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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밀양박씨(密陽朴氏) 평의공후(評議公后) 돈암공파(遯庵公派) (대산, 만마)   시조(始祖) 휘(諱) 언침(彦忱)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맏 아들로 경명왕이 여덟 왕자를 각기 분봉(分封)할 때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하고 밀성(密城)이 뒤에 밀양(密陽)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는데, 옛 지명을 따라 밀성박씨(密城朴氏)라고도 한다. 시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전설로만 밀양읍 영남루(嶺南樓) 광장에 있었다고 전해져오다가 1921년 여름, 심한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를 이루면서 영남루 북쪽 광장에 드러난 커다란 구덩이가 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해 밀성대군(密城大君)의 묘소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제단(祭壇)을 설치,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세계는 시조 언침(彦忱)의 8세손인 언부(彦孚)를 중시조(中始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언상(彦祥)을 중시조로 하는 도평의사공파(都平議事公派), 그리고 언인(彦仁)을 중시조로하는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등으로 대별(大別)되고, 각 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었다.   시조왕(始祖王)의 36세손이요, 밀성대군 언침(彦忱)의 8세손인 평의공(評議公) 휘 언상(彦祥)은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찬행(讚行)의 둘째 아들로 일명 언상(彦尙)이라고도 하며, 고려 원종(元宗 : 1259~1274) 때 도평의사(都評議事) 등을 지냈으며 뒤에 밀직군(密直君)으로 봉해졌다. 그래서 평의공파(評議公派)의 후손들은 이 분을 중조 1세로 받들며 옥천(沃川) 용방리(龍坊里)의 원덕사(遠德祠)에 제향되었다.   중조(中祖) 2세 양신(良臣) 소감(少監), 3세 진(眞) 감무(監務), 4세 인경(仁卿) 문림랑(文林郞), 의경(義卿) 창승(倉丞), 신경(信卿) 소감(少監), 5세 의경(義卿)의 아들 간(侃), 6세 치(穉) 찬성(贊成) 시(諡) 정절(靖節), 7세 동생(東生) 진사(進士) 유효행(有孝行), 8세 지번(枝蕃) 판도판사(版圖判事), 9세 흠(欽) 문림부(文林部) 그리고 10세 성술(聖術)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각각 지냈다.   11세손 자온(自溫)은 4세 의경(義卿)의 7대손으로 감찰공 성술(聖術)의 아들이며 호는 돈암(遯庵)인데 돈암공파(遯庵公派)의 파조(派祖)시다. 단종(端宗) 때 생원(生員)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뜻에 거슬려 세속(世俗)과 인연을 끊고 용퇴(勇退) 남하하여 처음에 태인(泰仁)에 숨어살았다. 그러다가 뒤에 의령(宜寧)의 도굴산(闍崛山)으로 들어가 움집을 짓고 편액(扁額)하기를 돈암(遯庵)이라 했는데 오로지 경사(經史)에만 열중하며 자오(自娛)하였다. 항상 족형(族兄) 돈재(遯齋)선생을 사모하여 백이 숙제(伯夷叔齊) 형제처럼 서산(西山 :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는 것보다 오히려 율리(栗里 : 陶淵明이 세상사를 잊고 살던 곳)의 풍의(風儀)를 본 받으며 살았다. 후에 나랏님이 선위(禪位)하여도 끝까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일생을 마쳤으며, 묘소는 도굴산(闍崛山) 임좌(壬坐)에 묻혔다.   13세손 연(淵)의 자 백원(伯源)으로 고(考)는 참봉 정(楨)이다. 성종(成宗) 때 진사(進士)로서 친몰(親沒) 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입사천(入泗川)하여 고읍(古邑)에 정착했는데, 당시 구암(龜岩) 이정(李楨)선생과 더불어 도의(道義)를 맺고 소요(逍遙)하여 시문(詩文)을 즐겼다. 이 분께서 돈암공파 후예의 입향조(入鄕祖)시다. 묘소는 현 축동면(杻洞面) 사다리(士多里) 유좌(酉坐).   14세손 문령(文齡)의 자 문절(文節)이며 호는 고은(湖隱)이다.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하고 성정(性情)이 강직(剛直)하였으며, 시서(詩書)에 능통(能通)하여 1574년 (선조 7) 문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 재직시 임진란이 일어나자 많은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록되고, 통정대부 이조참의(通政大夫吏曹叅議)에 추증되었다.   15세손 민탁(民擢, 자 擢夫)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선무랑(宣務郞)으로 행율봉도(行栗峰道 : 충청도 찰방도의 하나) 찰방(察訪)을 지냈다. 찰방이란 소정 지역내의 정역(程驛, 역로)을 순찰하여 역로(驛路)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정6품 동반(東班) 외관직(外官職)이다.   찰방공(民擢)은 슬하에 다섯분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개(楷), 차자는 식(植, 참봉), 3자는 무(茂), 4자는 근(根) 그리고 5자는 노(栳)이다. 이들 5형제는 5대계로 나뉘어져 대소문(大小門)을 이루는데 그 후예들은 사천(정동면 대산) 일원을 비롯하여 고성, 하동, 남해, 진주, 마산, 부산, 울산 등지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다.   17세손 천원(天遠)은 찰방공(察訪公) 민탁(民擢)의 손자로 고(考)는 노(栳)이며 자는 인숙(仁塾). 1654년(효종 4)생으로 향년(享年) 83수(壽)를 누리고 수직(壽職)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함(職銜)을 받았다. 묘소는 고성군 상리면 고봉 후산 임좌(壬坐).   23세손 정환(正桓)은 동추공(同樞公) 천원(天遠)의 6대손으로 부조(父祖) 관환(寬煥)의 맏아들로 자는 영서(英瑞), 호는 방은(芳隱). 1799년(정조 23)에 태어났으며 성품이 순후(純厚)하고 효우돈목(孝友敦睦)하여 자손들에게 늘 의(義)를 가르쳐 제가(齊家)하였다. 향년 85수를 누렸으니 수직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교지(敎旨)를 받았다.   입향조(入鄕祖) 연(淵)의 증손인 16세손 노계(栳系) 후손들의 인맥(人脈)을 보면 다음과 같다. • 25세손 순갑(珣甲) : 보명 갑수(鉀秀), 부산 천일정기화물 소장 역임 • 26세손 은수(溵秀) : 대산부락 새마을지도자 역임 문중 대표 • 26세손 위수(渭秀) : 보명 만상(萬相), 통영 장문초등학교 교감 • 26세손 문수(文秀) : 보명 만문(萬文), 서울 금남교회 목사 • 26세손 만구(萬九) : 사천시농촌지도소 지도사 • 27세손 정석(正碩) : 보명 정용(正容), 대산이장 역임 • 27세손 하용(夏容) : 부산 태광산업(주) 생산과장 • 27세손 남용(男容) : 서울 동아건설 과장 • 27세손 정본(正本) : 김해서 축산업협동조합 근무 • 27세손 성용(成容) : 적명 성민(成敏) 부산광역시 국세청 근무 • 28세손 균일(均一) : 일명 일성(一成), 종손(宗孫)으로 정동 대산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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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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