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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수원백씨(水原白氏) 별좌공파(別坐公派) (대산)   백씨(白氏)의 성원(姓源)은 문헌에 중국 황제(黃帝)의 후손인 백을병(白乙丙)의 후예라고 되어 있다. 백을병의 원손(遠孫) 백우경(白宇經)이 소주(蘇州) 출신으로 당(唐) 나라에서 첨의사(僉議事), 좌복야(左僕射), 사공(司空), 대사도(大司徒) 등을 지내다가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서기 780년(선덕왕 원년) 스스로 당나라를 떠나 신라로 건너와서 계림 자옥산(鷄林紫玉山)밑에 영월당 만세암(迎月堂萬歲菴)을 짓고 정착(定着)한 것이 우리나라 백씨(白氏)의 연원(淵源)이 된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신라 경명왕(917~924)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창직(昌稷)을 1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으며, 창직의 증손 휘(揮)가 고려 목종조(穆宗朝)에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져 수원 지방을 하사(下賜) 받았다. 이 후 1세조의 9세손 천장(天藏)이 원(元)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고, 고려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수성(隨城 : 수원의 고호) 백(伯)에 봉해졌으므로 본관(本貫)을 수원(水原)으로 하게 되었다.   수원백씨의 파계는 <백씨기해대동보(白氏己亥大同譜)>에 의하면 24개 파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임술대동보(壬戌大同譜)>에는 5개 파가 증가되어 모두 29개 파로 분류하고 있다.   한편, 백씨는 역사상 비교적 많은 인물(人物)을 배출하여 경기(京畿), 호남(湖南)과 관서지방(關西地方)에서 명문(名門)으로 알려져 왔으며 특히, 학문과 예술의 가문(家門)으로 더욱 빛냈다. 그 중에서 중조 1세의 7세손 문절공(文節公)의 아들 이정(頤正)은 안향(安珦)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충렬왕(忠烈王) 때에 연경(燕京)에 들어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을 처음으로 전파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문하생인 이제현(李齊賢)에게 한문을 전승시켜 후에 조선조(朝鮮朝)에 찬란하게 개화하였다.   중조의 16세손 인호(人豪)는 수성백(隨城伯) 천장(天藏)의 7대손으로 조선조에 세자사부(世子師傅)를 역임한 15세손 익견(益堅)의 아들이며 자는 사언(士彦) 호는 국재(菊齋). 진사(進士)로서 학행이 뛰어나 봉훈랑 사포서별좌(奉訓郞 司圃署別坐)로 천거되었으나 불취하였다. 성품이 순후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국화를 좋아하고 탈속적 취미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피하여 나주(羅州)에 가 있었고, 그 후 춘천(春川)에 은거하였는데 그의 시문집(詩文集)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로써 수원 백씨 29파 중에 하나인 별좌공파(別坐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그의 아우 인걸(仁傑)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문인으로 중조~선조 대의 명신(名臣)이요, 대표적인 학자로서 문경공파(文敬公派)의 파조이다. 또한 인호의 4촌인 인영(仁英)은 도승지공파(都承旨公派)의 파조(派祖), 인웅(仁雄)은 참봉공파(參奉公派)의 파조(派祖) 등이 모두 문장이 뛰어나 이른 바 <사백문장(四白文章)>이라고 하였다. 조선조에서는 주로 이들 4형제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수원백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별좌공(別坐公) 인호는 아들 네분을 두었는데 1자 유온(惟溫 : 자 仲和)은 음사(蔭仕)로 장단부사(長湍府使)를 역임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에 증직되고, 2자 유량(惟良 : 자 仲醇)은 진주 땅 배춘리(培春里 : 지금의 축동면 배춘리)에 살았는데, 증손 서한(瑞翰 : 20세손)이 높은 관직에 오름으로 해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고, 3자 유검(惟儉 : 자 仲約)은 여러 관직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이르렀고, 4자 유양(惟讓 : 자 仲謙 호는 玉溪)은 선조 때 병조참지(兵曹叅知),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다. 