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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2. 조·명군총(朝· 明軍塚 ; 기념물 제80호)

<위령비를 세울당시는 소나무가 울창하다.>

  선진리 402번지에 위치한 이 군총(軍塚)은 조선조 선조(宣朝) 31년(1598) 10월에 일어났던 이른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선진리성(船津里城;당시는 신채(新寨)라 함)에 포진(布陳)하고 있던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최후의 결전(決戰)을 벌였다가 산화(散華)한 희생자의 넋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무덤의 형태는 사방(四方) 200간(間 ; 1간은 약 36㎡)의 방형분묘(方形墳墓)로서 흔히󰡐당병(唐兵)무덤’이라 일컬었으며, 속칭\'댕강무데기’라고도 한다. 해방 전까지는 무덤위에 <당병공양탑(唐兵供養塔)>이라 쓰인 높이 1m가량의 표석이 서 있었으나 해방 후에 없어졌다. 그러나 이 무덤만은 약 400년 동안 원형(原形)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잘 보존되어 왔으며, 지금은<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朝明聯合軍戰歿慰靈碑)>가 무덤 앞에 세워져 있고 또 1985년 11월14일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기념물(記念物)로 <조· 명군총(朝· 明軍塚)>이라 명명(命名)하여 보호되고 있다.

<단장된 조명군총>

  조명군총(朝明軍塚)의 유래를 살펴 볼 것 같으면 1592년(宣祖25년) 임진(壬辰) 4월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은 강화교섭(講和交涉)을 3년이나 끌다가 결렬되자 1597년 1월 일본군이 우리나라를 재침하여 북진하려다 육지(陸地)에서는 9월6일 직산(稷山) 근방 소사전투(素沙戰鬪)에서, 해상(海上)에서는 8월16일 명랑해전(鳴梁海戰)에서 대패(大敗)하여 북진과 서진계획이 저지되자 전국(戰局)에 일대(一大) 전환(轉換)이 왔다. 그리하여 일군(日軍)은 서둘러 경상도 남해안(南海岸) 지방으로 퇴각하여 동쪽으로 울산(蔚山)에서부터 서쪽으로 순천(順天)에 이르는 800여리 연해(沿海)에 성(城)을 쌓거나 또는 수축(修築)하고 나뉘어 주둔(駐屯)하였다.

  이 때 우리지방에는 선조 30년(1597) 12월에 왜장 모리길성이란 자가 선진에 상륙하여 성을 수축(修築)한 것을 그 이듬해(1598) 왜장 도진의홍(島津義弘) 부자(父子)가 진(陣)을 쳤는데, 명(明)나라 동정군(東征軍)의 중로제독(中路提督) 동일원(董一元)과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鄭起龍)이 약 3만여 병력으로 9월 19일부터 진주에서 남강을 건너 망진채(望晉寨), 영춘채(永春寨), 곤양성(昆陽城)을 차례로 빼앗고 사천구성(泗川舊城 ; 邑城)의 적도 크게 무찌른 후 10월 초 하루에는 선진(船津)의 신채(新寨)에 공격을 가하여 왜적을 바다로 몰아내기 위한 치열(熾烈)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에 아군진중(我軍陣中)의 폭약궤(爆藥櫃)에서 발생한 불의의 화란(火難)으로 적계(敵計)의 역습을 받게 되어 아군은 수 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는데 이 때 분사(墳死)한 전사자(戰死者)들이 적의 손에 의하여 장사(葬事)된 곳이 바로 이 조명군총인 것이다.   적(敵)은 이 전투에서 38,717명의 목을 베었다고 공칭(公稱)하였으며, 도진의홍(島津義弘)은 그의 부하인 후시래손좌위문(後市來孫左衛門)에게 명(命)하여 성밖에다 사방 20간(間) 되는 땅을 파서 시신을 묻고 큰 무덤을 만들어서 진승(陳僧 ; 大慈寺, 萩原寺) 졸사파(卒士婆)가 장례(葬禮)를 집행(執行)한 후󰡐경관(京觀)󰡑이라 명명(命名) 하였다고 했다. 