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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대구서씨(大邱徐氏) 전첨공파(典籤公派) (풍정)   대구서씨(大邱徐氏)의 시조 휘 한(閈)은 누대에 걸쳐 大邱에 정착 세거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後裔)로 고려조에서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역임하여 후손들이 대구를 관향(貫鄕)으로 삼고 계대해 오고 있다.   그런데 시조 소윤공(少尹公)의 다음 대부터 5대가 실전(失傳)되었고, 고려 말엽에 와서 시조의 7세손 휘 익진(益進)이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낸 까닭에 대구서씨의 후손들은 이분을 중조 1세로 하고 있다. 그는 경상도 자인현(玆仁縣)으로 내려와 은거하였으며, 후에 가정대부(嘉靖大夫) 호조참판(戶曹叅判)에 증직됐다. 그의 아들 의(義)는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냈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기관낙향(棄官落鄕)하였다.   일찍이 영남 내륙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문장과 도덕을 겸비한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기틀을 다져온 대구서씨는 조선개국과 함께 훌륭한 인재(人財)가 많이 배출되어 명문(名門)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중조의 8세손 휘 성(渻)은 6세손 참의공 고(固)의 손자로 성리학에 밝았던 함재공(涵齋公) 해(嶰)의 아들. 자는 현기(玄起) 호는 약봉(藥峯)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서 수업(修業)하였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으로 함북에 이르러 황적욱 등이 두 왕자와 함께 적의 포로가 될 때 홀로 탈출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호조, 형조, 공조의 판서(判書)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고,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연루되어 11년간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형조, 병조의 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丁卯胡亂, 1624년)에 각각 인조(仁祖)를 호종했다. 학문에 능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중조의 9세손 경수(景需)의 자는 시중(施中)으로 약봉공(藥峯公)의 둘째 아들. 1605년(선조 38) 진사에 합격하여 음사(蔭仕)로 양천현령(陽川縣令), 호조좌랑, 형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633년(인조 11)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지냈다. 1635년(인조 13) 단양군수(丹陽郡守)로 관직을 끝마쳤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는데 대구서씨 전첨공파(典籤公派 )의 파조(派祖)시다.   파조 전첨공의 인맥(人脈)으로는 아들 상이(祥履 : 자 汝吉)가 인조(仁祖) 때 전강(殿講)에 있어서는 유생(儒生)의 으뜸이었다. 1630년(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벼슬에 기용되었으며, 여러 조(曹)의 랑관(郞官)을 거쳐 시강원(侍講院)에 보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봉림대군(鳳林大君 : 孝宗)을 따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고, 이듬해 화의(和議)의 성립으로 볼모가 된 봉림대군을 따라 심양(瀋陽)에 갔으며, 뒤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거쳐 예조참의,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5년 종성부사(鍾城牧使), 다시 병조참의를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조의 증손 13세손 종제(宗悌)의 딸이 영조비(英祖妃)가 되고, 종제의 현손 익헌공(翼獻公) 용보(龍輔 : 자 汝中, 호 心齋)가 순조(純祖) 때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중조의 13세손 명무(命茂 : 파조의 증손) 자 미경(美卿)은 1681년(숙종 7)생. 1718년(숙종 44년) 무과에 올라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풍덕부사(豊德府使 : 경기도 개풍군)를 지냈다. 그리고 아들 여럿 중에 필수공(弼修公 : 14세손)이 1762년(영조 38)경 남하(南下)하여 고성 개천(价川)면에 이주(移居) 하였고, 손자 16세손 진보(晋輔 : 자 重老)는 1824년(순조 24)경 창원 진전(鎭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18세손 상일(相日, 考 琔渟)은 1894년 봄 반제, 반봉건의 기치(旗幟)를 들고 일어난 갑오농민(甲午農民)전쟁은 일본군의 탑압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농민군의 지도자들이 체포, 처형당하는 정세 아래 집안 사람이 이에 연루되자 세거지인 진전(鎭田)에서 지리산으로 도피하여 하동 횡천(橫川)에서 가계를 이었고, 아들 19세손 종수(鍾守)가 1920년경 사천으로 들어와 정동 풍정에 정착하니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문중대표는 20세손 순조(順祚)이고, 종손은 21세손 성구(成圭). • 문중분포 : 삼천포, 진주, 부산, 수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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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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