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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진주강씨(晋州姜氏) 본관(本貫)과 파(派)   강씨(姜氏)는 문헌에 진주(晋州), 금천(衿川 : 경기도 시흥군), 안동(安東), 백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등 여러 본관이 전해지고 있으나 진주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진주강씨(晋州姜氏)의 지파(支派)로서 오늘날 모든 강씨는 진주를 단일본(單一本)으로 내세우고 있다.   시조(始祖)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의 무장(武將)으로, 서기 597년(고구려 영양왕 8. 신라 진평왕 19)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지성이 부족하고 충절(忠節)도 없다고 하면서 앞으로 고구려왕이 친조(親朝)를 소홀히 하여 예를 다하지 아니하면 고구려를 침공하겠다는 내용의 모욕적(侮辱的)이고도 위협적(威脅的)인 국서(國書)를 보내왔다.   이때 군신들을 모은 영양왕(嬰陽王)은 이에 대한 답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는데, 당시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던 강이식(姜以式) 장군이 ‘이같이 무례한 글을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답해야 한다’고 주장,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30만의 수나라 대군을 요동(遼東)의 임유관(臨楡關)에서 대파하였다. 그 후에도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1백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과 함께 수나라 대군을 크게 이겨, 다시 한번 그 기재와 용맹을 떨쳤다.   시조의 묘소는 고루려땅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뫼시니 지금 만주 봉길선 원수림 역전(滿洲奉吉線元帥林驛前)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대비(大碑)가 건립되어 있다는 사실이 족보에 명기되어 있을 뿐이다. 지금은 이역인 탓으로 1983년 진주시 상봉서동(上鳳西洞)에 봉산사(鳳山祠)를 건립하여 위패를 봉안,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강씨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중엽에 이르기까지 문헌이 실전되어 계보를 밝히지 못하고, 시조의 원손(遠孫)을 각각 중시조(中始祖)로 하는 은열공<민첨>파(殷烈公<民瞻>派), 박사공<계용>파(博士公<啓庸>派), 소감공<위용>파(少監公<渭庸>파), 시중공<원용>파(侍中公<遠庸>派), 그리고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의 아버지 궁진(弓珍)을 중시조로 한 인헌공파(仁憲公派) 등 5파로 분류되어 있다. 그중 박사공파는 계용(啓庸)의 손자 사첨(師瞻)이 어사(御史)를 지낸 까닭으로 어사공파라고도 하며, 시중공파는 원용(遠庸)의 손자 원로(元老)가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을 지내 관서대장군파라고도 한다. 또 인원공파는 강감찬(姜邯贊)의 출생지가 금천(衿川 : 지금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인 까닭으로 금천강씨(衿川姜氏)라고도 한다.   진주강씨는 고려 초부터 무용(武勇)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는데, 특히 은렬공파의 중시조 강민첨(姜民瞻)과 인헌공파의 강감찬(姜邯贊)은 다같이 고려조에서 크게 무훈(武勳)을 세운 명장들이다. 1018년(현종 9) 글안(契丹)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오자 강감찬 장군은 상원수(上元帥)로서 구주(龜州) 싸움에서, 강민첨 장군은 부원수(副元帥)로서 자주(慈州 : 慈山) 싸움에서 각각 우리나라 전사상 유례없는 대승을 거둠으로써 앞서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해동(海東)의 명장(名將)>으로 일컬어진다. 이들이 개선할 때 왕 현종이 몸소 영파(迎波: 義興)역에까지 마중나가 잔치를 베풀고 손수 술잔을 권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또한 진주강씨는 고려 말엽 이래의 영남벌족(嶺南閥族)으로서 역사상 많은 인물(人物)을 배출했는데, 조선시대에는 강서(姜筮), 강맹경(姜孟卿), 강구손(姜龜孫), 강사상(姜士尙), 강로(姜㳣) 등 5명의 상신(相臣)과 강백년(姜栢年), 강세귀(姜世龜), 강유후(姜裕後) 등 7명의 청백리(淸白吏), 그리고 문과 급제자 221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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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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