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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節 우리나라 성(姓)의 유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우리나라 옛 사적(史籍)에 의하면, 고구려(高句麗)는 시조 주몽(朱蒙)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기 때문에 고씨(高氏)라 하고, 주몽은 그 신하 재사(再思)에게 극씨(克氏), 무골(武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黙居)에게 소실씨(小室氏)의 성(姓)을 사성(賜姓)하였다 한다. 백제(百濟)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扶餘系統)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扶餘氏)라 하였다 하며, 신라(新羅)는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성을 박씨(朴氏)라 하였으며 아울러 석씨(昔氏), 김씨(金氏) 등 삼성(三姓)의 전설이 있고, 제3대 유리왕(儒理王) 때에 경주(慶州) 육부인(六部人, 六村)에게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 등 소위 신라 6성이라는 것을 사성하였다 하며, 가야연맹체의 맹주격(盟主格)인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 수로왕(首露王)도 황금 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었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 문화를 수입한 뒤에 지어낸 것이다. 이러한 창성(創姓)과 사성도 대중화 되지 못하고 극소수의 특권층인 귀족계급(貴族階級)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요컨대 우리나라가 중국식 한자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르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고구려는 그 사용 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 없으나, 대개 장수황시대(419~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고씨(高氏)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 346~376) 때부터 여씨(餘氏)라 하였다가 무왕(武王) 때부터 부여씨(扶餘氏)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황시대(540~576)부터 김성(金姓)을 사용 하였다. 그러나 민중 전체가 성을 쓴 것은 아니었다. 먼저 왕실에서 사용하고 다음에 귀족 관료층에서 사용하였는데, <삼국사기>와 <당서(唐書)> 이전의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고구려는 고씨, 백제는 여씨, 신라는 김씨의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고, 그밖에 고구려는 을(乙), 예(禮), 송(松), 목(穆), 간(干), 주(周), 마(馬), 손(孫), 동(董). 연(淵), 예(芮), 명임(明臨), 을지(乙支) 등 10여종, 백제는 사(沙), 연(燕), 목(木), 협(協), 해(解), 진(眞), 국(國), 묘(苗)의 8족과 왕(王), 장(張), 사마(司馬), 흑치(黑齒) 등 10여종, 신라는 앞서의 3성과 6부의 6성 그리고 장(張), 요(姚) 등 10여 종에 불과하다.   신라의 경우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 : 561년 건립)에 성을 쓴 사람이 하나도 없고 또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아니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보면 귀족관료들도 다 성을 쓴 것은 아니었다.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람, 예를 들면 김인문(金仁問). 김정종(金貞宗), 박우(朴祐), 김지량(金志良), 김의충(金義忠) 등과 같이 사신이 되어 당나라에 갔다온 사람, 최치원(崔致遠), 최이정(崔利貞), 박계업(朴季業), 김숙정(金叔貞) 등과 같이 당나라에 유학한 사람, 장보고(張保皐)와 같이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청해진(淸海鎭) 대사가 되어 동양에서 제해권(制海權)을 잡고 당나라와 일본에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신라 말기 후삼국의 대동란을 당하여 평민으로서 각지에서 일어난 상주(尙州)의 원종(元宗), 애노(哀奴), 죽주(竹州-竹山)의 기원(箕原), 북원(北原-原州)의 양길(梁吉-良古), 태봉왕(泰封王) 궁예(弓裔)의 부장인 홍언(弘彦), 명귀(明貴), 후백제왕 견훤(甄萱)의 부장인 관흔(官昕), 상귀(相貴), 상달(常達), 능환(能奐),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부장인 홍술(弘述), 백옥(白玉), 삼능산(三能山), 복사귀(卜沙貴) 등 모두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이 중에 고려 태조의 부장인 홍술, 백옥, 삼능산, 복사귀는 고려 태조를 추대한 개국공신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의 초명(初名)으로서 각각 부계홍씨(缶溪洪氏), 경주배씨(慶州裵氏), 평산신씨(平山申氏), 면천복씨(沔川卜氏) 등의 시조가 되는데, 그들이 홍유, 배현경, 신승겸, 복지겸으로 개명한 것은 고려 건국 후 그들이 귀하게 된 뒤의 일이며, 아마 태조로부터 사성되었을 것이다. 고려 태조는 사성한 예가 많이 있다. 지금의 강릉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명주(溟洲)장군 순식(順式)이 귀순하자 태조는 왕씨(王氏)의 성을 주고, 신라인 김행(金幸)이 태조를 보필하여 권능이 많은 까닭에 권씨(權氏)의 성을 주어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가 되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개국한 뒤 목천(木川)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우(牛), 마(馬), 상(象), 돈(豚), 장(獐)과 같은 짐승의 뜻을 가진 글자로 성을 주었는데, 뒤에 우(牛)는 우(于), 상(象)은 상(尙), 돈(豚)은 돈(頓), 장(獐)은 장(張)으로 고쳤다는 설(說)이 있다.   이것은 어떻든 고려 초기부터 성을 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귀족, 관료 계급은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문종 9년(1055)에 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문종 시대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종 9년의 이 법령은 실로 우리나라 성의 한 시기를 긋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 민중이 다 성을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 중엔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씨족(氏族)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문종 이후에 성을 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려 중기인 문종 이후 성이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 등 천인 계급에 이르러서는 조선 초기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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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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