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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4.대가야연맹(大伽倻聯盟)의 멸망(滅亡)   가야사의 복원은 낙동강 하류지역의 가야국(金官國:金海)을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와 5세기 후반부터 562년대의 대가야(大伽倻)가 멸망할 때까지 낙동강 서안의 내륙산간지대에 거점을 둔 고령(高靈)의 대가야연맹의 맹주로서 군림한 후기가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전기가야의 맹주격이었던 김해가야(金官國)는 왕족 묘역으로 생각되는 김해 대성동(大成洞) 유적의 발굴.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하여 중국이나 왜국 등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서 부(富)의 축적을 이루는 동시에 인근 각국의 문화를 섭취함으로써 가야권 내의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낙동강 하류지역의 대표저 유적인 김해 대성동유적이나 양동(良洞)유적의 무덤 규모나 그 출토 유물을 보면 그들의 국력과 문화수준을 짐작할 수 있슴은 물론 백제나 신라 문화에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북방 고구려의 세력을 등에 업고 급성장한 신라가 5세기 전반대에 들어서 김해의 가야국(金官國) 등 낙동강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 연맹의 세력들을 차츰 약화시키거나 혹은 시라의 영향력내로 편입시킴으로써 이 지역내의 가야세력도 사실상 와해(瓦解)되고 말게 된다. 이후 5세기 후반대에는 낙동강 동안(東岸)의 가야세력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서 통제.간섭을 받는 일종의 신라연맹체로 편입되고 낙동강 서안(西岸)의 가야세력들은 다시 고령을 중심으로 부흥 결집되어 대가야연맹을 형성하기에 이르는데 사천지역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대가야가 가장 번성(繁盛)을 보인 것은 4세기 중엽이후 꾸준히 이들 지역에의 진출을 시도하던 백제가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도읍을 옮기는 등 가야에 대한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면서부터라고 생각 되어진다.

  고구려의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의하면 영락(永樂) 10년(400년)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이 기록되어 있는데 직접적으로는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의 구원요청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실제 의도는 백제를 치기 위한 것이었는데 침략 이유로는 약속을 어기고 왜와 친연관계를 도모했기 때문이다.≪일본서기≫흠명기(欽明紀)에 기록된 백제 성왕(聖王)의 회고에 참고하면 백제와 왜의 친연관계는 4세기 중반경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교섭은 함안.창원 등 가야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 지고 있는데 남정 당시 고구려가 백제.왜 뿐만 아니라 임나가라(任那加羅).안라(安羅:함안지역)등도 정벌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상화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제 가야는 남정에 의해 직접적인 타격을 입고 신라의 정치적 성장에 의해 세력권의 변동을 가져와 고령의 대가야가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5세기 후반이후 낙동강중류 및 서부경남지역에서의 고령식토기(高靈式土器)의 확삭은 이것을 반증하는 것인데. 묘제상으로도 고령 지산동고분(池山洞古墳)의 경우 하나의 봉토내에 주∙부곽(主副槨)이 좌우로 배치된 수혈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墓)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소형 덧널(石槨)들이 배치되고 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고령식토기의 분포는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권의 범위를 나타내는 것이고 대형 나무덧널무덤(石槨墓)에 이어 등장하는 수혈식돌방무덤은 한층 강화된 지배자의 막강한 힘을 상징하고 있다. 고령 대가야의 등장은 농업생산력에 기반한 점진적인 사회발전이 이루어 졌고.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한 백제.신라의 대가야 대응자세에 기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백제의 섬진강(蟾津江) 유역에 있어서의 영향력의 약화는 고령이 이지역을 통해 중국.왜등과 교섭을 가능케 했고 479년 가라국왕의 이름으로 남제(南濟)에 사신을 보내어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받은 것(≪南濟書≫加羅國傳)은 가야의 유일한 대중견사(對中遣使)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가야의 일국이 중국에 사신을 보낼만큼 국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5세기 후반대에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하류지역의 가야세력들이 신라의 진출에 의해 그힘이 약화되고 신라양식의 토기가 낙동강 동안 지역에 확산된다. 반면 낙동강 이서지역에 이던 가야세력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마침내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하는 연맹체의 형태로 세력을 규합하여 신라의 세력팽창에 맞서는 한편 백제와 유대관계(紐帶關係)를 가지면서 백제의 한성함락(漢城陷落)과 웅천천도(熊川遷都:公州)라는 힘의 공백을 틈타 한동안 급성장을 보인다.