또한 참수(斬首)한 수급(首級)의 코와 귀를 베어 큰 나무통 10개에 넣고 소금에 절인 후 전공공물(戰功貢物)로 본국에 보냈다고 하였다<도진의홍기(島津中興記)> 그러나 우리 측의 《선조실록(宣朝實錄)》에 의하면, 당시 전사(戰死)한 명군(明軍)의 수는 7~8千명에 이른다고 하여 3만여 이상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승자(勝者) 쪽에서는 전과(戰果)를 크게 과장하려 하고, 반대로 패자(敗者) 쪽에서는 그 피해를 가능한 줄이려고 하는 것이 예사(例事)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38,717명 대 7~8千명이라는 큰 차이는 과장이라도 이만저만의 과장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당시 동일원(董一元) 휘하의 조· 명연합군(朝· 明聯合軍)의 총병력의 3만병보다도 많다는 점에서 믿기 어려운 숫자인 것이다. 당시 왜군이 전공공물(戰功貢物)로 코와 귀를 잘라 보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은 전투한 뒤 또는 분탕질할 때 가능하면 죽은 사람의 코와 귀를 잘라 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 측 기록의 38,717명 가운데는 10월1일 전투에서의 명군전사자(明軍戰死者) 외에 그 이전의 여러 전투에서 전사한 명군(明軍)과 조선군(朝鮮軍) 및 이러한 전쟁 통에 억울하게 죽은 일반 양민(良民),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자행해온 왜군(倭軍)의 분탕질로 무참히 학살당한 인근 지방양민들의 숫자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무덤은 근년까지 오랫동안 우리들의 관심 밖에 방치되어 너무 소홀하게 대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당병무덤이란 이름과 같이 명군 전사자의 수급만 많이 묻혀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무덤이 비록 명군전사자(明軍戰死者)들의 수급(首級)이 많이 묻혀 있다 하더라도 왜침(倭侵)을 당한 우리나라의 국난(國難)을 구하기 위해 원군(援軍)으로 파병되어 왜적을 몰아내려다 이국땅에서 목숨 바친 원혼(怨魂)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고귀한 정신을 우리들은 높이 현창(顯彰)해 주어야 마땅한 곳이다. 다행히 1980년대에 이르러 사천문화원(泗川文化院)이 중심이 되고 사천사회단체협의회(泗川社會團體協議會)가 주관하여 사천군민(泗川郡民)은 물론 출향인사(出鄕人士)들의 정성어린 성금(誠金)으로 무덤 앞에 광장을 마련하였으며, 제385주년만인 1983년 11월 4일<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朝明聯合軍戰歿慰靈碑)>를 건립하여 제막식(除幕式)을 성대히 갖는 한편 영령(英靈)을 추모하는 의범(儀範)을 비로소 가졌다. 따라서 사천시 지원 하에 사천문화원이 주관하여 해마다 10월 1일(음력)을 기하여 년례행사(年例行事)로 위령제(慰靈祭)를 거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유재란과 조명군총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조중화의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 (1996, 6, 15. 학민사)의 제9장 ‘왜곡된 역사 사실들’이라는 제하(題下)의 글을 보면   정유재란 때 시마쓰(島津) 부대는 충청도 부여에 진군하였다. 그러나 군량이 떨어지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복직하여 후방이 차단될까 두려워 경상도 사천으로 후퇴 선진리 왜성을 축성하고 주둔하였는데 아사자, 병사자가 속출하여 사기가 땅에 떨어져 군사들은 풍신수길이 죽을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부대장의 아들 시마쓰 다다쓰네(島津忠桓)가 부산에 가서 1598년 7월 17일 풍신수길이 죽었으므로 부대를 부산으로 이동시켜 본토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사천에 돌아왔다.   