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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1. 선사유적(先史遺蹟)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경남지방은 동해 및 남해에 면한 도서해안지대와 낙동강유역에 속하는 내륙지대로 크게 이분(二分)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낙동강과 그 지류(支流)인 진주남강(晉州南江), 합천황강(陜川黃江),밀양강(密陽江) 유역의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 그리고 해안지대는 온화한 기후와 알맞은 강우량 등 모든 자연의 조건이 인간생활에 가장 적합한 곳임은 어느 때나 한결 같다. 특히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배후에 기다란 바다를 끼고 있는 우리 지역은 그 천혜(天惠)의 조건으로 예로부터 물산(物産)이 풍부하여 일찌기 사람이 살아온 흔적들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우리고장 선사유적(先史遺蹟)에 대해 세대별(世代別) 개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경남 지역 선사문화는 아직까지 구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신석기시대부터 문화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의 신석기시대는 일반적으로 전기(前期;B.C 5000~B.C 3500), 중기(中期;B.C 3500~B.C 2000) 후기(後期;B.C 2000~B.C 800)로 나누어진다.   전기는 덧무늬, 돋을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가 번창하던 시기에 중.서부지방(中.西部地方)으로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등 문화인이 내려와 혼거(混居)하는 시기이며 중기(中期)는 중,서부지방이 특징적 토기인 원저(圓底)의 전면문(全面文) 빗살무늬토기가 만들어져 사용되는 시기로 아가리에 짧은 빗금무늬가, 몸통에는 고기뼈 무늬가 베풀어졌다. 후기(後期)에는 빗살무늬토기의 무늬가 없어지고 아가리가 2겹인 겹아가리 토기들이 제작된다. 밑이 둥근 겹아가리 토기는 남부지방에서만 제작되는 독특한 토기로서 겹아가리밑에 빗금무늬가 1~2줄 베풀어져 있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은 토기는 우리 용현면에서는 출토된 일은 없으나 인근 서포면 구평리에서 출토한바 있고 부산 동삼동, 김해 수가리 등의 조개더미(貝塚)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있다.

<청동기시대의 홍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이 시대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출현하고부터 철기(鐵器)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청동기문화의 개시연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으나 대체로 B.C 10~8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원시적인 농경과 수렵, 어로 등 채집경제에 주로 의존하고 있을 무렵 서북, 동북지방에서는 청동으로 도구를 만들어 쓰는 청동기시대에 접어들고 이러한 선진(先進) 북방계 문화의 영향으로 남부지방에서도 B.C 8세기경에는 청동기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 시대를 살펴보는 데는 움집터와 묘제(墓制)가 가장 중요하며 무덤은, 그 무덤을 쓰는데 이용되었던 재료에 따라<돌무덤><독무덤(甕棺墓)><움무덤>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 무덤 가운데 가장 널리 조사된 것은 돌무덤 종류로서 고인돌무덤(支石墓), 돌널무덤(石棺墓), 돌무지무덤(積石塚) 돌깐무덤(敷石墓)등이 거기에 속한다. 여러 형태의 돌무덤 중에서 고인돌무덤과 돌무지무덤은 그 형태가 지상에 드러나 있으나 반면에 돌널무덤과 돌깐무덤은 대부분 땅속에 묻혀 있는 제약 때문에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1969년 8월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정동면 소곡리 신월마을에서 발굴한 무덤이 위에서 말한 돌깐무덤이다. 출토된 유물로는 껴묻거리용인 붉은간토기편, 가락바퀴와 돌검, 화살촉 및 민토기 등이 나왔다. 이밖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홍도(紅陶)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 초기철기(初期鐵器) 및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우리나라가 청동기문화의 단계에 있을 때 중국에서는 춘추시대말인 B.C 5세기에 철의 제련술이 개발되어 각종 철기가 제작됨에 따라 사회 변혁이 일어난다. 한편 전국시대 말기인 B.C 3세기 철의 제련술을 알고 있는 주민(住民)의 이동으로 우리나라에 중국제 철기가 들어오게 되고 B.C 2세기 후반경에는 영남지방에도 철제련술이 보급됨으로서 역사상(歷史上)의 삼한시대(三韓時代)인 변한(弁韓)으로 접어들게 된다. 중국(中國)에서 철기문화에 수반되어 남부지방에 들어온 것으로는 한식토기(漢式土器)를 비롯해 이들의 묘제인 널무덤과 덧널무덤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벼농사에도 전래(傳來), 원시 농경민들은 철제농구를 제작 사용하게 된다. 이들 복합문화체는 남부지방 토착 민무늬토기 문화에 충격을 주어 새로이 와질토기(瓦質土器)와 연질토기(軟質土器)를 만들어 쓰게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석기를 철기로 대체시키게 한다. 이 시기의 유구(遺構)로는 집터, 무덤, 조개더미 유적 등이 조사 되고 있는데 서부경남의 남해안 지대로는 삼천포(三千浦) 늑도(勒島)가 대표적인 예이며 우리면 송지리(松旨里) 장송의 돌널무덤군은 다소 시대적으로 후기(後期)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 조개무지(패총 ; 貝塚)      1) 선진리(船津里) 조개무지   선진리 1017번지에 위치하는데 선진리성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신태석(申泰錫)씨 소유 밭 언덕배기에 옛날부터 언덕길을 내면서 대부분 유실 되었으나 지금도 언덕 표기에 약간의 조개껍질이 쌓여 있다.      2) 금문리(琴聞里) 조개무지   1967년 11월 당시 사천군수이던 김상조(金相朝)씨에 의해 돌도끼(타제;打制) 2점을 발견하여 채집한 적이 있으나 지금은 흔적도 찾기가 어렵게 변해 버렸다.      3) 장송, 주문 조개무지   학술적으로 벌표되지 않았으나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옛날에 있었으나 지금은 훼손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 고인돌 무덤(지석묘;支石墓)      1) 신복리(新復里) 고인돌 무덤   신복리 정수암골 일원으로 안점산(鞍岾山)과 정수암(淨水庵)골 산에 4기(基), 계곡 못가 및 민묘(民墓) 주변에 4기(基) 등 모두 16기의 남방식 무덤이 산재하고 있다. 뚜껑돌의 크기는 모두 3m 내외로 그 중 민묘 주변의 4기는 거의 땅속 에 매몰 되어 있다.      2) 용치리(龍峙里) 고인돌무덤   용치저수지 상류 어귀 구릉에 민묘가 있는데 그 민묘 옆에 남방식 무덤 3기가 있다.   또 개재마을 입구 들 가운데 남방식무덤 2기가 있으나 이들 무덤의 뚜껑돌은 모두 소규모이다. 그러나 그 중에 1기는 뚜껑돌 위에 인물조상(人物彫像)이 선각(線刻)되어 있어 특이하다.      3) 송지리(松旨里) 고인돌무덤   송지리 일대는 초기철기시대 후기로 추정되는 돌널무덤이 산재하고 있는 곳이다. 1968년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돌널무덤군 바로 옆에 고인돌무덤 1기가 있는데 무덤의 양식은 북방식이다. 또 밭 가운데 3기, 민묘 주변에 2기가 있으며 이들 무덤은 모두 뚜껑돌의 크기가 2m 내외의 소규모 남방식 무덤이다. 한편 주민들의 말로는 고인돌무덤뿐만 아니라 돌널무덤등 상당수의 무덤이 농경지 개간과 도로로 인하여 파괴 되었다고 한다.      4) 구월리(龜月里) 고인돌 무덤   구월리 475의2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길이 2.9m, 너비 2.2m 높이 0.6m 크기의 남방식 무덤 4기가 들 가운데 흩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경지정리로 인하여 그 흔적이 없다.

