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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第 2 節 삼국시대의 교육(三國時代의 敎育)   우리 민족이 고대 국가로서 가장 먼저 발전한 것은 고구려가 아닌가 싶다.삼국 중 고구려는 북방에 위치한 만큼 그 어느 나라보다 일찍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자∙학문과 유학을 장려하고 승상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국초부터 문자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문자를 사용하고 그것을 편찬한 책을 유기(留記)라 한 것을 보면 일찍부터 한학을 수용한 것이 증명되고 있다.그리고 소수림왕(小獸林王)2년(372)에 처음으로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하니.이 일련의 역사적인 사실은 고구려인의 한자․학문의 교육이 국가적으로 수행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삼국사기≫에 고구려 “소수림왕 2년 하6월…… 입태학 교육자제(立太學 敎育子弟)”라고 하였으니 고구려에서의 관학(官學)의 설립은 서기 372년에 기원됨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백제 역시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섭이 잦았으므로 직접 그 문화를 받아 들여 자체의 문화 발달을 보게 되었다.그러나 백제가 망할 때가지 학교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다.그렇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고구려가 태학(太學)을 세운지 3년만에(375) 박사 고흥(高興)을 얻어 기록(書記)을 만들도록 했다고 전하고 있다.또 우리나라 사적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이보다 앞서 백제인 왕인(王仁)이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한 때가 서기 285년이니 박사 고흥을 얻기 90년 전의 일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백제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중국의 교육사상이나 교육제도를 몰랐을 리가 없다. 다만 학교를 세웠다는 기록이 없을 뿐이다.   끝으로 신라는 진한(辰韓)의 옛터에 조그마한 국가를 형성하였고 나라의 기틀이 잡히기 전부터 군사.산업.교통 등 모든 면에서 불리한 채 북방에는 강대한 고구려와 인접하여 위협받았으며.서방에는 부강한 백제와 맞대어 잠시라도 그 침략에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이러한 환경에 놓여진 신라가 그들과 버티어 생존해 나가자면 정신적으로 강력히 군론을 통일하고 국가의 의식을 가다듬음으로써 단결을 일층 굳게 하지 않으면 안될 절대성에서 독특한 교육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화랑도 교육이었다. 화랑은 원화(源花).국선(國仙).선랑(仙郞).풍월도(風月徒)라는 많은 이름을 가졌는데 이것이 조직화.형식화된 것은 신라 진흥왕 때 부터이다 화랑 집단의 조직은 그 총지휘자에 국선을 주었다. 그 다음에 덕망과 용의가 빼어난 청소년을 화랑으로 추대하고 그 밑에 랑도(郞徒:門徒)라는 이름으로 수백 혹은 수천명의 소년단원이 결속하였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전까지 화랑도 교육이 교육의 전부였고 멋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유교의 정치이념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고유의 화랑도 교육이 쇠퇴하게 되고 대신에 유교의 교육 이념에 따라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즉 신문왕 2년(682)에 이르러 국학(國學)을 세우고 예부(禮部)에 속하게 했다.국학의 교육 목적은 유교 사상을 연구․보급하는 유학의 전당으로서의 기능과 유교 이념에 입각하여 국학 관리의 양성을 위한 교육 기능으로 볼 수 있다.교육내용 역시 유교의 경전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하였고 그 밖의 것은 각과에 따르는 선택과목이었다.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과한 것은 신라의 국학이 수신.즉 수기(修己)에 치중하였음을 보여주며 유교의 지도 원리인 충․효 등을 신라의 지도이념과 일치시켜 보려고 한 데서 온 것이다.그러다가 국학이 완비하여 학문이 성하여짐에 따라서 점차 유교교육 자체가 관료화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체제면에서 보면 책임자인 경(卿)과 그 밑에 박사(博士)와 조교가 있어 학생들을 교수하고 사무관리를 두어 관리하였다.학생의 입학 신분은 귀족의 자제였고 연령은 15~30세까지였으나 수학 년한이 9년이었다.   그 후 국학은 경덕왕대에 이르러 태학감(太學監)으로 바뀌면서 그 기구가 정비․확충되었다.그리고 원성왕 4년(788)에는 일종의 과거법으로 볼 수 있는 독서삼품(讀書三品)출신과(出身科)를 정하여 인재 등용의 방법으로 삼았다. 이것이 후세의 과거법의 전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로써 보면 신라의 인재 등용법은 삼국통일 이전가지는 화랑도 교육으로 인물 본위의 교육 제도를 채택했으나 통일 이후에는 국학의 교육이념이 연구․보급됨에 따라서 일종의 학벌본위․시험본위의 교육 제도로 진행되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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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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