부산까지 걸어서 이틀이면 갈 수 있으나 조선 의병의 잠복 공격이 두려워 갈 수가 없어 본토에서 시마쓰 부대의 수송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조(朝), 명(明)군이 사천으로 몰려왔는데 원래 싸울 의지가 없고 협상을 좋아하는 명군이 조선군의 전의를 억제하였으므로 조선군은 싸울 수가 없었다. 왜성 안의 일본군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그리운 처자를 만날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리하여 전투의지가 있을 리 없어 전선은 평온하였고 본토에서 시마쓰부대의 수송선단이 와서 무사히 귀환하였다. 이것이 당시의 역사적 사실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견문록을 쓴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과 전쟁 직후 가아바라 에기겐(貝原益軒)이 쓴 「구로다후(黑田譜)」에도 선진리 왜성 밖에서는 전투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군 천명이 선진리 왜성 밖으로 나가 명군 20만명을 모조리 죽이고, 일본군은 한명의 전사자도 없어 본토의 중신들이 부대장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1598년 11월 2일자로 감사장을 주었다고 시마쓰가문의 문서(島津家文書)에 나와 있다.   시마쓰 요시히로가 일본의 남단 미야사기겐(宮崎縣)에서 승려로 있던 형 시마쓰 류우하구(島津龍伯)에게 보낸 편지를 오오사까(大阪)에 있는 중신들이 중간에서 보고 문제의 감사장을 주었다는 것인데 도대체 말이 안 된다. 이 감사장은 당시 한반도에 있는 부대에서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준 감사장 양식과 전혀 틀리고 그 원본도 없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날조된 기록이다. 같은 전공을 가지고 1599년 1월 9일자로 중신들이 시마쓰 요시히로에게 또 감사장을 주었다는데 이번에는 그 수를 축소하여 38,700명의 명군을 죽였다고 나온다. 그런데 시마쓰가 문서에 “이 문서와 문언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コノ文書文言等疑フベキ點ァリ)”라고 하여 위작(僞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시마쓰 요시히로가 조.명.일 전사자의 명복을 빌었다는 비석이 일본 오가야마겐(和歌山縣) 고오야산(高野山)에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 사천전투에서 명군 8만 명을 죽였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싸움이 있었다는 1598년이 1597년이라 잘못 적혀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 세워진 것이 아니라 후세에 세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시마쓰 요시히로가 죽은 후 그의 손자 시마쓰 쓰나히사(島津綱久)가 1671년 조상의 임진.정유재란 때의 업적을 기록하였는데 그 때 아무 전과가 없는 할아버지의 업적을 과장해서 「세이간로구(征韓錄)」라는 ‘소설’을 썼다. 