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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第 8 節 일제시대(日帝時代)   일제(日帝)는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하여 서구화 내지 근대화하면서 국력을 신장하기 시작했다.이로써 1876년에는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에 상륙하게 되었으며.한· 일 의정서(1904)에 의한 내정간섭.제1차 한일협약(1904)에 의한 고문정치(顧問政治)로 그 지배권을 장악한 후 1905년에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여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을 하여 우리의 주권을 탈취해 갔다.   한일합방능약(勒約)으로 대한제국을 강점(强占)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朝鮮)으로 개칭하고 통감부 대신 총독부(總督府)를 설치하여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시작하면서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도장관(道長官)으로 칙임(勅任)하고 부(府).군(郡)의 부윤과 군수를 주임(奏任)으로 하며.면(面)의 면장을 판임(判任)으로 하는 지방 관제를 공포하였다.   그리하여 합병당시 13도(道) 12부(府) 317군(郡)이었던 행정조직이 동년 9월 총독부 지방관제에 의하여 종래 법적근거가 없던 면이 군의 하부 행정단위로 됨에 따라 전국에 4322개의 면이 생겨났다.   1914년 3월 1일 구(舊) 조선의 지방행정 구역을 대수술하여 폐합축소(廢合縮小)를 단행함에 따라 동년 4월 1일을 기하여 대폭적인 폐치분합(廢置分合)을 실시하였는바.이로써 전국이 13도 12부 220군 2521개면으로 개편되었다.(府命 제111호:1913.12.29) 이때 사천군(泗川郡)은 곤양군(昆陽郡)과 통합 조정됨에 따라 곤양군하의 10개면중 금양면(金陽面)과 서면(西面)은 하동군에 넘겨주고.나머지 8개면은 곤양면(昆陽面).곤명면(昆明面).서포면(西浦面)으로 축소시켰고.진주군(晋州郡)의 축곡면(杻谷面)과 부화곡면(夫火谷面)을 편입시켜 지금의 축동면(0洞面)으로 개칭하였다.따라서 종전 사천군의 군내면(郡內面).상주내면(上州內面).동면(東面).상서면(上西面).하서면(下西面).근남면(近南面).중남면(中南面).하남면(下南面).북면(北面).수남면(洙南面).문선면(文善面) 등 11개면이 읍내면(邑內面).읍동면(邑東面).읍서면(邑西面).읍남면(邑南面).남양면(南陽面)등으로 개칭되어 모두 11개면이 사천군 산하면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고성군 상리면의 가슬리(歌瑟里)가 본면 지역으로 편입되어 종전의 상주내면(上州內面)과 동면(東面)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사천군 읍동면(邑東面)이라 고쳤다.

  이때 상주내면의 11개 동리(洞里)와 동면의 16개 동리를 10개리로 개편하고 면의 소재지를 고읍(古邑)에 두었다. 이의 10개리는 다음과 같다. • 고읍리(古邑里):상주내면 고읍∙동계동(東溪洞) 일부 • 예수리(禮樹里): ″ 예수∙반룡(盤龍)∙반곡(盤谷)∙동계동 일부 • 화암리(花巖里): ″ 화암∙옥정(玉井)∙군내면 선인동(宣仁洞)일부 • 풍정리(豊井里): ″ 신풍(新豊)∙상정(上井)∙여흘(如屹)∙옥정동 일부 • 수청리(洙淸里): ″ 수청동 • 대곡리(大谷里):동면(東面) 대곡∙신계동(新溪洞) • 장산리(獐山里):동면(東面) 장천(獐川)∙대산(垈山)∙건점(乾占)∙배방(排房)∙복상동(伏象洞) 일부 • 감곡리(甘谷里): ″ 감곡∙수리(守里)복상동 일부 • 학촌리(鶴村里): ″ 고자(古自)∙만마(萬馬)∙이동(梨洞) • 소곡리(所谷里): ″ 금곡(金谷)∙신월(新月)∙객방(客坊)∙가곡동(柯谷洞)   1915년 3월 20일에는 민적법(民籍法)을 개정하여 호적사무를 면장에게 이양하였고.1916년 1월 24일에는 호구조사(戶口調査) 규정을 공포하였으며.1917년 6월에는 면제(面制)를 공포하고 면은 교육 사무를 제외한 관내의 공공사무를 처리 관장하며 특별부과금과 수수료.사용료 등의 징수권을 부여했다. 1911년 6월에는 군내 최초로 사천공립보통학교(私立明達學校의 후신)가 당시 군청소재지인 사천읍내에 개교되어 인접한 면내 청소년들의 신문화사조(新文化思潮)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1918년에는 종래의 헌병(憲兵)과 경찰(警察)의 규합제도에서 분리하여 경찰행정이 독립하게 되자 사천경찰서로 개칭하고 각 면단위로 경찰관 주재소(駐在所)를 설치했다.이때 본면의 주재소는 지금의 노천(魯川)부락에 두었다.   조국이 일제에 강점(强占)된지 10년이 되는 1919년 3월1일 경성(京城:서울)의 태화관(泰和館)에서는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가 선포되고 파고다공원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기 시작하였다. 특히 3월3일 광무제(光武帝:高宗皇帝)의 국장일(國葬日)을 계기로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23.098명이었고 총 집회 수는 1.542회에 이르렀으며.211개 군이 호응하였다.사천군에서도 11회의 집회에 3.300여명이 참가하여 사망자 3명을 포함.60여 명이 옥고(獄苦)를 치루는 피해를 입었다.한편 중국으로 망명한 지도자 30여 명은 4월 10일 상해(上海) 금문신로(金門神路)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으며.4월 14일에는 미국의 교포들이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고 대한독립 축하행진을 가졌다.

