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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第 7 節 조선시대(朝鮮時代)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한 이성계(李成桂)는 전공을 세우고 지반을 굳게 굳히더니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으로 중앙정계의 시루건자가 되자 반대파를 차례로 몰아 내고 전제(田制)를 개혁하여 구세력의 기반을 완전히 꺾은 다음 신진 유학자들과 세력을 규합.조선왕조(朝鮮王朝)를 개창(開創)하였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사대교린(事大交隣).배불숭유(排佛崇儒).농본민생(農本民生)을 3대 국시(國是)로 내세워 나를 다스렸다.   지방 행정체제는 고려말 편제를 그대로 습용(襲用)했는데.이때 전국은 6도(六道)2면(二面)이었다. 6도는 경기도(京畿道).충정도(忠情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이며 2면은 동북면(東北面:함경도).서북면(西北面:평안도)이다. 아울러 경상도에는 안렴도관찰출척사(按廉都觀察黜陟使)가 배치되고 감영(監營)은 상주(尙州)에 두었으며. 이때 본면 지역인 사주의 명호는 그대로 습용되었다.   그 후 태종(太宗) 1년(1401)에는 도장관인 안렴도관찰출척사를 안렴사(按廉使)로 개칭하고 동왕 2년에는 진양대도호부(晋陽大都護府)를 다시 진주목(晋州牧)으로 고쳤다. 그리하여 사주는 하나의 독립된 지방 행정 단위의 군.현으로서 상위 해정구역인 진주목 관할 아래 포괄(包括)되었다.   조선조 건국 후에도 정부 재정(財政)의 대부분을 남쪽 아래 새로 세조(稅租)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였으므로 조운(漕運)은 국가의 가장 큰 대사(大事)였다. 때문에 고려말 왜구로 인해 중단되었던 경상도의 조운(이때 경상도에는 사주의 통양창과 합포의 석두창이 있었음)은 바닷길을 이용한 해운조전(海運漕轉)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태종3년(1403)5월에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되어 많은 인명피해의 해난사고(海難事故)가 발생하자 이때부터 조운은 다시 폐지되고 모든 세조의 운송은 육운(陸運)으로 전환되었다. 동왕 13년(1413)에는 종래의 6도2면중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16년에 咸吉道로.성종 1년에 영안도.중종 4년에 咸鏡道로 개칭)라 하고 서북면을 평안도(平安道)라고 개칭하였는데. 이로써 전국이 8도(八道)로 정비되었다.   이와 함께 이해 10월에는 전국의 지방제도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계수관(界首官:종 2품)의 단부(單府)를 제외한 무릇 군.현의 이름 가운데 고을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뫼 산(山)자 또는 내 천(川)자로 고치게 하였다. 이리하여 고려 현종 이래 사주의 명호는 계사년(癸巳年)의 예개(例改)에 의하여 오늘날의 사천(泗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따라서 지방관의 명칭도 종래의 감무(監務)에서 현감(縣監)으로 고쳐부르게 되었고 별호(別號) 또한 사성(泗城)에서 동성(東城)이라 불렀다.

