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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第 6 節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즉위한지 19년(936)만에 후산국으로 분열된 우리나라를 다시 통합하고 신라말기 이래로 혼란에 빠진 정국을 탁월한 통치이념의 정립으로 왕조의 권위를 확립하여갔다. 그러나 건국 초기에는 신라말기의 호족세력(豪族勢力)에 의한 정치적 혼란상이 여전히 성행되었다.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지방에서 반독립의 상태를 유지하던 호족들에 대하여는 중앙관직의 위계와 같은 향직위(鄕職位)를 주었고. 지방자치를 인정하는 한편 중앙의 정령(政令)을 지방에까지 침투시키기위해 그 지방 출신의 중앙의 고관(高官)을 사심관(事審官)에 임명하여 향리(鄕吏)를 감독하기도 하였다.   또 호장(戶長).부호장제(富戶長制)의 정비.향리의 자제를 볼모로 중앙에 머물게하는 기인제(其人制)를 마련하여 그들을 견제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므로 태조 왕건은 통일신라시대의 행정제도인 9주 5소경을 그대로 유지하여 오다가 겨우 전국적인 주∙부∙군∙현(州府郡縣) 명칭의 개정작업이나 착수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 점에 대하여 당시 문신(文臣)이었던 최승로(崔承老)는 성종(成宗)에게 낸 건의서에서 태조 왕건이 통일 완성한 뒤에도 미처 지방관을 배치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호족들이 백성을 괴롭히고 있으니 지방관리들을 시급히 파견할 것이며. 전국 각지에다 다 파견할 수 없으면 먼저 몇 개의 군현(郡縣)을 합하여 한명씩의 관리라도 임명하여 보낼 것을 제의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방제도의 정비는 앞서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전국에 12목(牧)을 두고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한 데서 비롯되었다.즉.성종 2년(983) 향직명호(鄕職名號)가 개편됨과 동시에 전국에 비로소 12목이 설치되었고. 여기에 장관으로서 목사(牧使)가 파견됨으로써 비로소 중앙관이 지방에 상주(常駐)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12목 제도는 성종 14년(995)에 이르러 다시 개편되어 전국을 10도(道)로 나누고 12목은 12주절도사(十二州節度使)로 개편하여 각도 밑에는 다시 주∙부∙군∙현(州府郡縣)을 두었다. 이때 진주(晋州)에는 전국 10도 중의 하나인 산남도(山南道)가 설치되어 본면 지역인 사수현(泗水縣)은 종전 고성군의 영현에서 산남도 소관으로 이속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도제는 조선시대의 도제와는 달리 실제는 행정을 맡아보는 도장관이 없는 즉. 중앙으로부터 안찰사(按察使) 등의 순관(巡官)이 수시로 순찰하고 돌아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절도사의 배치는 지방행정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종(顯宗)3년(1012)에 이르러 절도사를 폐지하고 5도호부(五都護府)를 설치하는 동시에 진주를 비롯한 7주에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가 동 9년(1018)8월에는 안무사를 없애면서 전국을 4도호부.8목.56지군사(知郡事).28진장(鎭長).20현령(縣令)으로 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진주는 다시 진주목이 되고 본면 지역인 사주(泗州)는 진주목 소관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이에 앞서 현종은 재위 6년(1015)윤6월(향지에는 현종 2년(1011).