거기에는 일본군이 일제히 성 밖으로 뛰쳐나가 명군을 수없이 죽이고 그 중 38,717명의 목을 벴다고 하여 처음으로 ‘목베기’ 기록이 등장한다. 1918년 시마쓰 요시히로 사망 300주년을 기념하여 「시마쓰 요시히로 고오기(島津義弘公記)」를 만들었는데 “명군 8만명을 죽여 목 38,717개를 짜르고 그 코를 베었다”고 하여 처음으로 코베기 기록이 나온다.   1921년 사학자 히라가와 기요다가(平川淸高)의 「역사 교육에서 본 삼주사의 연구(歷史敎育よリ觀たゐ三州史の硏究)」에 “일본군 천명이 명군 30만 명을 추격하여 3만 8천명을 죽이고 그 귀를 잘라 고오야산(高野山)에 장사 지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이총(耳塚)이 이것이다”라고 말하여 ‘귀베기’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풍신수길이 경도에 세운 코무덤(鼻塚)과 와가야마겐 고오야산에 시마쓰(島津) 가문이 세운 “한반도 전선에서 죽은 조.명.일 전사자의 명복을 빈다(爲高麗國在陣之間敵味方鬪死軍兵皆令入佛)”라고 새겨진 비석과 혼동하고 있으므로 잘못된 기록이다.   이상과 같이 일본의 기록들은 일관성이 없고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날조된 일본 기록을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고 1983년 사천 선진리 왜성 옆에 조명군총(朝明軍塚 ; 경상남도기념물 제80호)을 만들고 그 설명판에 “일본군이 조.명 연합군을 죽여 목 수천 개를 베고, 그 귀와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냈다”고 나와 있으니 그 무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이처럼 잘못된 기념물은 하루 빨리 철거하는 것이 옳다. 라고 기술되어 있어 사학자(史學者)도 아닌 필자로서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위령비의 규모와 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朝明聯合軍戰歿慰靈碑; 이수롱대(螭首籠臺)   · 규묘 ~ 높이 2.12m 폭 73cm 두께 42cm   · 전면각 ~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朝明聯合軍戰歿慰靈碑)   · 측면각~서기(西紀)일구팔삼년십일월사일 세움   (癸亥十月初一日戰歿385週忌)   주최 : 社團法人 泗川文化院(院長 吳大泳)   주관 : 泗川社會團體協議會(會長 張在薰)   협찬 : 泗 川 郡(郡守 梁鍾守)      비문(碑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삼 덧없어라. 시간(時間)이란 무시종(無始終)의 바람결이며 그 수레바퀴에 실려가 누누(累累)한 청사(靑史)의 책장 밖에서 민들레꽃 솜털인 듯 떠돌이 구름다운 무주원혼(無主怨魂)들이 구천 어디메 오갈 곳 없음인들 무릇 얼마리오. 저기 당병소(唐兵沼)와 사남(泗南) 화전(花田)의 병둔(兵屯)자리 및 왯골, 왯등 따위로 이름이 남았고 이 일대 선진신성(船津新城)터는 一五九七年 정유(丁酉) 재침(再侵)후 十二月 감二日에 준공(竣工)시킨 왜장(倭將) 도진의홍(島津義弘)이 十여 달이나 차지했던 자취로서 어언 근 400년(近 四百年)의 춘풍추우(春風秋雨)동안 이곳 선진리(船津里)의 속칭 \'댕강무데기\'아래 무언의 흙이 된 왜군 명병과 호국전몰(護國戰歿)의 사연들을 되살려 보련다. 앞서 임계양란(壬癸兩亂)으로 이 땅 남북강산(南北江山)의 조야민생(朝野民生)을 짓밟았던 적괴(敵魁) 풍신수길(豊臣季吉)의 무엄한 도이(島夷) 강화3년(講和三年) 교섭의 결렬에 이어 정유년(丁酉年)에 재침(再侵) 북진(北進)하려다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에 꺾여 선진신성(船津新城) 안에 농성 하였기 익98년(翌九八年) 무술(戊戌) 9월(九月) 스무날부터 명중로군(明中路軍) 동일원(董一元)과 우리 정기룡군(鄭起龍軍)이 사납게 쳐몰아 망진(望晉), 영춘(永春), 곤양채(昆陽寨)를 차례로 빼았고 사천읍성(泗川邑城)의 적(敵)도 크게 무찔렀다. 마침내 十月 첫날에 선진왜성(船津倭城)을 다구쳤으나 배수진(背水陣)의 적계(敵計)에 역습당하여 분사(憤死)한 아군(我軍) 일만(一萬)내외의 수급(首級)이 여기 당병(唐兵)무덤에 적의 손으로 장사됐다.