  조선조 초기에도 왜구들의 약탈과 노략질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는데.태종 15년(1415)9월에는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하여 요해처(要害處)인 사천을 군사구역으로 설정하여 이른바 병마사(兵馬使)가 이끄는 사천진(泗川鎭)을 설영하였다. 이로써 사천은 행정적인 위치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거점으로서의 위치 또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설진(設鎭)기사를 ≪태종실록≫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전략)조의방(趙義方)을 사천진 병마사 판사천현사로. 전시귀(田時貴)를 울산진 병마사 지울산군사로 삼았으니 사천.울산이 진으로 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趙義方 泗川鎭兵馬使 判泗川縣事 田時貴 蔚山鎭兵馬使 知蔚山郡事 泗川蔚山之爲鎭自此始)” 라고 적고 있다. 이상으로 살폈듯이 태종대에 사천.울산에 진을 설치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건국 초(태조 5년 8월 왜구들이 경상도를 덮쳐서 사천 통양포의 조운선을 빼앗아 달아남)에도 경상· 전라· 충청도 등 이른바 삼남 연해 지방은 항상 왜구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만큼 요해지를 방어하는 일이 국방상 중요한 대업(大業)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상도 지방은 당시 지역적 중요성 때문에 소단위의 군사구역을 설정하고 지방의 치안유지와 함께 관할구역의 대외 침략으로부터 관아(官衙) 중심의 지역방어 임무를 맡게하였다. 그리하여 이 무렵 경상도 연해(沿海)지역에는 그 중심 거점인 창원(昌原)에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종 2품관.세조 때 兵馬節度使로 개칭)의 병영(兵營)이 설치되고 그 좌우(낙동강을 중심으로)인 사천.울산에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정3품관)의 진이 설치 되어 도절제사의 지휘 통제를 받록 한 것이다. 이로써 영진군(營鎭軍)이란 새로운 병종(兵種)이 성립 되었고.사천진은 여느 군.현과 달리 직계상 품계가 높은 병마사가 군권을 장악하여 일반 행정도 겸하였던 것이다.(泗川鎭兵馬使判泗川縣事)   그런데 거진(巨鎭)이라 일컫던 사천진의 병영이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었던 것일까? ≪경상도 지리지≫(1424년刊)에 의하면.“사천진 거해구 강주포 8리소속(泗川鎭 去海口 江州浦 八里所屬)”이라 하였다. 이로써 보면 강주포는 당시 진주목 관할의 지역으로서 지금의 축동면 구호리이고 그 건너 해구는 사천읍 사주리로 비정(比定)된다. 왜냐면 사주리는 사천강 하류에 위치하여 당시 하구(河口)를 통하여 조수가 마을 어귀까지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구에서 8리는 당연히 본면 소재 옥산(玉山:현 삼성항공직원 아파트)에 해당된다. 옥산 구악 읍기야(玉山舊嶽邑基也)라는 말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사천진을 한편으로는 번지(藩鎭)이라고 했는데 이는 지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머물러 있는 군대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장(鎭長)이 겸목(兼牧)하는 경우 이외에는 대개 소재읍(所在邑)의 치소와 떨어져 주둔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판현사(判縣事)를 겸직한 사천진의 경우느 마땅히 그 진영은 당시 소재읍인 본면(고읍리)에 두었슴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배후에는 두음벌산(豆音伐山:현 浮峰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앞에는 사천의 망루격(望樓格)인 서낭당산성(城隍堂山城)을 쌓고 연해관방(沿海關防)인 사천을 수어(守禦)하였다.   이 무렵 사천진의 영진군(營鎭軍) 수는 진군(鎭軍)이 300. 수성군(守城軍)이 49인 모두 합쳐서 349인이었다. 진군의 편성은 사천을 비롯하여 진주· 곤남(곤양)· 하동· 고성· 함양· 거창· 합천 등 서부경남의 일원과 상주· 성주· 금산· 지례 등 경북지역 일부에서 동원된 군관(軍官:馬兵)과 농민으로 입번(入番)한 수성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진군과 수성군은 같은 군이지만 신분상 엄연히 구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世宗) 5년(1423)에는 병마사의 사천진을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종3품관)로 이름을 고쳤다. 