사수현을 황고(皇考) 안종(安宗:諱郁)의 유배지(流配地)라 하여 이를 높여 사주(泗州)로 승격시키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陞泗水縣爲泗州) 속현이란 속군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 있어 전국의 각 지방 행정단위의 지방관이 모두 파견되지 못하였던 실정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러한 속군.속현들은 반드시 그 세력이 강성해서가 아니라 군∙현의 대소에 따라 미처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상태에서 지방 세력의 지배아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려후기까지 지방관이 배치되지 못한 속군.속현의 총수는 모두 361곳에 달한 것으로 이는 배치된 곳 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고려 초기의 군∙현 조직은 전국의 주∙부∙군∙현 가운데 중요한 곳에 지부사(知府事).지군사(知郡事).현령관(縣令官) 또는 방어사(防禦使) 등의 지방관이 설치되어 도(道)라는 중간기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앙정부와 연결되었으며 그들에게는 다소의 속군이나 속현들이 소속되었는데.이들에 대한 국가의 행정은 소속되어 있는 지방관에 의하여 관할되는 간접지배의 형태를 따랐다고 하겠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나타나는 군∙현의 변화의 계기는 감무(監務)라는 외관(外官)의 파견이다.감무는 예종(睿宗) 1년(1106)에 처음 파견되어 조선왕조 태종(太宗)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개칭될 때까지 모두 190여 현에 파견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이는 현종 9년 당시 속현수의 절반을 넘는 것으로서 이 숫자만으로도 감무의 파견이 주현(主縣)-속현체제상의 큰 변화를 가져온 것임을 알 수 있다.따라서 이는 중앙의 행정력이 서서히 말단조직에까지 침투하게 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 한 예로서 본면에 치소(治所)를 둔 사주가 그것인데.사주는 비록 형종 때에 주로 승격 시키기는 하였으나 명목상의 주일뿐 지방관이 없는.일테면 진주목관할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명종(明宗) 2년 (1172) 월.전국 56현에 감무를 설치하게 되자 이때 사주에도 비로소 지방관이 파견되는 감무가 설치 되었다. 그것은 사주가 현종 이래 고려왕조의 소위 풍패지향(豊沛之鄕)이었을뿐 아니라.고려 초부터 국가 대정(國家大政)의 일익을 담당한 세조(稅祖)의 수납(收納)과 조운(漕運)의 발진기지(發進基地)였다는 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위에서 풍패(豊沛)란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지방 백성들로부터는 부세(賦稅)를 면제해 주었다는 고서(故書)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의 사주(泗州)가 고려 왕조에게 있어서 이렇게 불리우게 된 것은. 현종의 아버지 욱(:태조 왕건의 여덟째 아들)안종이 성종 11년(992)7월 우리고장 사수현에 귀양와 살다가 5년후 죽은 곳일 뿐 아니라 현종 순(詢)도 아주 어릴적에 귀양사는 아버지 곁으로 내려와 본면 소재 배방사(排房寺) 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왕조에서는 현종 이후의 역대 왕들은 사주를 일컬러 “풍패지향”이라 한 것이다.   또 조운(漕運:또는 漕轉)이라고 하는 것은 현물 미곡(現物米穀)으로 거두어들인 세곡(稅穀)을 주운(舟運)을 통하여 경창(京倉:고려때는 禮成江)하구를 거쳐 開京의 左倉)으로 납입하는 제도이다. 그러니까 해안요지에 조창(漕倉 또는 海運倉)을 설치하고 이 곳에 부근 주∙군의 세곡을 수합하였다가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안을 거쳐 경창으로 운송하는 제도였다. 