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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진주강씨(晋州姜氏) 은렬공후(殷烈公后) 정순공파(正順公派) (소곡)   시조(始祖) 휘(諱) 이식(以式)은 본래 중국의 예부시랑(禮部侍郞) 문성(文星)의 아들로서 수(隨)나라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을 때 정적(政敵)의 모함으로 고구려에 귀화했다. 고구려에서 도원수(都元帥)를 지내면서 앞서와 같이 용맹과 담력(膽力)이 뛰어난 명장으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시조 원수공(元帥公)의 호순인 중시조(中始祖) 민첨(民瞻)은 고려 목종(穆宗) 때 문과에 급제, 현종(顯宗 : 현종은 어린 유년시절 그의 아버지 왕욱(王郁)과 함께 사천에서 자랐던 임금) 때 같은 고향사람 시랑공(侍郞公) 하공진(河拱辰)과 함께 문무를 겸전한 충신으로 전 입상출장(入相出將)에 대표적인 인물이다. 1012년(현종 3) 안찰사(按察使)로서 영일(迎日) 등지에 쳐 들어온 동여진(東女眞)을 격퇴하였다. 1016년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고 1018년(현종 9) 글안(契丹)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쳐 들어오자 강감찬(姜邯贊)의 부원수(副元帥)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격파, 글안군이 개경(開京)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추격 자산(慈山 : 慈州)에서 대파하고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 공훈으로 응양상장군(鷹揚上將軍) 주국우산기상시(柱國右散騎常侍)가 되었으며, 상주국천수현개국남(上柱國天水縣開國男)이 되었다. 이듬해 금자흥록대부(金紫興祿大夫)에 병부상서 겸 지중추원사(兵部尙書兼知中樞院事)에 오르고 별세하자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은열공(殷烈公)이다. 진주시 옥봉남동의 개경향(開慶鄕)은 공의 출생지로 후손들이 사우(祠宇) 은열사(殷烈祠)를 세워 오늘가지 향화(香火)를 받들고 있다. 사당 건물은 경남도문화재 기념물 제1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이후 중시조로부터 6세에 와서 밀직공파(密直公派 : 元吉), 첨사공파(詹事公派 : 元鑑), 학사공파(學士公派 : 遠竄), 호부사공파(戶部事公派 : 元鐫), 사평공파(司評公派 : 元咸), 진사공파(進士公派 : 元益) 등 6대파로 크게 갈리어 대를 이어가다가 다시 여러 갈래로 분파(分派)되어 나갔는데, 이에 첨사공파(詹事公派)는 8세에서부터 17세 대를 전후하여 17파로 나뉘어지니 이 주에서 참사공(元鑑)의 5대손인 원발(元發 : 중조 11세)에 정순공파(正順公派)의 파조(派祖)이다.   파조 원발(元發 : 자(字) 渭伯)은 고려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순대부 판종부시사(正順大夫 判宗簿侍事)에 이르고, 삼중대광 전법판서 좌익공신(三重大匡 典法判書 左翼功臣)으로 추증되었다. 은열공의 직계 종파(宗派)의 현조(顯祖)로서 자손들이 번성하여 큰 벼슬이 많이 나왔다. 묘소는 진주 동쪽의 월아산(月牙山) 서편 용심동 중턱의 간좌(艮坐)이며, 도계재(陶溪齋)에 제향되었다.   12세 비(毖)는 고려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현풍감무(玄風監務)를 거쳐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청절(淸節)을 지키며 불사(不仕)하였다. 아들 13세 자경(自警)은 조선조에 이르러 비안현감(比安縣監)을 거쳐 내직으로 들어가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손자 14세 욱(勖 : 호 竹溪)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 田籍)을 지내니 추충좌익공신(推忠左翼功臣)으로 책록되고 문장이 뛰어났다.    15세손 안중(安重)의 자는 홍익(弘益)이요 호는 월촌(月村)인데, 죽계공(勖)의 세 아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세조 때 한림(翰林)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 敎理)로 승진한 후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로 나갔다. 1465년(세조 11) 임금이 속리산(俗離山) 온천에 행행(行幸)하게 되었는데, 이때 도사로 있던 그는 제사(梯事)란 당시 임금 행차길이 험한 곳에 가교(架橋) 또는 사닥다리를 놓으려 했으나 세조는 백성들에게 폐가 된다는 까닭에 이를 못하게 한 조처였다. 삼사(三司)에서는 그를 구명(救命)하기 위해 합계(合啓)를 올렸던 바 임금은 곧 형을 중지토록 명했으나 때는 이미 미치지 못하였다. 비명(非命)에 간 이날 그의 집에서는 검은 점점의 선지피와 같은 비가 뿌렸으니, 그의 충직하고 굳센 기운은 하늘도 감응(感應)한 소치라 하였다. 뒤에 세조는 공의 죽음을 애석(愛惜)하게 여겨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케 하였으나 불취(不就)하였다.   23세손 순황(舜篁 : 자 汝大, 호 圃齋)은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일찍부터 학문에 정독(精篤)하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친상(親喪)을 당해서는 시묘(侍墓)살이 6년을 어김없이 치루어 종제(終制)하였고, 특히 3년간 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고성군 구만면에서 살았는데 향년 84수로 타계하니 문집을 남겼다.   입향조(入鄕祖) 28세 문구(文九)께서 고성군 상리면에서 입정동(入正東), 소곡에 정착하였다. 묘소는 흥무산 기슭 금곡동 당산 오좌(午坐)에 있다.   29세 효봉(孝奉) 문중대표이며, 정동농협 감사를 역임하였고, 30세손 인순(仁順)이 종손(宗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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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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