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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죽산박씨(竹山朴氏) 충질공후(忠質公后) 철성백파(鐵城伯派) (고읍)   죽산박씨(竹山朴氏)의 시조(始祖) 휘(諱) 기오(奇悟)는 신라 시조왕(始祖王) 혁거세(赫居世)의 31세손으로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넷째아들인 죽성대군(竹城大君 : 彦立, 시조왕의 30세)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초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태보삼중대광(三韓壁上功臣 太保三重大匡)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죽주백(竹州伯)에 개봉(改封)되고, 죽주(竹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다. 따라서 죽주가 죽산(竹山)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本貫)을 죽산(竹山)으로 하고 세계를 계대하였다.   시조의 7세손(시조왕 37세) 정유(挺㽔)의 시호는 충질(忠質)이며, 고려 때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한 영후(永侯)의 큰아들. 예종(睿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경원판관(慶源判官)을 거쳐, 인종(仁宗) 때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가 지인주사(知仁州事 : 지금의 인천)에 좌천되었으며, 후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오르고 20여 년간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조리있는 논리로 조정을 견제했다. 왕의 신임을 받아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겸 태자좌빈객(太子左賓客)에 이러렀다. 그리고 아우 정혁(挺奕)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태부시소경(太府寺小卿)을 역임했는데 이로써 충질파(忠質派)와 소경파(小卿派)로 대별(大別)된다.   그후 죽산박씨의 파계는 12세를 전후하여 충질계(忠質系)에서 철성백<서>파(鐵城伯)<犀>派), 소경계에서 찬성공<훤>파(贊成公<喧>派), 문광공<전지>파(文匡公<全之>派), 태복경<의지>파(太僕卿<宜之>派) 등 4파로 나뉘고, 이들 후손에서 다시 여러파로 분파(分派)되었다. 이 중에서 철성백파의 파조 서(犀 : 시조는 16세)는 충질공 정유(挺㽔)의 증손으로 자는 양종(洋宗), 호는 죽계(竹溪)로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그의 조부 육화(育和)는 고려 명종 때 좌복야(左僕射 : 門下省 소속의 정2품)를 지낸 명신(名臣)이요, 아버지는 신종 때 유명한 학자로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인석(仁碩)이시다. 그는 고종 때 서북면(西北面) 병마사(兵馬使)로 몽고군이 대거 침입할 때 구주성(龜州城)을 사수하고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에 오르고 철성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에게 음성(陰城)과 고성(固城)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으니 음성박씨(陰城朴氏)와 고성박씨(固城朴氏)가 분적(分籍)하게 되었다. 고성(철성)박씨는 그를 중조로 하고 그 후 6백여년을 고성에 관적해 오다가 1839년(헌종 5) 예조(禮曹)의 승인을 얻어 죽산(竹山)으로 복관(復貫), 현재는 죽산박씨의 한 분파(分派)를 이루고 있다.   파조 서(犀)의 후예들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대대로 벼슬하니, 증손 빈(彬 : 시조의 13세손)은 고려 때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현손 혁충(奕忠. 14세손)은 이조전서(吏曹典書)를 지내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특히 파조의 6세손 보로(寶老, 一云 普老.15세손)는 1375년(우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서해도(西海道) 부원수(副元帥) 겸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왜구 격파에 수차 공을 세우고 서북면 원수 겸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승진했다. 그 후 서해도 조전원수가 되고, 1378년(우왕 4)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안주 상원수(上元帥) 겸 서북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고 경렬(敬烈)이란 시호가 내렸다.   16세손 전고(專古 : 초휘 世弼, 寶老의 2子)는 고려 말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우문관(右文館)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황주목사(黃州牧使)를 지냈으며, 아들 취신(就新 : 자 日敬, 17세)은 합천군사(陜川郡事)를, 손자 희굉(喜宏 : 就新의 3자 18세손)은 세조 때 젊은 나이로 영동현령(永同縣令)을 거처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오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으로 자헌대부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管)에 추증되고 고성군(固城君)에 봉해졌다. 또한 증손 식(埴 : 자 중재(仲載, 호 六軒. 시조의 19세손)은 1445년(세조 1) 무과에 등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에 이르렀으며, 1467년(세조 13) 길주인(吉州人) 이시애(李施愛) 등이 반란을 일으키가 이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지고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추증되어 시호는 충정(忠貞)이 내렸다. 이렇게 6대에 걸쳐 내리 봉군 또는 시호가 내려 명문(名門)으로서의 가문(家門)을 빛내었다.   시조의 20세손(시조왕으로부터 50세) 완(琬 : 자 而燦, 호 慕齊)이 성종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아들 21세손 천성(天星 : 자는 彩遠, 호는 逸庵)은 문과에 급제, 성종 때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을 지냈는데, 그 뒤 10대가 무현관(無顯官)으로 내려오다가 32세손 춘옥(春玉 : 자 仁瑞)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行龍驤衛)로 대를 이었다.   입향조 35세손(시조왕의 65세손) 봉운(鳳云 : 자 能煥) 할아버지가 110년 전 고성군 상리면 비곡리(比谷里)에서 入正東, 고읍(古邑)에 정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중대표(古邑)는 37세손 종실(鍾實)이며, 종손은 37세손 종국(鍾國)으로 부산(釜山)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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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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