당시 전국에는 13조창이 있었는데 경상도에서는 마산의 석두창(石頭倉)과 사주의 통양창(通陽倉.현 船津里)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처럼 사주는 남쪽 변방의 한갓 소현(小縣)에 지나지 않았었지만 왕실과의 연고와 파격적(破格的)인 주로 승격되는 한편.명종대에 이르러서는 조운지(漕運地)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여느 고을보다 먼저 지방관이 다스리는 주현(州縣)으로 독립하여 속현이란 너울을 벗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행정치소(行政治所)의 읍기(邑基)가 본면 고읍리(古邑里)에 있었슴은 물론이다.   한편 고려말에 이르러 두드러진 것은 왜구(倭寇)의 침략이 아닌가 싶다.왜구가 우리나라 연안을 침입하게 된 것은 삼국시대 부터라 할 수 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연안에 왜구가 침입하였다는 기사가 보이고 있으며.고구려 광개토왕의 비문에도 왜구라는 행문(行文)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조에 있어 왜구 침입의 최초 기록은 고종(高宗) 10년(1223)5월에 “왜구가 금주(김해)에 침구(侵寇)하였다”는 기사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왜구의 침범은 충정왕(忠定王) 2년(1350)부터로 보인다. 충정왕 이전.즉 고종에서 충숙왕 때까지의 왜구 침입은 고작 10여회에 불과하였고 침입 지역도 주로 남해안의 경상도 일원에 한정되었으며. 고려에 큰 피해를 주지 않는 소규모 침입이었다. 그러나 충정왕 이후부터는 그 규모가 선박 100척 이상으로 대규모화하고 활동 무대를 넓혀 전국적으로 약탈행위를 자행하였다.   ≪고려사≫충정왕 2년2월조의 기록에는“왜가 경상도의 고성 죽림(통영)과 거제 그리고 합포(마산)를 노략질하니 천호(千戶) 최선(崔禪)과 도령(都領) 양관(梁琯)등이 이들과 싸워 격파하고 적의 머리 3백여 급을 베었다. 왜구의 침입이 이때부터 시작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전부터 소규모적인 침구가 거의 해마다 있어 이로 인해 남해안 연안의 농어촌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공민왕(恭愍王)을 거쳐 우왕(禑王)때 가지는 그 규모가 전례없이 확대되어 고려에 기친 피해는 정치.사회에 중대한 위협을 주었슴이 각종사료(史料)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왜구의 침입 목적은 정치적 야심보다는 경제적 목적이 제일 컸으리라 짐작된다.약탈의 주요대상은 주로 미곡과 사람이었는데.이들은 곡식을 저장해 둔 관창(官倉)을 습격한다든지 해상에서 조운선(漕運船)을 습격하여 미곡을 탈취하거나 인명을 살상하는 만행을 거침없이 저질렀다. 왜구의 침입지역은 3남(경상∙전라∙충청)지방에 집중되어 있는데 경상도는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다는 이유때문으로.이 가운데 경남지방은 97회로 가장 많은 침입횟수를 차지하고 있다.이 중에서 사주(泗州)를 중심으로한 인근 주변의 왜구 침략을 살펴 보면대략 다음과 같다.   공민왕 7년(1358)3월에 왜구가 사주 각산수(角山戍.금 삼천포)에 처음으로 쳐들어와 배 3백여 척을 불사르고 달아났으며.2년후인 동왕 9년(1360)4월에 또다시 각산수에 쳐들어와 약탈질하고 달아났다. 이의 공민왕은 “각도 주∙군현(州郡縣)의 모든 신묘(神廟)에 서낭신(城隍神)을 모시게 하고 전첩(戰捷)을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본면 소재 서낭당산에 서낭신을 모시고 향도 수호의 염원으로 제사를 지냈을 것이라 상고된다.   그 다음해인 동왕 10년(1361)3월에는 남해현에 쳐들어와 민가에 방화하였고.4월에는 고성과 거제에.8월에는 세 번째로 사주에 쳐들어와 민가에 방화하였고.4월에는 고성과 거제에.8월에는 세 번째로 사주에 쳐들어와서 분탕(焚蕩)질해갔다. 이때의 사주 침범이 어느곳이라고 기록에는 자세하지 않으나 아마도 사천만 깊숙이 자리한 조운의 통양창(通陽倉)으로 추정될 뿐이다.

