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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1. 개설   인구는 사회(社會)를 구성하는 기본(基本)인 동시에 사회활동의 주체(主體)인 것이다. 의학기술의 발달과 경제활동(經濟活動)의 향상(向上)에 의하여 안정되고 높은 생활수준으로 개체(個體)의 건강상태 호전(好轉) 등에 인한 인구의 증가(增加)와 근대산업의 발달로 인구의 도시 집중이 가속적(加速的)으로 진행되고 있음은 세계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구조사는 원래 조세(租稅), 징병(徵兵), 부역등의 의무를 국민들에게 부과(賦課)시킬 목적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시기는 대체로 국가체제의 형성과 때를 같이 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호구조사(戶口調査)가 제도화(制度化)된 것은 삼국시대 이후에 속하거니와 당대(當代)의 호구조사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못하며 다만 단편적으로 《동사보유(東史補遺)》,《삼국유사》,《신당서(新唐書)》 등에서 약간 발견될 뿐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국초(國礎)이래 호구조사가 상당히 엄격하게 행하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처음에 고려(高麗)의 호적 제도를 그대로 답습해오다가 그 후 크게 보완(補完), 강화(强化)하였다. 그러나 현대적(現代的) 의미로서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은 1925년부터이며 그 후로 약 5년마다 국세조사(國勢調査), 인구조사(人口調査) 또는 인구센서스(census)등의 이름으로 현재까지 여러번에 걸쳐 대규모의 인구조사가 실시되고 있다. 이것을 보다 상세히 분석(分析)하면 1910~1945년에 걸친 36년간은 일본인에 의하여 인구조사가 행하여졌고 조사된 인구자료를 식민지 수탈정책 수행에 기초 자료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인구센서스가 시행된 것은 전기(前記)한 바와 같이 1925년으로 예정되었던 제1회 인구조사는 3.1운동으로 중지(中止)된 바 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 1935년, 1940년, 1944년에 인구조사를 시행함으로써 해방전에 도합(都合) 5회의 인구조사가 있었다.   해방후 최초(最初)의 인구조사는 1946년 8월 미군정청(美軍政廳)에 의하여 행하여졌고 이어서 1947년, 1948년에도 역시 미군정청에 의하여 조사된 바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혼란에 비추어 그 신뢰도(信賴度)는 그리 높지 않았다. 해방후 우리나라 최초의 인구센서스는 1949년 5월 1일을 기하여 행하여졌으며 집계가 완료되기 전에 6.25사변으로 모든 자료가 소실(燒失)되었으며 다만 일부 내용이 수록된 속보(續報)만이 발표되었을 뿐이다.   이후 인구센서는 1955년 9월 1일, 1960년 12월 1일, 1966년, 1970년, 1975년은 각각 10월 1일에 시행하였고 1980년, 1985년, 1990년은 11월 1일에 시행하여 모두 9회에 걸치며 1960년 이후에는 종래(從來)의 현재인구 조사에서 상주인구(常住人口) 조사로 바뀌었다.   특히 1960년 이후 센서스 방법이 크게 개선(改善)되었으며 경제발전과 근대화(近代化)에 발맞추어 조사 항목도 다양화(多樣化) 되었다. 센서스 통계의 신뢰도도 점차 높아졌고 특히 1970년의 조사는 그 정확성(正確性)에서 높이 평가(評價)되고 있으며 1968년 주민등록법이 제정(制定)된 이후 매번 주민등록에 의한 인구이동(人口移動) 통계(統計)를 작성하여 인구이동 통계연보(年譜)로써 발표되고 있다.   인구동태 조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낙후(落後)된 부분으로서 현재 어떤 특정지역의 표본(標本)조사와 센서스 년도의 인구 증가율(增加率)을 적용하여 인구동태를 추정(推定)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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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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