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第 9 節 대한민국시대(大韓民國時代)   광복의 기쁨은 잠시뿐 1945년 8월 25일 연합군사령부는 미‧소 양군이 38도선을 경계하여 분할통치를 발표함으로써 조국은 분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남한에서는 9월7일에 미군정청(美軍政廳)이 설치되어 미군정이 시작되었으며.북한은 역시 8월 24일 평양에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런 가운데 유엔총회는 1947년 11월 14일 한국의 총선거안과 정부수립후 양군의 철수 안을 가결하고 1948년 1월8일에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내한하여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소련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부득이 1948년 2월16일 남한에서만 한국위원단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역사적인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당시 사천군은 단일선거구로 당선자는 곤명면의 다솔사(多率寺) 주지출신인 최범술(崔凡述) 후보가 당선되었다. 5.10 총선 결과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동년 5월 30일 국회를 개원하고 의장에 이승만(李承晩)이 당선되었다.   국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고 헌법초안을 기초하여 동년 7월17일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7월20일 정‧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가. 부통령에는 이시영(李始榮)씨가 당선되었다.8울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함과 동시에 미군정은 폐지되었으며.동년 12월12일 열린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전 해인 1947년 4월1일 정동초등학교에 이어 면내에선 두 번째로 신월(新月)초등학교를 짓고 개교하였다.   1949년6월21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7월4일에는 지방자치법이 공포되어 8월15일부터 시행되는 등 외관상의 모양새는 갖추어져 가고 있었으나 좌익계는 북쪽의 지령에 따라 암암리에 활동을 전개하여 전국이 좌‧우익으로 나누어져 심한 갈등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의 경제적 사정을 살펴보면 다수 실업으로 인하여 국민생활은 궁핍해졌고 특히 군수경제체제(軍需經濟體制)로 생필품의 생산이 극히 미진하여 절대량이 부족하였으며.농업에 의존한 경제는 흉년으로 식량기근까지 겹쳐 사회 전체가 혼란하였다. 이 시기 본면 지역민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생명을 이어가는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최인호(崔寅浩)면장 당시 본면 재정의 어려움이 많았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전답을 방매하여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도 하였다.

  초대 국회가 임기 2년으로 만료되고 1950년 5월 30일에는 2대 국회의원선거가 정부의 자주적 관리집행으로 실시되어 양당과 무소속이 다수의석을 차지하였다.   본군에서도 16명(2명은 도중에 사퇴)의 후보가 난립하여 가두연설.가두시위(택시.화물트럭).신문을 이용한 선전벽보 등 치열한 선거전을 벌인 결과 무소속의 정헌주(鄭憲柱)후보가 당선되었다.(본면에서 입후보한 崔浩卿후보는 사퇴)이 같은 선거 결과는 당시 여당인 국민회(國民會)정부가 미군정이 남긴 정치‧경제적 난국을 완전히 수습치 못하였고.일제 잔재의 마무리가 미온적이었으며.아무런 대책도 없이 북진통일(北進統一)만 외친 결과에 기인된 것이었다.   이즈음 주한미군 철수와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변경 설은 한반도에서 힘의 공백 현상이 초래되어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북한 공산군의 남침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북괴군의 공격을 받은 남한은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전국이 거의 북괴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따라서 정부도 6월 27일 대전으로. 7월 16일에는 대구로.8월 18일에는 부산으로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1950년 7월31일 진주와 사천을 점령한 북괴군(사단장 方虎山)은 부산의 서쪽 관문인 마산을 점령하기 위해 진동(鎭東)지역가지 진출하였으나 아군의 강력한 방어 작전으로 적은 여기서 한 발짝도 더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당시 대구 일대에 집중된 적의 압력이 강화되므로 이곳을 사수하기 위하여 적의 병력을 서남부로 분산시키고.