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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강릉김씨(江陵金氏) 모암공파(慕菴公派), 파주파(坡州派) (대산)   시조(始祖) 휘 주원(周元)은 김알지(金閼智)의 21세손으로 신라 제29대 태종무렬왕(太宗武烈王)의 셋째 아들 문주(文注)의 현손(玄孫)이요 각간(角干) 유정(惟靖)의 아들로서 혜공왕(惠恭王) 때 시중(侍中)을 지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통일신라의 태종무렬왕 김춘추(金春秋)의 6세손으로 혜공왕 13년(777년)에 이찬(伊湌)이 되었으며, 선덕왕(宣德王) 6년(785년)에 선덕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를 자식이 없어 군신(君臣)의 회의에서 주원(周元)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한다.   그가 입궐(入闕)하려 할 즈음에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 아니라고 즉위(卽位)를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내물왕(奈勿王)의 11세손 경신(敬信)이 왕으로 추대되었고, 비가 개이자 새로 추대된 원성왕(元聖王)이 그에게 왕으로 즉위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江陵)으로 가서 살았다. 이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탄복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고, 명주(溟洲 : 지금의 강릉), 익령(翼嶺 : 양양) 등 5군(郡)을 다스리게 하고 그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본관을 강릉(江陵)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현재 명주군 성산면(城山面) 삼왕리(三旺里)에 명주군왕(溟州郡王陵)이 있고, 같은 면 금산리에 명주군왕 고도기적비각(古都紀蹟碑閣)이 있다.   강릉김씨는 왕실의 후예인 만큼 신라조에서 귀족의 지위를 누려 왔으며 고려 중기 이후부터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고려조에서 가장 뛰어났던 인물은 시조의 10세손 문성공(文成公) 인존(仁存)이다. 그는 숙종(肅宗)때 시랑평장사(侍郞平章事)를지낸 문정공(文貞公) 상기(上琦)의 아들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선종(宣宗), 헌종(獻宗), 숙종 3조를 섬겨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중요한 나라일에 반드시 왕의 자문을 받는 등 국정에 큰 구실을 했다. 그의 아우 고(沽), 아들 영석(永錫 : 시조 11세), 영윤(永胤), 영관(永寬)이 모두 평장사에 올라 <3세 6평창(三世六平章)>으로 일컬어졌다.   20세손 천익(天益)은 고려 상원수(上元帥) 충절공(忠節公) 사혁(斯革 : 19세)의 둘째 아들로 1350년(충정왕 2)에 출생, 자는 겸수(謙受)요 호는 이곡(梨谷)인데 문성공(文成公) 인존(仁存)의 11세손이다. 어려서부터 형 송오공(松塢公 : 承露)과 더불어 학문을 좋아하여 정포은(鄭圃隱), 이목은(李牧隱) 두 현인(賢人)에게서 사사(師事)하여 학행(學行)이 뛰어나 문학이 고명(高明)하였다. 학문이 성취함에 이르러 출사하여 밀직대언(密直代言)으로 나아갔으며, 나라의 사정이 날로 변해감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전사(田舍)로 돌아왔다. 조선이 개국되자 태종(太宗)이 공의 절의(節義)를 알고 전서승(典書承)으로 불렀으나 어찌 망복지지(罔僕之志 : 조선의 신하가 되기 싫다는 뜻)를 버리겠는가 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또다시 부름을 받고 마지못하여 벼슬에 나가 병조, 공조판서(判書)를 역임하였고,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이임(移任)되어 54세 때 퇴관(退官)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향년 95세의 장수로 1444년(세종 26)에 졸했다.   파조 21세손 덕승(德承)은 판윤공(天益)의 외아들로 1373(공민왕 22)에 태어났다는데, 자는 자수(自修)요 호는 모암(慕菴)이니 강릉김씨 모암공파(慕菴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은일(隱逸 : 숨어 사는 학자로서 학문과 덕행이 높은 선비에게 임금이 특별히 벼슬을 내리는 것)로 집의(執義)에 제수되고, 세종 때 한산군수(韓山郡守)를 역임, 어진 정사를 베풀어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다. 벼슬에서 물러나 부모와 빙모(聘母 : 妻母)를 한집에 모셨는데 그 봉양함이 지효지성(至孝至誠)하였다. 특히 고(考) 천익(天益)이 95세까지 장수한 까닭도 그의 효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3친(親) 사후에도 생시와 변함없이 거여(居廬) 애모(哀慕)하며 종신(終身)토록 효도를 다했다. 향년 76세로 종년(終年)했는데 세종조에서 어제시(御製詩)와 함께 정려(旌閭)가 내리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이조참의(吏曹叅議)에 증직됐다. 묘소는 진천(鎭川) 문백면 평산리 해좌(亥坐).   파시조 이후의 후손들은 시조로부터 25세를 전후하여 각기 세거지에 따라 여러 파로 분파 되었는데, 종파인 모암공파(慕菴公派) 파주파(坡州派 : 창(琩. 25세)를 비롯하여 회와공파(晦窩公派 : 彦辛. 24세) 천안파(天安派), 도정공파(都正公派 : 謹言. 25세) 상산파(商山派), 참의공파(叅議公派 : 納言. 25세) 용인파(龍仁派), 좌랑공파(佐郞公派 : 洽. 24세) 연기파(燕岐派) 등으로 나뉘어졌다. 이중에 사천은 파주계(坡州系)의 후예이다.   입향조 37세손 진봉(振鳳)의 자 순선(舜宣), 호 수죽(繡竹)으로 36세손 경찬(卿瓚)의 맏아들로 경주(慶州)에서 출생, 파시조 모암공(慕菴公)의 직계 현손인 목사(牧使) 창(琩)의 13세손이다. 일찍부터 학문을 숭상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고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자적(自適)했는데, 함게 동문수학하였던 한 벗이 1870년경 사천현감(泗川縣監)으로 부임할 즈음, 그의 권유를 받아 책실(冊室)로서 동행하게 된 것이 입향의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동 대산(垈山)에 정착하고, 현감으로 하여금 선정을 베풀도록 옆에서 힘쓰는 한편 고을 주민의 훈도(訓導)와 후진 양성에도 진력하였다. 때문에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랐는데 일컬어서 경주(慶州)선생이라고 추앙하였다. 산소는 정동 장산리 244번지 건좌(乾坐). • 40세손 수래(守來) : 문중 대표이며, 독농가로서 소득 증대사업에 기여한 공으로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고, 공직에서 물러나 장산리 이장 역임 • 40세손 광래(光來) : 부산 범일동 우체국 근무 • 40세손 성래(城來) : 부산 제일종합고등학교 교사 • 40세손 종래(宗來) : 부산시 도로기획과 계장 • 40세손 동일(東日) : 정동농업협동조합 지도판매부장 • 종손 : 40세손 병래(秉來) : 부산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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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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