이는 이조(吏曹)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무릇 도병마사(都兵馬使).병마사(兵馬使)라고 호칭하는 것은 곧 전조(고려조)의 제도이므로 이제 이미 고쳐서 양부(兩府) 이상은 도절제사(都節制使)라 호칭하고, 3품은 첨절제사(僉節制使)라 호칭하고 있사온데 오직 각 진의 병마사만은 그대로 두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니 청하건데 각 진의 병마사도 3품은 첨절제사라 호칭하고 4품은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라고 호칭하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동왕 27년(1445)봄에는 읍기(邑基)를 옮겼다. 그것은 신라시대 이래 아니 그 이전부터 있어온 본면의 읍소재지가 지금의 사천읍(泗川邑)으로 천읍(遷邑)됨을 뜻한다. 천읍에 관한 유일한 문헌은 당시 신석조(辛碩祖:세종때의 문신.유학자)란 분이 지은 객관기(客館記)가 그것이다.   객관기란 고려· 조선시대에 있어 각 고을의 관아에 관사(館舍)를 두고 이르는 말로서.조선시대는 고을마다 성(읍성)안 관사에 궐패(闕牌)를 모시어 두고.정조(正朝).동지(冬至).임금의 탄일(誕日)에는 궁궐을 향하여 배례를 하는 한편. 왕명을 받들고 고을로 내려오는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는 숙소(宿所)로도 사용되었다. 해서 거기에는 성축(城築)이나 청사(廳舍) 등의 창건한 내력을 돌이나 목판(木板)에 새겨서 걸어 두었는데 이를 기문(記文) 또는 객관기라 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천현에 옛날에는 성보(城堡)가 없었는데 세종 임술년(1442)에 신석조의 선고(先考) 병조참판(兵曹參判) 신인손(辛引孫)이 도체찰사(都體察使)의 명을 받아 현의 북쪽(본면의 소재읍에서)4리쯤에 터를 살피다가 알맞은 곳을 구해 읍성(邑城:현 사천읍 城址公園)을 쌓았다고 하였다. 이때 현의 태수(太守) 안위(安位)가 관사를 옮겨짓기 시작하였으나 공역(功役)하는 중도에 갈려가고 을축년(1445) 봄에 태수 송희경(宋希瓊)이 잇따라 도임해 와서 놀고 있는 자를 부려서 불과 몇 달이 못되어 무릇 70여 간이나 되는 청사와 행랑(行廊)을 모두 훌륭히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성의 축조(築造)는 어디까지나 어적보민(禦敵保民)의 원칙에서 적의 침략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종래의 무방비상태인 고읍시대는 종언(終焉)을 고하고 새로운 읍성시대가 열린 셈이다.   세종대에는 교통의 운수수단으로 본면에 동계역(東溪驛)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신역(新驛)이라 하였다가 동왕 19년(1437)11월이 동계역이라 개칭하였고.동왕 30년(1448)에는 본면 철장(鐵場)에서 산출되는 정철(正鐵)로 총통을 만들었다. 철장이란.철의 생산지에 설치한 제련장(製鍊場)으로 사철(沙鐵)· 석철(石鐵)등을 제련하여 정철을 만들었던 곳을 지칭한다. 본면 소곡리에는 일찍이 철이 산출되었는데 태종 7년(1407)에 이곳에 비로소 철장을 설치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철을 제련하여 국용(國用)에 쓰게 하였던 것이다. 소곡리의 쇠실(금곡).객방 따위의 지명은 철장이 있은 데서 유래된 땅 이름이다   한편 종래의 사천진은 세조(世祖) 때에 군익도(軍翼道) 체제의 중익진(中翼鎭)으로 바뀌었다. 즉 세조 즉위년(1455)에 종래에 북방 및 남방의 변진(邊鎭)만을 지키다가 그것이 무너지면 방어할 길이 없다하여 처음으로 내륙지방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중익을 핵(核)으로 하는 주변의 여러 고을을 좌.우익의 3개 군사 단위로 묶어서 중익진을 중심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편제였다. 이같이 군익도의 체제가 전국에 확장되는 조처와 동시에 첫째.각 읍의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모두 군사직을 겸직케하여 중익수령은 병마절제사.좌.우익 수령은 병마단련사(兵馬團鍊使)라 하며 둘째.모든 군사는 익에 소속시켜 번상 습진(習陳) 등에 관한 일을 광할하며 셋째.군령(軍令) 계통은 도절제사(都節制使).중익절제사(中翼節制使).제익(諸益)의 계통을 이루게 하였다. 이때 사천의 중익진을 중심으로 좌익은 고성과 진동(의창).우익은 곤양과 하동에 두어서 이를 지휘하였다.