복원된 돌널무덤(단국대 박물관)

  ◎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      1) 송지리(松旨里) 돌널무덤군(群)   송지리 726번지 일원에 산재해 있다. 해방 전 용머리마을 앞 만입부(灣入部)의 간척공사(干拓工事)를 하기 위하여 장송(長松)과 종포(宗浦)를 잇는 송지방조제(松旨防潮提;1040m)를 축조하였는데, 이때 장송마을 구릉지대(丘陵地帶)의 토취로 유구(遺構)가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1968년 4월부터 8월까지 단국대학교박물관(단장 鄭泳鎬)에 의해 약 200평 규모의 밭에 군집(群集)한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 13기의 유구를 발굴 조사하였다. 동 박물관에서는 아직까지 발굴에 관한 종합보고서를 간행(刊行)하지 않고 있으나 이 유구의 형태, 장법(葬法), 껴묻거리 등으로 미루어보아 옛가야(伽椰)때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발굴 당시의 개략을 보면 13기의 유적 중 12기는 이른바 돌널무덤(石棺墓)이다. 대개 무덤방의 판돌(板石)은 점질(點質)로 된 자연석(自然石)의 장방형(長方形)이고 제일 큰 판돌은 길이 3.5m, 너비 0.7m에 이르고 나머지도 대략 같은 규모로 지표에서 30~40cm 땅속에 묻혀 있었다. 뚜껑돌은 거의 파괴된 상태로 간혹 판돌조각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무덤방의 껴묻거리는 쇠로 만든 장검과 단검, 쇠살촉, 말의 발걸이, 금동제걸이, 관옥, 목걸이 등의 장신구와 김해식 토기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정영호 발굴단장의 견해(見解)로는 돌널무덤의 규모나 껴묻거리 등의 내용으로 보면 고인돌무덤에서 삼국시대(三國時代)의 거대한 고봉토분(高封土墳)으로 발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초기 철기시대 후기에 유력(有力)한 집단생활지(集團生活止)로 보고 있다.   현재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유구의 무덤방 1기를 운반하여 그 원재(原材)로서 동박물관 옆 잔디밭에 복원(復元)하여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김해식 토기 일부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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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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