이로써 파조의 후손들은 17세대에서 1자 유온은 부정공계(副正公系), 2자 유량은 증정공계(贈正公系), 3자 유검은 좌윤공계(左尹公系), 4자 유양은 옥계공계(玉溪公系)로 다시 나누어졌다.   시조의 20세손 서한(瑞翰 : 자 季膺)은 증정공계의 증손으로 참판공(叅判公) 홍지(弘智)의 1남 5녀 중 외아들로 1613년(광해군 5, 萬曆癸丑)에 출생했다. 1645년 (인조 23) 을유식(乙酉式)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 겸 주사랑(籌司郞)에 제수(除授)되고, 1651년(효종 2) 남부주부(南部主簿),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거쳐 경주통판(慶州通判)에 나아갔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부상(父喪)을 만나 복을 마쳤으며, 1660년(현종 1) 내금위장(內禁衛將)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서 외직(外職)으로 장흥부사(長興府使), 전주영장(全州營將)을 지냈다. 1667년에는 또다시 모상(母喪)을 당하여 복을 마친 후 안동영장(安東營將), 부산첨사(釜山僉使)를 지냈고, 뒤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전라병사(全羅兵使)로 승진되었으며, 사복장(司僕將)으로 체임(遞任)되었다가 외직으로 다시 양주목사(楊州牧使)를 거쳐 1678년(숙종 4) 이후에는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이렇게 외관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수많은 치적(治績)을 쌓았고, 노수(老遂)하여 치사(致仕)한 후 귀향하여 한사(寒士)로서 여생을 마치니 향년 70세였다. 공은 사천을 빛낸 인물(人物)로서 이 사실이 읍지(邑誌)에 등재(登載)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묘소는 사천(泗川) 북면(北面 : 현 구암리) 퇴동(退洞) 임좌(壬坐)에 소재하고 있다.   입향조(入鄕祖) 24세손 동헌(東憲) 자 학견(學見)은 절도공(節度公) 서한(瑞翰)의 현손인데 조고(祖考)는 상주(尙柱)요 부조(父祖)는 사유(師裕)이시다. 할아버지께서 2백수십년 전 정동 대산(垈山)에 이주(移住) 정착(定着)하였다. 묘소는 대산 배방골 상광등(上廣嶝) 건좌(乾坐)에 있다.   29세손 효기(孝基)의 선고(先考) 남성(南成 : 자 宇日)은 을유생(乙酉生: 1885)으로 27세에 요절(夭折)하였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 창녕조씨(昌寧曺氏)는 부군(夫君) 남성이 병으로 신음(呻吟)하다가 갑자기 세상(世上)을 뜨자 그녀도 부사부수(夫死婦隨)의 의(義)를 따라 부몰(夫沒) 五일만에 묘소(墓所)에서 애통(哀痛)하게 몸부림치다가 하종(下從)하였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향인(鄕人)들은 그녀의 열행(烈行)을 감탄(感歎)해 찬미(讚美)하였고, 중앙성묘(中央聖廟)에 천고(薦告)하니 완의문(完議文)이 내렸다. 뒤에 향인(鄕人)들은 그녀의 정렬(貞烈)을 기리기 위해 모정계(慕貞契)를 모아 1942년 12월 창녕조씨(昌寧曺氏) 열행비(烈行碑)를 세우고 해마다 음력 3월 그믐날에 제향(祭享)하고 있다.   창녕조씨는 부군 남성과 같은 해인 을유생(乙酉生)이며 하종(下從)도 부군 따라 같은 해 신해(辛亥 1911)이니 나이 27세 때였다. 소생이 없었으므로 효기(孝其)가 출계(出系)하였다.   입향조 이후의 후손들이 7대째 세거해 왔으나 어느 문중과는 달리 손세가 빈약하여 겨우 가계(家系)를 이어올 따름이며, 문장(門長)은 30세손 성현(成鉉 : 보명 成權)이고 종손은 31세손 승호(承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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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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