  세조 3년(1457)에는 군익도 체제를 보다 더 발전시켜 지역방어의 성격이 뚜렷한 진관체제(鎭管體制)로 개편하여 도(道) 대신 진(鎭)이란 명칭이 나타나게 되었다.   진관 조직은 새로운 변화는 아니나 지방의 군사조직은 각 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소재지를 주진(主鎭)이라 하고.그 밑에는 각각 몇 개의 거진(巨鎭)을 두어 절제사(節制使).첨절제사(僉節制使)가 각각 관장하고.이 거진을 단위로 하는 진관에 여러 개의 제진(諸鎭)을 두어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만호(萬戶).절제도위(節制都尉)가 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진관편제를 일컬어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이라고도 하는데 주진 밑에 거진을 한 군사단위로 하여 설정한 것이며.수령이 겸임하는 첨절제사의 통할(統轄)을 받게 하였다.진관은 평상시에 주진의 관할하에 있었으나 만약 외침이 일어나면 각 진영은 독자적으로 군사행동을 취하며 한 진관 무너져 패하면 다른 진관이 싸움에 나가는 등 차례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는 조직적인 편제였다.   진관 편제에 따라 우리지역 거진의 거점은 진주였다. 이때 사천의 중익진은 세조 14년(1468)에 혁파되어 경상도 우부(右部) 진주진관(晋州鎭管) 소속의 병렬적(竝列的) 제진(諸鎭)으로 격하되었다. 그리하여 태종대 이래 거진으로서의 사천진(또는 중익진)은 53년 만에 제진으로 개편되어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종6품)가 수령직을 겸임하였다. 그리고 진관 체제라 하여 모든 지역에 무장된 군사가 항상 주둔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군사를 징발하여 중앙에 번상시키거나 또는 지방의 특수지대에 부방(赴防)할 따름이었다.그리하여 전국에 전략상 특수지대가 설정되어 있어 항상 군사가 배치되어 이를 유방군(留防軍)이라 했는데.사천에는 유방 2여(二旅:1여는 병력 125명)가 상주하였다.   그후 선조(宣祖) 25년(159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이 일어나 초기에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싸움에 패하여 전선(戰船)과 군사 태반을 잃고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을 요청한바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원균의 구원요청을 받고 빨리 출동하지 못한 이유로 이른바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분군법(分軍法)에 의한 지역 방어의 모순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에 상부의 명령 없이는 다른 관할 구역에 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사실상 아직 충분한 출동준비가 미흡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이해 5월 4일.드디어 경상도를 향하여 제1차 출동에서 왜선 37척을 격파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5월 29일에는 제2차 출동을 단행하여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거북선(龜船)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이해 10월에는 제1차 진주성(晋州城) 싸움이 벌어져 이때 사천현감 정득열(鄭得說)은 사천의 군사 3백여 명을 이끌고 성외(城外) 전투에서 적을 무찌르다 순절(殉節)하였다. 또 계사(癸巳:1593)6월에는 제2차 진주성 싸움이 벌어졌는데.이때도 사천현감 장윤(張潤)이 3백여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사하고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두 차례의 진주성 싸움에서 사천세(泗川勢)로 지탱하고 또 싸웠던 것은 당시 진주가 진관의 거점인 거진(巨鎭)이었을 뿐 아니라 전라도로 넘어가는 요충지로서. 사천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주를 지켜야 했고.또한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수호하기 위해서도 진주를 지켜야만 했다.   아울러 본면의 인물로는 주몽룡(朱夢龍)장군이 금산군수(金山郡守)로 있을 때에 의병장 강덕룡(姜德龍).정기룡(鄭起龍) 등과 함께 추풍령· 조령· 거창싸움에서 용전.왜군을 격파하여 영남의 3룡(龍)이라 불렀다.   이어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들어가 부장(副將)으로 창녕에서 적군을 크게 격파했고.