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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후(糾正公后) 오정공파(梧亭公派) (대산, 가곡)   시조왕(始祖王) 혁거세(赫居世)의 45세손이요,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忱)의 16세손인 규정공(糾正公) 휘 현(鉉)은 밀성군(密城君) 흥(興)의 아들로서 고려 중엽 문과에 급제,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을 거쳐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청백리(淸白吏)로서 세간의 칭송을 받았으며, 도학(道學)과 문장(文章) 또한 특출했다. 후로 연로(年老)하여 고향에 돌아와 87수(壽)를 누렸으며, 시호(諡號)는 무렬(武烈)이다. 그래서 규정공(糾正公)의 후손들은 공(公)을 중조 1세로 하고, 임실(任實)의 세덕사(世德祠), 옥천(沃川)의 원덕사(遠德祠)에 위패(位牌)를 봉안 제향하고 있다.   규정공(糾正公)을 중조 1세조 한 상계(上系) 선조(先祖)들의 사적(事績)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2세 문유(文有)는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리좌랑(典理佐郞)을 거쳐 경주판관(慶州判官)을 지냈고, 3세 사경(思敬)은 전법 판서(典法判書)겸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후 추성익위공신(推誠翊威功臣)에 책록되었다.   4세손 침(忱)은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 전의판사(典儀判事)를 지내고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세상을 개탄하며 우국의 세월을 보냈다.   5세손 강생(剛生)은 침(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자는 유지(柔之)요 호는 나산경수(羅山耕叟). 공양왕(恭讓王) 때 문과에 급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이르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408년(태종 8)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1417년(태종 17)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재직 중 서울로 교체되어 가는 과천현감(果川縣監) 윤돈(尹惇)의 전별연(餞別宴)에서 금천현감(衿川縣監) 김문(金汶)이 과음(過飮)으로 죽음으로써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 뒤에 다시 등용되어 세종 때 안변부사(安邊府使 : 함경도)를 지냈다. 죽은 후인 1424년(세종 6) 딸이 후궁(後宮 : 장의궁주)이 되어 1품(品)직에 추증되었다. 문장(文章)이 아름다워 문명(文名)을 떨쳤다.   6세손 절문(切問)은 부제학공(副提學公) 강생(剛生)의 둘재 아들로 태어났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7세손 중손(仲孫)의 자는 경윤(慶胤), 호는 묵재(黙齋), 백당(栢當), 시호는 공효(恭孝)로서 밀산군(密山君) 절문(切問)의 둘째 아들. 1435년(세종 17) 문과에 급제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를 거쳐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1435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을 도운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이 되고 대사헌, 공조, 이조, 형조, 예조의 판서(判書)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고 처음 응천군(凝川君)에서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8세손 미(楣)는 밀산군 중손(仲孫)의 둘째 아들로 1433년(세종 15)에 출생, 자는 자첨(子詹) 호는 존성재(存誠齋). 1458년(세조 4)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叅議)에 이르렀고, 그의 시문(詩文)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전해오며 <여지승람(輿地勝覽)>을 편찬하였다.   