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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2.고분유적(古墳遺蹟)   우리지역은 사천만이 면하여 넓고 비옥한 평야를 끼고 신석기시대부터 해안지대와 강변에 많은 선사인(先史人)들이 정착해 왔음을 조개무지(패총;貝塚), 고인돌(지석묘;支石墓), 돌깐무덤(부석묘;敷石墓),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 독무덤(옹관묘;甕棺墓)등의 유적 분포를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입증(立證)할 수 있거니와 아직 우리고장은 고고학적(考古學的) 조사발굴의 처녀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만큼 앞으로 이 방면의 많은 학문적(學問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다.   사천(泗川)이 가야제국(加倻諸國)의 영역으로 보느냐 않느냐에 대해선 이론(異論)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사천(泗川), 고성지방(固城地方)은 역사적으로 소가야(小伽倻)의 한 세력권으로 보는 견해(見解)가 짙다. 그러나 가야사와는 달리<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사천(泗川), 고성(固城) 및 창원지방(昌原地方)이 상당 기간동안 가야 연맹체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인 소국(小國) 즉, 포상팔국(浦上八國)이란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다가 뒤에 신라에 병합된 사실(史實)을 간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의 역사가 그대로 전하지 않는 오늘에 있어서는 이 시대의 고분유적(古墳遺蹟)이 유일한 역사의 증거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고분 유적은 이 시대의 대표적 유적으로서 사천만 연해를 비롯해서 강가나 평야, 구릉지대(丘陵地帶)에 분포하고 있고 곧 당시의 정치판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나 위치상 이러한 정치적 배경과 직결되지 않는 고분유적도 적지 않다. 비록 고대(古代)의 토분(土墳)이라 할지라도 정치세력과 아무 관계도 없는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앞으로의 연구가 필요하다. 한편 고분(古墳)은 성토(盛土)한 무덤, 또는 성토하여 봉토를 만든 무덤을 의미하고 있다. 사전시대(史前時代)에서 삼국(三國)이 형성되던 시기까지 조성 되었던 고인돌, 돌널무덤, 널무덤, 독무덤등 원시 분묘제에 이어서 새로이 나타나는 고봉분묘제(高封墳墓制)를 이른바 고분이라 한다. 삼국(三國)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3~4세기경 삼국은 각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권위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고봉(高封)형태의 고분(古墳)을 축조하게 되었으며 7~8세기경이 되면서 불교(佛敎)의 화장묘제(火葬墓制)가 새로이 등장하여 고분의 조성이 쇠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삼국(三國)의 형성초기인 3~4세기경부터 화장묘로 장제(葬制)가 변화하는 7~8세기경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지배계급자들의 무덤을 고분(古墳)이라고 할 수 있다.

  1) 선진리고분(船津里古墳)      선진리 623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선진성지(船津城址)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지점 소구릉(小丘陵) 위 동산처럼 보이는 곳이 바로 이 고분 유적이다. 규모는 지름이 32m, 높이 4.8m의 양수식 횡혈식석실묘(兩袖式橫穴式石室墓) 경남 최대의 고봉(高封)의 토분(土墳)이며, 일제시대에 도굴되어 널길(연도;羨道;길이2.9m 폭1.3m 높이0.6m)과 현실(玄室;길이5.4m 폭2.3m 높이1.8m)이 노출된 상태로 아직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다. 도굴 당시 이 고분에서 어떠한 종류의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가 출토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의 고분에는 지배계급의 신분적 권위와 경제적 능력, 그리고 내세관(來世觀)을 보여주는 호화스러운 유물들이 많이 묻혀 있고, 유물만을 부장한 것이 아니라 시종들을 죽여서 함께 순장(殉葬)하는 풍습도 행해졌음을 생각할 때 이러한 묘제에서 살아 있을 때의 권위와 번영, 그리고 호사스런 생활을 내세(來世)까지 그대로 가져간다는 의식이 분명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외형(外形)의 규모로 보아 당시 이 지역 권력자의 위풍을 그들의 묘(墓)에 나타낸 표시라고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곳곳에서 발견되는 가야문화(伽倻文化)의 흔적도 이런데서 연유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한국고고학연구회에서 간행한《한국고고학보(韓國考古學報)》특집(1984)에 의하면 이 고분을\'가야고분(伽倻古墳)\'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인근 주민들의 말로는\'몰무덤\'이라고도 하였다. 몰무덤이란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군사(軍士)가 전사하였거나 또는 천재(天災) 및 질병(疾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때 그 시신을 한데 몰아서 묻었다는 뜻으로 몰무덤이라 했는데 이 고분을 속칭(俗稱)과는 달리 조형 형식으로 보아 전혀 몰무덤이 아닌 것만은 분명(分明)하고 어떤 의미로는 당시 이 지역 수장급(首長級)의 무덤일 가능성이 짙다   「사천지역의 선사와 고분문화」(조영제;경상대학교 박물관장)의 논문에 의하면      ‘(전략) 선진리 고분만은 다소 검토가 필요한데 발굴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것은 알 수 없으나 평면형태가 양수식(兩袖式)이면서 현실(玄室)이 장방형을 이루고 또 낮은 시상(屍床)을 설치하고 있기 때문에 월성리 고분의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와는 시기와 계통을 달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현실의 평면이 장방형이고 양수식(兩袖式)인 횡혈식석실묘는 진주 수정동, 옥봉 고분군, 의령 중동리, 운곡리 고분군, 함안 도항리 고분군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이러한 고분은 모두 백제의 영향을 받아서 6세기 전반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에 선진리의 횡혈식석실묘는 가야지역에 신라의 힘이 들어오기 이전, 바꾸어 말하면 사천지역의 가야소국(伽倻小國)인 사물국(史勿國)이 멸망하기 이전에 축조된 고분일 가능성이 높으며 특히 고분의 규모가 현재까지 알려진 횡혈식석실묘 중에서는 경남일대에서 가장 크기 때문에 어쩌면 사물국의 지배자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가야시대의 사천지역은 사물국이라는 소국이 존재했지만 현재까지의 고고학조사에 의하면 다른 지역과 같이 4세기대의 이른 시기부터 소국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가야후기인 5세기 후반대부터 등장하여 6세기 전반대에는 상당히 강력해졌다가 (선진리고분) 562년 서부경남 가야 제세력이 멸망할 때 함께 신라에 병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라는 글을 볼 수있는데 이 고분에 대하여 앞으로 많은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리라 본다.      2) 신복리고분군(新復里古墳群)      고고학계(考古學界)에서는 6~7세기대 삼국시대(三國時代)의 것으로 추정하는 소형 석곽(石槨?)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 3~4기(基)의 고분군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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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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