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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남평문씨(南平文氏) 강성군후(江城君后) 순질공파(純質公派) (소곡, 객방)   문씨(文氏)의 본관은 남평(南平)인데 남평문씨 외에 단성(丹城), 감천(甘泉 : 경북 안동지방), 정선(旌善), 강성(江城), 함평(咸平), 파평(坡平) 등 156본까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감천과 정선을 제외한 관향은 모두가 남평문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조는 신라시대 사람인 문다성(文多省)으로 현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에 있는 장자못(長淵)이 그의 발상지로 전해온다.   신라 자비왕(慈悲王) 15년(472) 당시 남평군주(南平郡主)가 장자못에서 봄놀이를 즐길 때 자색의 구름이 일더니 높은 바위 위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올라가 보았더니 돌로 된 함이 있고 그 속에 아이가 있었는데 함면에 <文>자가 씌여 있었다. 왕이 이 사실을 전해듣고 이는 하늘이 내려주신 옥동자라고 하면서 문씨(文氏)로 사성(賜姓)하고 궁중에서 양육케 했으며 왕실녀와 혼인시켰다. 그는 해안지방에 침략해오는 왜구 등 외적을 물리치는데 공이 많았고, 많은 제도를 쇄신하는데 앞장섰으며 대국사(大國師)로서 교육사업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   후에 대장군을 거쳐 삼중대광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匡三韓壁上功臣)에 오르고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남평으로 관적하였고, 무성(武成)이란 시호를 받았다. 바위 위에는 후손들이 <문암(文巖)>이라는 비석을 세워놓아 문씨의 시조의 탄강지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장자못(長者池)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른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 못가에 장연서원(長淵書院)을 세워 시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9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 문헌이 실전되어 대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문공원(文公元), 문공유(文公裕) 형제의 묘지명(墓志銘)에 의해 고려 충숙왕(忠肅王 :1095~1105) 때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낸 문익(文翼)을 중조 1세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중시조 휘 익(翼)의 시호는 경절(敬節)이며, 고려 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1098년(숙종 3) 좌우찬선대부(左右贊善大夫)를 거쳐 급사중(給事中)에 이르렀다. 이듬해 고주(告奏) 겸 밀진사(密進使)로서 원자(元子) 책봉을 청하려고 요(遼)나라에 다녀왔다. 1102년(숙종 7)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고, 이듬해 우산기상시에 올랐다.   중조의 12세손 익점(益漸,자 日新)의 호 삼우당(三憂堂),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고려 충숙왕 16년(1329) 강성현(江城縣): 현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에서 청도선생(淸道先生)으로 불리웠던 충정공(忠貞公) 숙선(叔宣)의 아들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급제하고 김해부사록(金海府司祿)을 시작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같은 왕 12년(1363년)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計稟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 이때 원나라 순제(順帝)가 공민왕의 배원책(排元策)에 대한 응징문제로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므로 좌정언인 그는 이를 극구 반대하다가 원제(元帝)의 노여움을 받아 3년간 교지국(交趾國 : 지금의 베트남)에서 귀양살이까지 하였다.   후에 그의 충성에 감복한 원제는 귀양살이를 풀어줌과 동시 예부시랑어사대부(禮部侍郞御使大夫) 벼슬을 주었다. 그는 귀국하면서 금수품(禁輸品)인 목화(木花)씨를 붓대 속에 넣어 가져와 장인인 정천익(鄭天益)으로 하여금 심게 하였다. 재배에 성공하자 씨앗, 물레 등을 만들어 널리 전파하여 우리나라 의복의 혁명을 일으켰다. 특히 공민왕 때 우문관 제학(右文館提學)에 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9년간이나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자 이태조(李太祖)가 친히 불러 벼슬에 등용시키려 하였으나 끝까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효행 또한 지극하여 왕의 특명으로 효자비(孝子碑)가 세워지고,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을 효자리(孝子里)라 명명하기로 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에도 밝았다. 조선 태종 때 그의 학행(學行)을 기리고자 참지정사 강성백(叅知政事 江城伯)에 봉해지고 부조묘(不祧廟)를 세웠으며, 1440년(세종 22)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어,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다. 남평의 장연서원, 산청의 도천서원(道川書院)에 제향되었다. 길 강성군 익점(益漸)은 아들 5형제를 두어 모두 실패없이 훌륭히 키웠는데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중에 큰아들 중용(中庸)은 고려 때 헌납(獻納)을 지냈고, 둘째의 중성(中誠)은 시호가 순질(純質)로서 예문각대제학(藝文館 大提學)에 추증되고, 셋째의 중실(中實) 또한 시호가 의안(毅安)으로서 고려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넷째의 중진(中晋)은 고려 때 지문하시중(知門下侍中)을, 다섯째의 중계(中啓,호 滄州)는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고 조선이 개국하자 은거했는데 시호는 성숙(成淑)이다. 이로써 5계파로 분파되었는데, 1자 중용(中庸)은 헌납공파조(獻納公派祖), 2자 중성(中誠)은 순질공파조(純質公派祖), 3자 중질(中質)은 의안공파조(毅安公派祖), 4자 중진(中晋)은 시중공파조(侍中公派祖), 5자 중계(中啓)는 성숙공파(成淑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이 중에서 순질공파(純質公派)의 파조인 중성(中誠)은 1385년(우왕 11) 5월 문과에 급제하여 한립원 학사(翰林院學士)가 되고, 합문지후(閤門祗候),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사직했다. 고려말 창왕(昌王)때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조선이 개국되자 1405년(태종 5) 강성군의 후예라 하여 나라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후에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에 추증되었다.   중조의 24세손 응상(應尙)이 전라도에서 살다가 배편으로 가족을 데리고 삼천포 동림동으로 이거 정착하였고, 이후 후손들은 고성 하일면 서지골에 살았다.   입향조는 30세손 덕손(德孫 : 호 백운당(伯云堂)이며, 관직은 부호군(副護軍)으로 조선 후기 정조조(正祖朝) 때 고성 하일면에서 입정동(入正東), 객방(客坊)에 이주 정착 하였다. 사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증직되었고, 묘소는 고성군 상리면 고봉리 후산 계좌(癸坐)에 있다. • 35세손 성규(成圭) : 문중대표로 소곡리 이장 역임, 현재 정동농협 이사 • 36세손 위상(渭尙) : 객방이장 역임 • 36세손 일근(一根) : 서울 보성연합철강(주) 근무(대리) • 36세손 위곤(渭坤) : 현대중공업 총무과 근무 • 36세손 위경(渭獍) : 전국 민속씨름대회 한라장사 타이틀 6회 획득 • 36세손 근갑(根甲) : 진주소재 동양화재보험(주) 근무 • 37세손 기석(杞錫) : 종손으로 (주)제주코오롱여행사 영업과장, 제주시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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