9세손 광영(光榮) 字 군당(君棠), 존성재 미(楣)의 다섯 아들 중 둘째 아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정언(正言), 지평(持平), 교리(校理), 병조와 이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528년(중종 23) 좌승지(左承旨),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고, 이듬해 정조사(正朝使)로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자손이 없는 맏형(義滎)의 훈작을 습봉(襲封)하여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지고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이렇듯 규정공(糾正公) 이후 상계(上系)의 선조(先祖)들은 대대로 문과 급제자를 내어 크게 현달(顯達)하였고, 또한 지체높은 명문(名門)으로서의 가문(家門)을 빛나게 하였다.   10세손 난(蘭)은 밀성군(密城君) 광영(光榮)의 셋째 아들로서 1495년(연산군 1)에 태어나 자는 양숙(養叔), 호는 오정(梧亭) 또는 풍수당(豊守堂)으로서 오정공파(梧亭公派)의 파조(派祖)시다. 모재김선생(慕齋金先生)의 문인(門人)으로 김하서(金河西)와 도의(道義)를 맺고 교유(交遊)하였다.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함경도 고원군수(高原郡守)를 지낼 때 수 많은 치적(治績)을 쌓았다. 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증직되고 밀평부원군(密平府院君)에 봉해졌다.   파조 난(蘭)의 맏아들 전한공(典翰公) 인원(仁元 字, 德初)은 1514년(중종9)생으로 뒤늦게 종제 근원(謹元, 叅判), 호원(好元, 戶判), 종질 계현(啓賢, 兵判) 등과 더불어 문과에 동방(同榜)하여 당세를 빛낸 인물들이다.   12세손 준현(俊賢, 호 壽軒) 이조좌랑(吏曹左郞), 13세손 안우(安佑, 호 育霽) 이랑(吏郞), 14세손 개원(凱源, 호 藥圃)은 참봉 그리고 15세손 진립(振立, 자 信攸)은 통덕랑(通德郞)이다.   파조 오정공(梧亭公)의 직계 14세손 개원(凱源)은 진립(振立), 진양(振陽), 진룡(振龍) 등 3형제를 두어 이 가운데 장자인 진립(振立)은 16세손 효근(孝根)과 효장(孝章) 형제를, 차자 진양(振陽) 또한 16세손 계중(啓重), 계발(啓發) 형제를 각기 두었다. 그리고 효근(孝根)은 17세손 호검(昊儉)을 낳고, 효장(孝章)은 만징(晩徵)을, 계중(啓重)은 영망(英望)을, 그리고 계발(啓發)은 영장(英章)을 낳아 17세에서 크게 4대계(大系)로 나뉘어졌다. 이 중에서 계중의 아들 영망계(英望系)가 가장 후손이 번창하여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입향조는 효근(孝根), 효장(孝章) 양계에서 효근의 아들 17세손 호검(昊儉 : 초휘 世儉, 자 汝敏, 通德郞)이 효장계(孝章系)보다 먼저 고성에서 사천으로 이주하여 정동 가곡(柯谷)에 정착하였다. 따라서 효장(孝章)의 증손인 19세손 효종(孝宗 : 자 重文, 永陵叅奉)은 함양에 살다가 입사천(入泗川) 하여 정동 대산(垈山)에 정착하였다. 호검(昊儉)의 묘는 객방(客坊) 마하곡(馬下谷) 해좌(亥坐)이며, 효종(孝宗)의 묘소는 고자실(古自谷) 두일산(斗一山)의 유좌(酉坐)이다.   이 후 두 입향조의 후손들은 경우 가계(家系)를 이어오다가 효장계(孝章系)의 23세손 재수(載秀 : 일명 載模) 할아버지가 아들 4형제를 두어 오늘에 이르기가지 그 손세(孫勢)가 40여호에 달하며 지금은 시대 변천에 따라 거의 연고지(緣故地)를 떠나서 경향(京鄕)각지에 산재하고 현재 정동 거주는 가곡, 대산에서 10여호가 거주하고 있다.   문중 대표는 다년간 대산마을 이장을 지낸 25세손 흥갑(興甲 : 일명 興圭)이며, 종손은 26세손 종운(鍾雲)으로 부산에 거주한다. • 24세손 두영(斗榮) : 보명 노중(魯重), 대산마을 동수 역임 • 25세손 흥갑(興甲) : 대산마을 이장 역임 • 25세손 명규(明圭) : 보명 명숙(明淑), 가곡 마을 이장 • 25세손 갑도(甲度) : 보명 삼규(三圭), 부산진경찰서 파출소장 • 25세손 시갑(時甲) : 보명 병규(丙圭), 원주 한일전자 생산과장(원주 우산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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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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