  같은 왕 11년(1362)2월에는 하동 악양에 쳐들어와 약탈해 갔으며 또 2년 후인 동 13년(1364)3월에는 사주를 비롯하여 고성.하동 등지에 잇따라 침범하고 분탕질해 갔다.   또 동왕 22년(1373)3월에는 하동지역에 쳐들어왔고.우왕 2년(1376)3월에는 사주를 침범하고 진주에 쳐들어온 것을 경사도 도순문사(慶常道巡問使) 조민수가 격퇴하였으며.11월에는 거제∙고성∙함안 등지를 침탈하고 진주 반성현에 침범해 온 것을 도순문사 배극렴(裵克廉)이 대파하였다.   우왕 3년(1377)5월에 사불랑(沙不郞:삼천포근방?)에 쳐들어온 왜구를 쳐부수기 위해 경상도 원수 우인렬(禹仁烈)이 5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밤을 틈타 출격하였는데.사주 남면(현 용현면 송지리?)에 이른 왜구를 협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왜구들이 앞을 다투어 서로 배에 타고 날뛰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 화살에 맞아 죽은자가 너무나 많았다.   동왕 4년(1378)12월에는 하동과 진주에 쳐들어온 것을 도순문사 배극렴이 사주까지 추격하여 20여 급을 베었고. 동 5년(1379)5월에는 기병 7백과 보병 2천여 명으로 사주를 거쳐 진주에 침범해 오는 것을 원수 양백연(楊伯淵)이 우인렬.배극렴 등과 함께 반성현에서 13급을 베는등 크게 격파하였으며.8월에는 경상도 원수 우인렬과 배극렴 등은 사주에 쳐들어온 것을 43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또 9월에는 반성현을 침범하여 진(陣)을 치고 있는 것을 우인렬 등이 포위하고 공격하여 34급의 목을 베었고 또 단계∙거창∙야로를 침탈하고 가수현(합천 삼가)에 이론 것을 도순문사 김광부(金光富)가 격멸하다가 전사했다. 이달에 왜구는 극성을 부렸는데 사주∙진주∙산음(산청)∙함양에도 잇따라 쳐들어와 크게 소동을 일으켰다.   동왕 6년(1380)2월에는 진주의 영선현(고성)에 쳐들어와서 노략질하였고.8월에는 함양에 쳐들어와 분탕질 했다.이해 9월에는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를 3도 도순찰사 이성계(李成桂)와 이두란(李豆蘭)이 운봉현(雲峰縣)에서 크게 깨뜨리고 대승첩(大勝捷)을 거두웠다.   동왕 7년(1381)7월에는 고성에 또 쳐들어와서 약탈하므로 남질(南秩)이 싸워8급을 베었다.동 9년(1383)5월에 왜선 120여 척이 경상도 연해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심히 하므로 해도(海道) 원수 정지(鄭地)는 47척의 병선으로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이르러 왜구를 추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이 해전에서 적은 17척의 큰 배와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는데.이는 고려의 대표적인 왜구와의 해전이라 할 것이다.

  이의 자신감을 가진 고려는 창왕(昌王)1년(1389)2월에 경상도 원수 박위(朴葳)는 병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 정벌의 장도에 올랐다. 이때 박위는 적의 병선 3백여 척과 섬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이와 더불어 원수 김종연(金宗衍).박자안(朴子安) 등은 사로잡혀 있던 고려인 1백여 명을 구출하여 돌아왔다.그러나 이해 7월에는 노도와 같이 쳐들어와 사주를 거쳐 이번에는 함양에 들이닥쳤다. 이때 진주절제사(晋州節制使) 김상(金賞)이 이를 쳐서 크게 깨뜨렸으나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다 전사했다.   이와 같이 고려말 왜구의 발호(跋扈)와 침탈은 조선조 초기까지도 계속되었는데.이로 인해 고려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고. 특히 사주는 지정학상 서부 경남 내륙(內陸)에 이르는 왜구의 침략 앞마당격으로 봉적지장(鋒鏑之場)이 되어 거의 폐읍(廢邑)이 되다시피 하였다.   덧붙여 왜구와 관련하여 이 무렵 이구산(尼丘山)에 산성(山城)이 축조되었으며.인물로는 본면 출신인 목충(睦忠).목인길(睦仁吉) 형제를 꼽을 수가 있겠다. 이들은 무신(武神)으로 목충은 공민왕 때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고 개경(開京)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고. 우왕조에 존전병마사 밀직부사(助戰兵馬使密直副使)가 되어 여러차례 왜구를 격퇴한 고으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또 충의 종제(從弟) 목인길은 공민왕 때 기철(奇轍)의 일당을 멸하여 1등공신이 되고.홍건적의 난 때는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왕의 남행(南幸)에 호종(扈從).홍건적을 물리쳐 다시 공신이 되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으며, 우왕조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전라도에 침범하는 왜구를 무찔러 크게 공을 세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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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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