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군(鄭起龍軍)의 이천이백(二千二百)과 제독(提督) 동일원(董一元)을 합쳐 3만6천설(三萬六千設)도 있지만 아국기선봉(茅國器先鎽) 7천5백(七千五百)과 좌우익(左右翼) 각 4천(四千)이면 만5천5백(萬五千五百)의 실전주력(實戰主力)과 적수(敵數) 약 8천(八千)의 대결인데 아군진중(我軍陣中)의 병고(兵庫)에서 발생한 화란(火難)에다 동제독(董提督)의 전략(戰略)이 경적(輕敵)의 허(虛)를 범한 후평(後評)마저 있었다. 기승한 흉적(兇敵)은 동지(冬至)달 열여드렛날 병선(兵船) 5백척(五百隻)으로 사천선창(泗川船滄)을 떠나더니 강주해(江州海)를 거쳐 노량(露梁)나루에 이르매 서둘러 여수(麗水)서 달려온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연합군(聯合軍)과 해전사상(海戰史上)에 불후(不朽)할 노량대해전(露梁大海戰)을 치렀다. 이튿날 미명(未明)의 관음포(觀音浦)에서 이통제사가 순국(殉國)한 격전(激戰) 끝에 패잔선(敗殘船) 겨우 5십여척(五十餘隻)을 이끌고 혼비(魂飛)한 적(敵) 도진(島津)이 도망치자 묘도(猫島) 서편(西便)으로 패적장(敗敵將) 소서행장(小四行長) 또한 탈주함으로서 악몽(惡夢) 7년(七年)의 임란(壬亂) 싸움이 선진포(船津浦)를 마지막으로 설욕(雪辱)의 막을 내린 셈이다. 일본(日本)의 고도(古都) 경도(京都)에 왜구(倭寇)들이 전공공물(戰功貢物)로써 묻혀 있던 이총(耳塚)에서 금년(今年) 9월(九月) 한일유지(韓日有志)들이 위령(慰靈)의 향사(享祀)를 가졌거니와 왕정(王政) 한 때의 내우(內憂)가 천추(千秋)의 외환(外患)을 자초(自招)한 공죄(功罪)야 여부간에 강토(疆土)의 북반천지(北半天地)는 아직 잠겨있는 채 우리들 민주공화조국(民主共和祖國)을 세운지라 이제 향민(鄕民)의 미애(微哀)을 모아 먼먼 이국(異國) 땅에 불귀(不歸)의 한객(恨客)으로 남은 명대맹방민(明代盟邦民)의 굳은 전우애를 기리며 삼가 조.명연합군위령(朝.明聯合軍慰靈)들의 명복(冥福)을 비는도다. 어즈버 성웅(聖雄) 이순신공(李舜臣公)의 전상독전(戰傷督戰)과 두척의 거북철선까지 신출괴몰(新出鬼沒)턴 성난 선진(船津) 앞바다는 그 분들을 진혼(鎭魂)하여 길이 고요하라.      西紀 一九八三年 十二月 四日 (癸亥十月初一日 戰歿 三八五週期)   이비에 있어 파성(巴城) 설창수(薛昌洙)는 글 지었고,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는 글씨 쓰다.      ※ 조명군총 바로 옆 동편에 안장된 소위 ‘귀무덤’에 대하여 조금 거론하고자 한다.   필자는 귀무덤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과민반응을 나타내는 기질이 있으므로 별다른 의견개진은 생략하고 수양문화 7. 8호합병본 66~70쪽의 ‘임란이총호국영령안장대재’ 내용 일부를 소개코자 한다.

<귀무덤>

  『임진왜란 때 왜군(倭軍)의 전리품(戰利品)이 되어 일본 땅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던 귀무덤(耳塚)의 원혼들이 본군 용현면 선진리 소재 조명군총(朝明軍塚 ; 지방기념물 제80호) 옆에 영원히 잠들었다. 조국에 돌아온 지 2년, 임진왜란 발발 400년만의 일이다. 지난 4월 22일 조명군청 앞 광장에서는 사천문화원과 삼중자비회(三中慈悲會) 전국준비위원회 공동 주관으로 ‘임란이총호국영령안장대재(壬亂耳塚護國英靈安葬大齋)’를 올려 5천여 불자의 독경 속에서 12만 6천여 원혼들이 안식되었다. 귀무덤은 임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이 전공(戰功)의 공물(貢物)로 삼기 위해 조선의 군사와 무고한 양민 12만 6천 여 명의 귀와 코를 베어 소금에 절인 후 15개의 나무통에 넣어 왜국으로 가져가 묻은 역사적 현장으로 경도(京都)에 있었다.   지난 84년 4월 재일한국인의 재소자를 교화하고 경도를 방문한 박삼중스님(자비사 주지)은 우연히도 귀무덤을 발견한 순간, 극치의 통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 후 6년 동안 일본 측과 끈질긴 교섭 끝에 90년 4월 22일 ‘이총영가환국위령대재(耳塚靈駕還國大齋)’를 현지에서 지낸 후 다음날 KAL 전세기편으로 귀무덤의 흙과 함께 영혼들을 부산으로 봉송해 왔다. 