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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3.서 원(書院)   서원은 조선(祖先) 또는 선현을 봉사(奉祀)하는 사(祠)와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 성립된 것으로서 지방의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 연학수양(硏學修養)의 도장으로 관한인 향교에 대비되는 사립 중등학교라고 할 수 있다.그 기원은 중종 38년(1543)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곤양군수 역임)이 예말(麗末)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향리인 순흥(順興)에 그를 추념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데서 비롯된다. 그 후 후임 군수였던 이황(李滉)의 건의에 따라 명종 5년(1550)2월에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서원이 되었다.사액서원이란 국가로부터 편액(扁額)과 서적.노비.토지 등의 지원을 받는 서원을 말한다.이러한 서원들은 황폐화되어 가는 향교에 대신하여 국가의 지원을 받아 전국 각처에 설치되었다.그리하여 명종 이전에는 29개였던 서원이 선조 때에는 124개.숙종 때에는 한 도에만 80~90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이처럼 서원의 남설(濫設)은 양적인 증대만이 아니라 때가 흐름에 따라 ‘선현존경(先賢尊敬)과 후진장학(後進獎學)’이라는 설립동기도 쇄미해지고 일종의 특권적인 성격을 갖게 되어 지방사회를 침해하는 소굴이 되기도 하였다.유생들은 향교보다 서원에 들어가 강학수도(講學修道)하기 보다는 유식모의(遊食謀議)를 일삼고 중앙정계 붕당(朋黨)과 표리가 되어 당론에 급급하고 서원을 근거로 서민을 토색(討索)하는 악폐가 끊이지 않으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서원의 대정비 정책을 써서 전국 679개소의 서원 중 47개소만을 존치하고 모두 철파(撤罷)하였다.이와 같은 철폐 정비 정책으로 경남도내에 남게 된 서원은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鄭汝昌).진주의 창열사(彰烈祠:祠主 金千鎰).통영의 충열사(忠烈祠:李舜臣).거창의 포충사(褒忠祠:李述原) 등이었다. 서원 철폐 단행후 도내 4개 서원 이외는 재(齋).사(祠).초당(草堂).정(亭).대(臺).단(壇)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근년에 복원된 곳도 있어 현재 서원.사(祠) 등으로 이름을 전하고 있다.우리 고장에 유일하게 전해오는 구계서원(龜溪書院)도 위와 같은 과정을 겪었던 것인데 복원되기까지의 내력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조선조 명종 때 문신이자 유학자이신 구암(龜岩) 이정(李楨) 선생을 향사하기 위하여 건립한 이 서원은.이구암선생이 별세하고 40년이 지난 광해군 신해(辛亥:1611년)에 사천의 사람들이 선생을 추념하기 위해 처음 구산사(龜山祠)를 창건한데서 비롯되며.그 후 인조 23년(1645)에는 묘당 아래에 미수(眉叟)허목(許穆)이 근찬한 사적비(龜山祠碑)를 세웠다.그리고 숙종 2년(1676)4월에 사천사람의 소청에 의하여 ‘구계(龜溪)’라는 액호(額號)가 내려 비로소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경종 3년(1723)에는 충정공(忠貞公)김덕함(金德諴)선생을 연향(聯享) 하였다.그러다가 대원군 섭정 때 서원이 훼철(1868)된 후 오랫동안 향례를 올리지 못하다가 1899년에서 부터 구암선생이 생전에 거처하시던 대관대(大觀臺)에서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향례를 올렸고.대관대는 1901년에 중수되었다.이후 1928년에 이르러 대관대 유계(儒契)의 발의로 1931년 봄에 비로소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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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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