나아가서 진주‧사천을 탈환하여 전세를 반전케하고 진주‧사천 일대를 방어선으로 구축하여 부산 교두보(橋頭堡)를 안정시킬 목적아래 역공격의 양동작전을 시도하였다.<킨(kean)특수작전> 이 작전은 아군과 미군의 합동작전으로 8월 7일에 개시되어 고성을 수복하고.진주‧문산 고개까지 다달았고.일부는 8월 12일 국도 33호선을 따라 본면 장산리까지 진출하여 이곳 노천(용소산)에서 국군 해병대 및 미 제35연대와 적 6사단15연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결국 이 작전이 비록 진주‧사천을 탈환하지 못하였지만 적 6사단의 예봉을 꺾어놓아 마산을 지킬 수 있었던 숨은 전과였다. 동란으로 인한 본면의 직접적인 피해는 민간인 10여 명의 희생자를 냈을뿐 아니라 민가 수십 채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유엔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고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는 등 총반격전을 편 아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고.10월 평양을 탈환하였으며.10월 25일 중공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26일 압록강변의 초산(礎山)까지 도달하였으나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의 총 공격으로 1951년 1월4일 이른바 1.4후퇴라는 쓰라림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1월22일 전면 반격개시에 이어 1월16일 해병대에 의한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후 2월10일 서울 재진입이 있었으며.3월14일에는 서울을 재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3월24일에는 <맥아더>유엔군사령관에 의하여 이북진격 명령이 내려졌고.25일에는 38선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1951년 12월 1일에는 부산.대구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며.12월 2일부터는 공비토벌 작전이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정국(政局)이 불안정한 상태에서도 1952년 4월 25일에는 임기 4년의 초대 면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었으며.본면에서도 3개의 선거구에서 11명의 면의원이 선출되어 면의회가 구성되고 초대 의장에 최충민(崔忠敏:풍정)씨가 선임되었다. 1952년 6월 본 면민의 숙원이던 사천농업고등학교(현 경남자영고등학교)가 화암리에 개교되어 면내는 물론 군내 청소년의 고등교육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休戰協定)이 조인되고 8월 15일에는 부산에 있던 정부가.8월 16일에는 국회가 환도(還都)하여 제자리를 잡고 국정을 보게 되었다.   1956년 2월 21일 학교법인 동성학원(東城學院)의 설립으로 동성중학교(63.12.13 사천여자중학교로 명의 변경)가 개교되었다.   1956년 8월8일에는 시‧읍‧면장 직선제 선거법이 개정됨에 따라(1956.2.13)제2대 면의회 의원선거와 면장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면의회 의장:崔羽震(수청).면장:崔先敏(수청)> 1956년 11월 16일 사천경찰서 정동지서가 삼천포경찰서 정동지소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1958년 12월에는 시‧읍‧면장의 직선제를 임명제로 고쳤다가 1960년 11월1일에는 각급 지방자치단체장(各級地方自治團體長) 및 이‧동장(里洞長)을 임기 4년의 직선제로 개정하여 12월 19일에 제3대 면의회 의원선거 (면의회 의장:宋在基)와 12월 26일에는 면장선거가 실시되었으나(면장:崔甲大)9개월 후인 1961년 9월1일 자로 읍‧면자치제를 폐지하고 군(郡)을 최하위(最下位)의 자치단체로 고쳤다.(1961.5.16 군사혁명에 의해 생긴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함) 1959년9월17일의 태풍 사라호와 1963년 6월20일의 샤리호태풍의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는데. 당시의 폭풍우와 홍수의 범람으로 사천강의 둑이 무너져 사천평야의 침수는 물론 많은 재산(농작물.가옥.가축)을 잃기도 하였다.   1962년1월1일을 기하여 국가의 공식연호(公式年號)를 단기(檀紀)에서 서기(西紀)로 변경하였으며.동년 1월13일에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성안(成案)되어 조국근대화(祖國近代化)작업이 시작되었다. 동년 9월 24일에는 보건소법(법률 제 1160호)이 공포되어 1963년 1월1일을 기하여 사천군보건소 정동면보건지소가 설치되어 면민의 보건향상과 증진에 기여하게 되었다.