그러나 환국 2년이 가까운 시점까지도 이들 영혼들은 영원한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부산 동명불원(東明佛院)을 거쳐 삼중스님 자신이 주지로 있던 자비사에 임시로 모셨다. 그 사이 제주도의 한라산, 김해, 양산 등이 물망에 올랐으나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사천에서는 지난 91년 11월 조명군총 광장에서 ‘제393주기 임란조명연합군 전몰위령제’를 봉행했었다. 이 때 제례 실황이 TV를 통해 전국에 방영되자 때마침 이를 보게 된 박스님은 그 후 사천문화원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고 또 현지 답사와 사실(史實)을 바탕으로 이곳에 안장키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문화원의 도움으로 임란 발발 4백년, 귀무덤 영혼 환국 2주년이 되는 92년 4월 22일 조명군총 옆에 안장하게 된 것이다. 이날 안장대제는 전일 천도제를 가진 영혼들이 꽃차에 실려 오전 8시 군악대와 의장대를 따라 자비사를 출발, 오전 10시 부산사직실내체육관 앞에서 노제를 지내고 오후 2시 조명군총 광장에 당도하여 특설무대 위에 혼백이 안좌됐다. 곧이어 선동욱(경남문화재 9호), 이영희(경상대 교수) 양씨에 의해 사천진혼가 및 진혼무가 연희되고 발원문 낭독에 이어 윤길중(전 국회부의장) 대회장이 대회사와 자신이 지은 한시를 읊었고 박삼중 봉행위원장의 봉행사, 그리고 경상남도 부지사의 추도사가 있었다. 또 일본의 진사사절단 30여명을 이끌고 온 가키누마 센신(柿沼洗心) 대표는 참회사에서 ‘저희 일본인의 조상들이 저지른 죄이지만 마음속 깊이 후손으로써 참회하오며 사죄를 올리는 바입니다.’고 말했다. 입정이 있고나서 송서암 대선사인 증명법사 법어에 이어 헌화, 정근, 사홍서원 등의 순서로 제1부를 마쳤다. 다음 2부에서는 박송암(인간문화재) 스님일행의 영산재에 이어 범패, 바라춤이 연희되고 일본측 참회단 일행의 일본불교의 전통의식이 있었다. 또한 박옥자의 살풀이, 광주 불교무용단의 가야금산조, 무용극 넋두리, 군무, 불음합창단의 합창을 끝으로 이날 ‘안장대재’와 ‘예술대재’는 무사히 그 막을 내렸다.(이하생략)』로 기록되어 있다.   귀무덤의 환국이나 제주도 한라산, 김해, 양산 등의 안장장소를 물색하다가 마땅치가 않아 이 곳에 안장된 것은 수긍이 가지만 조명군총 옆이 ‘사실(史實)을 바탕으로’한 곳이라는 내용에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 이에 대한 내용이 있어 다시 소개코자 한다. 조중화의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1996. 6. 15 학민사)의 180쪽에는 ‘1597년 8월 15일부터 약 1개월간에 걸쳐 코베기가 있었는데, 전라도의 남원성 전투이후 일본군은 충청도로 진격하여 군사 한명 당 코 3개씩의 책임량이 달성되어 214,752개의 코를 경도에 보내 무덤을 파묻고, 그 후에는 코베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라는 글을 볼 수 있으며, 그리고 조중화의 「바로잡은 임진왜란사」130~133쪽에는 근거 없는 12만6천개의 귀 출처에 대하여 삼중스님에게 엄중히 문의한 내용과 이에 대한 삼중스님의 묵묵부답한 내용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서 미화(美化)되어진 역사책만 보지 말고 유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분서(焚書)로 지정됨), 조경남의 난중잡록, 이수광의 지봉유설, 노인의 금계일기, 김시양의 자해필담, 경칠송의 해사록, 선조실록 등 임진왜란과 관련된 많은 책을 통하여 정확하고 객관적인 역사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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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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