  3.1운동은 일제의 군중탄압과 발포(發砲)화살로 실패로 돌아갔으나 우리의 자주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일제도 무단정치를 문화정치(文化政治)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20년 7월 면장의 자문기관으로 면협의회(面協議會)가 신설되고 의장인 면장 외에 8~14명의 협의의원을 두는 면제를 개정하였다. 협의회 의원은 군수가 임명하였으며.임기는 3년의 명예직이었다. 이 무렵 즉 1920년을 전후하여 면내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연장 10.402m(사천읍 수석리~본면 소곡리)의 고성~성산선(국도 33호선)이 개통되었으며. 이는 1919년 3.1운동 이후 도로의 증설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1931년에는 1918년이래 삼천포면(洙南面과 文善面)이 읍(邑)으로 승격하였으며.아울러 읍동면을 지금의 정동면(正東面)으로.읍내면을 사천면(泗川面).읍서면을 사남면(泗南面).읍남면을 용현면(龍見面)으로 각각 개칭하였다.이해 9월에는 1면1교(一面一校) 시 책에 따라 정동공리보통학교(현 정동초등학교)가 설립되어 면내에선 처음으로 신문화사조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1934년에는 최도경(催道卿)면장 당시 종전 고읍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대곡리숲으로 옮겼으며. 곧이어 대로변인 현 위치로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이에 앞서 노천부락에 있던 정동경찰주재소가 대곡리의 현위로 이전.이로써 대곡리는 면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9년 7월에는 면단위 경방단(警防團)이 조직되어 경찰보조기관으로 활용되었고.10월1일에는 국민징용제(國民徵用制)를 실시하였는데 이로부터 광복(光復)이 될 때까지 45만 명의 장정들이 일본으로 징용되어 만주.중국 등지에서 강제 군역을 치루기도 했다.본면에서도 많은 청년들이 징용되었으며. 특히 사천 군용비행장(泗川軍用飛行場)의 건설로 많은 장정들이 동원되어 노역에 혹사당하기도 하였다.   1940년 2월부터 전국민에 대하여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기 시작했고.10월 부터는 조선정신동원연맹(朝鮮精神動員聯盟)을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으로 개편하여 황국신민화운동(皇國臣民化運動)을 본격화 하였다.   국민총연맹을 결성한 일본 제국주의는 1941년 농산물 공출제도(供出制度)를 강제로 시행하여 농산물을 강제로 빼앗아 가더니 그해 12월 8일에는 진주만 폭격(眞珠灣爆擊)을 단행.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12월 9일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광복군과 연합군이 연합하여 대일본전(對日本戰)에 참전하였다.

  한편 일본은 1942년 1월 14일 조선군사령(朝鮮軍事令)을 공포하고 4월 7일에는 육군 특별지원병 검사를 실시하는 한편 동년 11월 20일에는 조선징병제도(朝鮮徵兵制度) 실시요강을 결정하였으며.1943년 3월 1일에는 징병제를 공포하고 동년 10월 20일에는 조선 학생의 징집유예를 폐지함과 동시에 학병제(學兵制)를 실시.우리나라 청년들을 본격적으로 전쟁터에 내보내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하였으나 전세(戰勢)가 불리해진 일본 제국주의는 1944년 2월 8일부터는 징용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여 총독부에 학생동원본부를 설치.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면 동원할 수 있는 규정을 공포하고는 7월1일부터 1개월 동안 무려 145.644명을 강제 동원하여 제국주의의 제물로 삼았다.   전쟁으로 다급해진 일제는 1944년 6월3일 미곡(米穀) 강제공출제를 실시하더니 급기야는 가정의 식기.대접.수저.등 놋쇠는 물론 쇠붙이란 것은 모조리 빼앗아 전쟁물자를 만드는데 사용하였으며.여자정신대근무령(女子挺身隊勤務令:44.8.23)을 공포하고 만 12세 이상 40세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여성들을 일본 또는 남양군도(南洋群島)로 징용 위안부(慰安婦)노릇을 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발악적인 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1943년 1월 27일에는 미(美).영(英).중(中)등 3개국이 카이로에 모여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자유 독립할 것을 선언’하였고. 1945년 7월26일에는 포츠담에서 카이로선언을 확인하는 이른바 포츠담선언을 채택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원자폭탄(原子爆彈) 실험에 성공한 미국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廣島)에.8월 9일에는 나가사끼(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이런 대공세에 몰린 일본은 포츠담선언의 수락의사를 연합군에 통보하고.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36년 만에 조국은 일제의 치하에서 광복(光復)을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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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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