(이하黃澗)→所伊山→朴達羅山(永同)→月伊山(이하沃川)→環山→鷄足山(懷德)→所伊山(文義)→巨叱大山(淸州)→所屹山(鎭川)→忠州 望夷城(直烽) 間烽(十一)      간봉(9) 초기(남해)→대방산(이하진주)→각산→안점산(사천)→망진산(이하 진주)→입암산(단성)→금성산(삼가)→소현산(합천)→금귀산(이하거창)→거미흘산→구산(지례)→고성산(금산)→눌이항(이하황간)→소이산→박달라산(영동)→월이산(이하옥천)→환산→계족산(양덕)→소이산(문의)→거칠대산(청주)→소흘산(진천)→충주망이성(직봉) 간봉(십일)         1. 南海猿山→錦山(間烽九)→本邑.本鎭 남해원산→금산(간봉구)→본읍.본진      2. 南海彌助港鎭 別烽臺→錦山(間烽九) →同上   남해미조항진 별봉대→금산(간봉구)→동상      3. 泗川三千堡 別望→同上   사천삼천보 별망→ 동상

  1)침지봉수(針枝烽燧)      신복리와 석계리의 경계인 된먼당(된설미)에 성지(城址)의 흔적이 있는데 이 성지가 고려 때부터 조선초까지에 있었던 침지(針枝)봉화의 성지가 아닌가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사천현조(泗川縣條)에   봉화가 2곳으로 성황당과 침지이다. 침지(針枝)는 현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진주 각산향의 주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본현 성황당에 응한다   로 되어 있으며,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사천현조(泗川縣條)에,   침지봉화(針枝烽火)는 읍(邑)에서 남으로 17리(약 9.18Km)거리에 있으며, 남으로는 진주임내(晉川任內)의 각산향(角山鄕) 주산(主山) 봉화를 26리 1백 11보(약 14.06Km)거리로 마주 보고, 북으로는 읍(邑)의 서낭당봉화를 13리 350보(약 7.5Km)거리로 마주 보고 있다고 하였다.   <針枝烽火在縣南十七里許南望晋州任內角山鄕主山烽火相去二十六里一百十一步北望縣城隍堂烽火相去十三里三百五十步>   <침지봉화재현남 17리 허남망진주임내각산향주산봉화상거26리111보북망현성황당봉화상거 13리 350보>      위 봉수는 서낭당 봉화와 함께 각산봉화(角山烽火)와 진주(晉州)의 망진산(望晉山) 봉화(烽火)를 잇는 중간 지점의 간봉(間烽)으로서, 고려 충렬왕(忠烈王) 28년(1302)경에 왜구(倭寇)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나《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등에는 기록이 보이다가 그 뒤의 문헌(文獻)에는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조선 세종대(世宗代)에서 예종대(睿宗代)간에 봉수로(烽燧路)의 개편과 더불어 폐지된 봉화로 추정된다.

  2) 안점산(鞍岾山) 봉수(烽燧)      신복리와 사남면(泗南面) 화전리(花田里)의 경계인 봉대산(烽臺山;봉수대지가 있다고 하여 ‘봉대산’으로 부르고 있으나 본래 산 이름은 ‘안점산’이므로 바르게 고쳐 불러야 할 것이다)에 있다. 와룡산에서 뻗어 내린 해발 310m의 끝 봉우리에 봉수터와 둘레 약 100m의 성지가 남아 있다.   이 봉수는《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처음 나타나는데 연대봉화조(烟臺烽火條)에 의하면, 읍(邑)에서 남(南)으로 15리(6Km)거리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같은 진주(晉州)의 망진산(望晉山) 봉화(烽火)와 마주 응답한다고 하였다.      在縣南十五里南應晉州角山烽火上准 北應同州望晉山烽火相准   재현남 15리 남응진주각산봉화상준 북응동주망진산봉화상준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26년;1531간)봉수조, 사천현여지승람기묘수정책(숙종25년 1699) 봉수조와 사천환여지승람(1935년 이후 발간 분 추측) 고적조에도 위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832년 간행 사천현읍지 봉수조에는    안점산봉대는 갑좌경향(서남서 방향으로 향함)으로 현으로부터 남쪽 15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진주 각산봉화을 받고 거리는 육로로 30리이며 북쪽으로는 진주의 망진봉화에 답하는데 육로로 40리이다. 별장 1인과 오장 1명, 그리고 군인 3명이 근무하고 있다.   (안점산봉대 갑좌경향재현남십오리 남응진주각산봉육로삼십리일식 북보동주망진봉육로사십리일식. 별장일인 오장일명 군인삼명)   (鞍岾山烽臺 甲坐庚向在縣南十五里 南應晋州角山烽陸路三十里一息 北報同州望陣烽陸路四十里一息. 別將一人 伍長一名 軍人三名)      또 《세종대왕년보(世宗大王年譜)》 동왕(同王) 4년(1422) 8월 19일(계모)조에는, 경상도수군도안무처치사(慶尙道水軍都安撫處置使)가 청하기를      “봉화 불을 올리는 장소에 보루와 장벽으로 의탁할 곳이 없어서, 이로 인하여 흔히 적의 겁탈을 당하게 됩니다. 비록 법령이 엄하나, 사람들이 모두 의심스럽고 두렵게 생각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정찰하러 하지 아니하니 청컨대 봉수하는 장소에 높게 연대(烟臺)를 쌓고 활 쏘는 집(弓家)과 화포(火砲)와 병기(兵器)를 설치하여 밤낮으로 그 위에서 적의 변동하는 것을 관망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여러 도(道)에 명하여 모두 연대(烟臺)를 쌓으라고 명하셨다”      고 하였으니 이 봉수는 침지(針枝) 및 서낭당 봉수의 후신으로 조선 세종 때 설치된 봉수임을 알 수 있다.   사천군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읍지(邑誌)》에는 봉수군 25명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3년 3월 사천문화원에서 7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성지 둘레 100m, 높이 1m, 폭 0.8m 및 봉수대 5기를 높이 1.5m, 둘레 3m로 고증을 거쳐 석축을 복원하였으며 용현조기회에서는 1995년 8월 15일부터 통일기원전국봉화제추진본부에서 주최하여 실시하는 통일염원 봉화 올리기 행사에 적극 동참하여 매년 광복절을 맞아 안점산 봉화제를 지내고 있으며 우리면내의 문화유적 보존에 힘쓰고 있다.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