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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第1節 족보(族譜)의 유래   족보는 어느 나라나 처음에는 왕실의 계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왕대실록(王代實錄)>이니 <선원록(璿源錄)>이니 하여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각 씨족의 족보가 발달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에 대하여는 이를 명백하게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국의 한(漢)나라 시대부터 이것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 것 같다. 여러 가지 문헌에 의하면, 후한(後漢) 이후 중앙 또는 지방에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는 우족(右族), 관족(冠族)이 성립됨에 따라 문벌과 가풍을 중요시하는 사상이 높아져서, 이 때부터 보학(譜學)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문벌의 전성기인 위(魏), 진(晋), 남북조(南北朝)에 있어서는 제가(諸家)의 족보를 수집 심사한 뒤에 이것을 갑을(甲乙)의 문벌로 구분하여 세족(世族)이 아닐 경우에는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수(隋), 당(唐)에 이르러서는 문벌을 가리지 않고 학력과 인물을 주로 하는 과거제도가 행하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천거의 표준으로서 문벌을 도외시(度外視)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들어가면서 이제까지 관에서 정한 공적 성격을 띤 족보가 사적인 성격으로 변해 이때부터 족보의 기능이 관리 선발의 추천을 띤 족보가 사적인 성격으로 변해 이때부터 족보의 기능이 관리 선발의 추천 자료가 됐고, 동족의 <수족(收族)>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송대 이후의 족보는 곧 이와 같은 기능을 중심으로 민간에 널리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역시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의 형성으로 족보가 유행하였고, 신분에 따라 사회활동 및 출세의 제한은 말한 것도 없고, 문벌이 낮은 가문과는 혼인조차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만들게 된 것은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 형식을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족보의 편성, 간행을 촉진시킨 그 당시 사회의 특수한 배경과 성격을 도외시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권문귀족에 있어서는 이른바 족보의 체제를 구비한 세계(世系), 항렬(行列)의 방식을 취한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계도(系圖)에 의하면 같은 항렬에 있는 여러 인물이 같은 자근(字根)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당시 이미 계보에 고나한 관념이 일반화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문종 때에는 성씨, 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부책(簿冊)을 관에 비치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자의 신분 관계를 밝혔으며, 더구나 그 당시는 족보의 유행이 한창이던 송나라와의 교류도 빈번하였던 시대여서 족보의 유행은 하나의 필연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그것이 당시에는 출판 사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筆寫)에 의해 족보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국초부터 족보의 편성, 간행의 필요가 더욱 절실하여 급속히 진전되었다. 왕실 자신이 벌족정치(閥族政治)의 국가 형태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게 되었다.그래서 더욱 씨족 파별(氏族派別)로 가승(家乘)을 명백히 할 필요가 생겨, 족보가 없는 집안은 행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성행(盛行)하였고, 그 체계도 현재의 형태와 같이 완성되었다. 당시는 원시적 부족사회(部族社會)의 형태와 같은 동족의 집단부락이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붕당, 학파의 싸움이 치열하여 배타적 관점으로 인해 자연 동당(同黨), 동파(同派), 동족(同族)의 일치단결을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왕실의 계보록(系譜錄)이 중요시 되어 <서원계보(璿源系譜)>와 <종실보첩(宗室譜牒)>이 그 후 여러 차례 보수(補修)되었으면, 귀족, 권문에서도 수보의 기운이 싹트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어느 성씨의 족보가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한마디로 단언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최초에 간행된 족보는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족보가 알려지고 있다. 문화류씨 족보는 1522~1566년(중종17~명종 21) 가정년간(嘉靖年間)에 나왔기 때문에 이를 흔히 <가정보(嘉靖譜)>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여 내려온 족보 가운데 문헌적으로 오래된 것으로서 신뢰할 만한 것은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보(成化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성화보>는 성종 때(1476)인 명나라 헌종 성화(成化) 12년에 간행된 것으로, 문화류씨의 <가정보>보다 약 86년 앞선 셈이다. 안동권씨측의 말에 의하면 안동권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네 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흔히 <사시(四始)> 라고 한다. 그 가운데 우리 나라에서 족보를 가장 먼저 만들었다는 것을 첫째로 꼽고 있다. 그런데 문화류씨 <가정보> 서문 가운데는 가정보 보다 140년 전이 되는 명나라 영락연간(永樂年間 : 세종 5년 癸卯)에 이미 문화류씨 보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락보>가 과연 간행본(刊行本)인지 혹은 필사에 그치는 정도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여간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족보는 당시 계급사회의 산물로 안동권씨보, 문화류씨보 등이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라 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명족(名族)의 족보 출현이 다른 문중에서 족보를 만드는데 모형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고, 이러한 족보가 나오기 전에는 주로 필사에 의하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족보보다는 가첩(家牒)이나 가승(家乘)이 오히려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 후 족보는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란 때문에 많은 문헌들과 함께 소실되었고, 숙종 이후에야 다시 많은 족보가 쏟아져 나왔다. 그 당시에 소위 양반들은 특권층으로 대개 지주들이었는데, 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조직을 강화해야만 했다. 예컨대 서원(書院), 향약(鄕約), 향청(鄕廳), 두레, 계(契), 족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軍役)을 지는 등 사회적인 차별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양민이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 하고,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기도 하며, 뇌물을 써 가면서 족보에 끼려고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후 일제 치하에 있어서는 이민족(異民族)의 지배 때문에 학문(學問)이나 일반 사회문제의 연구보다도 관심이 동족결합에 쏠리게 되어 족보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매년 발행되는 각종 출판물 중 족보 발행이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 사회에서는 역사를 연구하고, 경제를 배우고, 문예를 즐기고, 사상을 연마하는 것보다 일문일가(一門一家)의 기록을 존중하는 것을 훨씬 더 중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발행한 <朝鮮の縣落> 후편에 의하면, 그 당시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인 발행의 단행본, 출판허가 건수는 1933년에는 861건, 1934년에는 1,090건이었는데, 족보의 발행 건수가 1932년에 137건, 1933년에는 151건에 달하여 한국인 간행의 출판물 중 족보의 발행이 항상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10개년간(1923~1932)의 족보 발행 회수를 본관(本貫) 성씨별로 따져 본다면, 일족이 가장 번영한 김해김씨(金海金氏)는 112회를 발간하여 연평균 11.2회로 수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밀양박씨(密陽朴氏)가 88회, 경주김씨(慶州金氏)가 69회, 전주이씨(全州李氏)가 68회, 경주이씨(慶州李氏)가 55회, 평산신씨(平山申氏)가 42회, 광산김씨(光山金氏)가 38회, 안동권씨(安東權氏)가 34회, 수원백씨(水原白氏)가 27회의 순위로 되어 있다. 족보는 인쇄에 의한 간행 이외에도 필사 또는 등사본(謄寫本) 등의 유포도 적지 않았을 것이란 점을 고려할 때, 당시 얼마나 족보 발행이 성행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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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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