  1966년 4월1일 별정직 정동우체국의 개국으로 전화(電話)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면내 체신업무를 맡게 되었다.동년 3월30일에는 정동1차(풍정리.화암리의 일부)농경지 59.00ha의 경지정리(耕地整理)가 완공되었고. 1967년 5월30일에는 정동 2차(화암리.고읍리의 일부)72.79ha의 공사가 완공되었다.   1968년 1월 21일 31명의 북괴 무장게릴라가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서울세검정(洗劍亭)까지 침입한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동년 4월8일 국방력의 강화와 “싸우면서 일하고.일하면서 싸운다”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다. 이에 따라 면내 청년들에게 “내 고향은 내가 지킨다”는 향토방위의 정신으로 정동면향토예비군대(면대)가 창설되었다.   19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으로 전국 16.602개 이동에 107억원이 지원되었으며.이때 본면에서도 마을회관 건립 또는 보수를 비롯하여 지붕개량사업.골목길 넓히기.농로개설 등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특히 본면은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이 하나의 정책으로 펼쳐지기 이전부터 그와 비슷한 성격의 잘살기 위한 주민자발의 운동이 일었던 것이다.   1971년 8월에는 정동리동협동조합(正東里洞協同組合)을 합병(合倂)하여 정동단위농업협동조합을 설립하였으며.1972년 12월15일에는 유신헌법(維新憲法)이 제정(72.11.24)된 개헌에 따라 임기 6년의 통일주체국민회의(統一主體國民會議) 대의원(代議員) 선거가 있었는데. 본면에서는 최홍민(崔泓敏)씨가 당선되었다.이에 앞서 동년 8월에는 고읍리의 잔사업(殘事業) 51.09ha의 농경지가 경지 정리되어 이로써 사천평야는 명실상부한 기계화영농의 터전으로 탈바꿈하였다.   1974년 12월에는 사천군농촌지도소 정동지소(94.4 정동면농민상담소로 개칭)가 개소 되었고. 1978년 5월 18일에는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있었는데.본면은 김하곤(金河坤)씨가 당선되었고. 1981년 2월 11에는 대통령선거법에 의한 대통령선거인단 선거가 실시되어 정원 2명의 김하곤씨.최정경(崔正卿)씨가 선출되었다. 80년대 들어 수도작답(水稻作畓) 경지정리사업이 연차적으로 진행되어 학촌리의 60.00ha(81.5.30),대곡‧수청‧풍정리의 42.00ha(85.4.3).노천‧대산의 54.67ha(88.5.3)가 모두 완공되어 군내 어느 곳보다 좋은 농사여건을 갖추게 되었고.수리시설로는 17개의 크고 작은 저수지.사천강 곳곳을 막은 보(洑)19개.양수장 6곳 등이 설치되어 면내 전 벼논의 90%가 수리안전답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경지 정리가 빨리 이루어진 탓에 농기계의 보유 대수도 비교적 많아 군내에서 기계영농의 선진지로도 꼽히게 되었다.

  1980년 12월에는 면내를 관통하는 연장 10km의 국도 33호선(사천~고성간)이 확장‧포장되었고.1985년 5월 23일에는 정동면청사(철근 콘크리트조 슬라브집 2층 167평)가 준공되었으며.1988년 8월에는 제24회 ‘88 서울올림픽대회의 성화(聖火)가 분면을 거쳐 고성으로 봉송되었다.   1991년 3월 26일 전국 시읍면의회 의원선거(60.12.19)가 실시된 이래 30여년 만에 군의회 구성을 위한 지방자치 선거가 실시되어 군의회 의원에 이연식(李蓮植:화암리)씨가 당선되었다.   1993년 12월27일 경상남도 사적(史蹟)으로써 예수리의 서낭당산성(城隍堂山城)7필지(64.827m)를 경남도문화재 기념물(記念物) 제 132호로 지정하였다.   1994년 11월 본면 소곡리 가곡에서 사남면 사촌리를 잇는 전장 2.5km의 산복도로(山腹道路) 개설계획에 따라 1차로 1.3km가 완공단계에 이으며.잔사업인 1.2km공사가 조속히 완공되어 명실상부한 산복도로의 개통을 갈망하고 있으며.본면의 동부 산악지역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육로를 통한 사천시(삼천포)생활권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1995년 5월10일에는 도농(都農) 통합(법률 제 4948호)에 따라 1956년 7월8일 이래 분리된 구삼천포시(舊三千浦市)와 구사천군(舊泗川郡)이 다시 통합되어 사천시로 출범하였으며.이로써 1읍7면10동331통리를 관할하게 되었다.이에 따라 사천군 정동면이 사천시 정동면으로.삼천포경찰서 정동지서는 사천경찰서 정동파출소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동년 6월27일 광영자치단체장.광역의 회의원.기초단체장.기초의회의원의 4개 지방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어 이중에 사천시장에는 하일청(河一淸)후보가 당선되었고.시의회 의원에 정상동(鄭相東:부의장.대곡리)씨가 무투표 당선되었다.   1996년 3월29일 정동농업협동조합의 종합청사(총건평450평)가 준공되어 약진 정동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