이후 전란이 끝날 때가지 신명을 바쳐 왜적 있는 곳을 찾아 연전연승 공을 세웠다.이같이 주장군을 배출한 본면의 많은 사람들은 장군 휘하에 들어가 국난을 당한 나라를 구하는데 일익(一翼)을 담당하였던 것이며.바람앞에 등불 같았던 나라와 향토를 지키는데 충절로써 다했다. 그후 조선 후기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의 군· 현의 개편이 이루어졌으나 사천은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고종(高宗)32년(1895)5월26일자 전문 6조로된 칙령 제98호에 의거 태종 13년(1413)이래 482년동안 습용해오던 8도제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도격)로 구분.그 아래로는 종전의 부· 목· 군· 현을 통틀어 군(君)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하는 행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부(府)에는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군(郡)에는 군수를 두었는데.이때 사천군은 9개면으로 본면은 상주내면(上州內面)과 동면(東面)으로 갈라져 있었다.   동년(1895)11월에는 주민 자치조직으로 향회(鄕會)를 두는 향회조규가 반포되었다.이 향회는 군회(대회).면회(중회).리회(소회)로 구분하여 군회는 각면의 집강(執綱)과 면회대표 2명씩으로 구성했고.면회는 집강과 각 리에서 공천한 대표2명씩으로 구성하였으며.리회는 존위(尊位)와 리내 각호마다 1인씩으로 구성했었다.   1896(건양1)8월 4일에는 칙령 제35호로 전년에 시행했던 23부제를 전부 폐지하고 동일자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다시 13도로 개편하여 도에는 관찰사.부에는 부윤(府尹).군에는 군수 등의 지방관을 두었다.

  이에 따라 경상도는 남도(南道)와 북도(北道)로 분리 개편되었고 본면이 속한 사천군은 경상남도에 편입되었으며.이때부터 도청은 진주(晋州)에 위치하게 되어다. 한편 동년(1896년)9월 칙령 제61호로 반포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은 근대적 호적제도와 통반장제도의 근거가 되었는데.호적제도는 조세 및 각종 부역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그리하여 각부(府).군(郡)에는 1호(戶)에 1매씩의 호적부를 비치토록 했고 10호를 1통으로 통장(統長)을 두었으며.각 호마다 호패(戶牌:문패)를 게시도록 하는 획기적인 제도가 마련되었다.   1906년(광무 10년)2월에는 일본제국주의가 한성(서울)에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를 설치하였고 이어 9월 24일에는 칙령 제49호에 의하여 지방행정구역의 대폭적인 개편을 단행하여 신지방관제(新地方官制)를 실시.전국을 13도 11부 333개 군으로 개편하여 일인(日人) 참여관을 두어 행정을 감독하였다. 이에 따라 사천군은 진주군의 문선면을 편입시켜 종전 9개면에서 11개면이 되었다.당시 사천군이 관장하던 11개면은 郡內面.上州內面.東面.近南面.洙南面.下南面 .中南面.上西面.下西面.北面.文善面 등이다.   1909년 12월에는 진주~삼천포간의 도로가 개통되어 본면지역인 상주내면을 통과하였다. 이 도로는 지금의 국도 3호선으로 당시 경남 도내에서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무렵 나라 전체는 갑신정변(1884년)에 이어 청일전쟁(1894~1895).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1895년)등 어지러운 정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1897(고종 34년)고종은 자주국가를 표방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연호를 광무(光武).왕을 황제(皇帝)로 하는 국정(國政) 개혁을 단행 하였으나 조선왕조의 기운은 차츰 기울어지고 있었다.   1905년 노일전쟁이 끝난 후 체결한 을사조약(乙巳條約:1905년)으로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1906년)한 일본제국주의는 1907년 한일신약(韓日新約)를 체결하더니 결국 1910년에 국치(國恥)의 한일합방조약을 맺음으로써(1910.8.22)조선조 519년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19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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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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