본면 예수리에서 출토된 가야시대의 토기 3종

  이들 대가야 연맹체는 동일한 문화기반내에서 성장하던 합천∙삼가∙거창∙함양∙산청∙하동∙사천∙고성 등지 및 함안∙창원∙김해등의 소국들을 포괄하는 후기가야연맹을 이륙하였다. 이중에 하나였던 합천의 다라국(多羅國)은 ≪일본서기≫에 전하는 바와 같이 백제가 중재하여 541년 두차례에 걸쳐 열린 가야부흥회의(伽耶復興會議)의 참석자 현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맹주국인 고령의 대가야.함안의 안라가야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나라였다. 예컨대 합천국 쌍책면(雙冊面)성산리(城山里)에 소재하는 구슬밭(玉田)유적으로 이러한 다라국의 중심세력들이 묻힌 무덤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에서는 4세기대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나무덧널무덤.대형수혈식 돌덧널무덤 등이 조영되어 묘제상 다라국 자체의 꾸준한 성장과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대형수혈식 돌덧널무덤으로 이 지역 고분문화의 독특한 일면을 보여준다.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한 대가야연맹의 세력판도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령계토기가 출토된는 합천∙함양∙남원등 지리산주변은 물론 진주∙사천∙고성 등 섬진강유역에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서부 경남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세력판도이나 연맹의 각소국들은 독자적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고령계토기의 분포권과 아래 그림에서 보는 고배(高杯)와 수평구연장경호(水平口緣長頸壺)를 표지로 하는 소위 사천식(泗川式) 및 고성식(固城式) 토기의 분포권으로 알 수 있다.

(1) 수평구연장경호 (2)고배 (3) 유개고배

본면 예수리에서 출토된 가야시대의 토기 3종

  이들 양형식 토기의 분포범위는 상당부분이 겹쳐 있어서 서로 밀접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를 통해 보면 이들 두 형식토기의 분포범위는 고령을 비롯해 합천∙거창∙산청∙남원∙진주∙사천∙하동∙고성∙창원 등지에 이르며 이들 토기가 출토되는 시기는 대체로 5세기말에서 6세기 전반대로서 대가야연맹이 전성기 때에 해당된다. 특히 사천 예수리(禮樹里)유적의 수평구연장경호.남원 월산리(月山里) 유적에서는 용봉문환두대도(龍鳳紋環頭大刀)나 은상감환두대도(銀象嵌環頭大刀).종장판주(從長板冑) 등 대가야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유물들이 공반되어 주목된다.   그러나 가야의 이같은 성장도 6세기초 무령왕(武寧王).성왕(聖王)대의 백제가 국가 체제 정비와 함께 가야의 남부지역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를 꾀하며 이 지역에 재진풀함에 따라 그 세력권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신라의 겨우도 법흥왕대(法興王代)에 접어들면 가야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기도함에 따라 이제 고령 대가야세력권은 독자세력으로 존속하기는 매우 어렵게 되었다. 고구려에 대한 나∙제동맹(羅濟同盟)의 결성은 가야지역에 대한 백제의 직접적 개입에는 유효한 방패막이가 되었으나.이후 이 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빼앗은 신라앞에서는 그 세력을 온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 중에 대가야는 522년에 신라와 혼인동맹(婚姻同盟)을 맺어서 국제적 고립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결혼을 둘러싼 신라의 책략에 의하여 후기가야연맹은 내부분열의 조짐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녹기탄(睩己呑:영산.밀양)이 529년 전후하여 신라에게 병합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가야남부제국은 대가야로부터 떨어져나와 안라를 중심으로 다시 통합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531년 백제의 안라 진주.532년 신라의 남가라(김해)병합.534년 백제의 구례산성(久禮山城:칠원)축성등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가야남부지역은 신라.백제에 의하여 동.서로 분할 점령당하고 말았으며 그 남부지역의 소멸로 인하여 가야는 다시 분열 약화되었다.   이후 541년과 544년의 두 차례에 걸쳐 대가야와 안라 등 7~8개 소국의 대표들은 백제에 모여 성왕과 교섭을 하였다. 여기서 가야연맹은 백제 군령(郡令)∙성주(城主)의 축출과 자신들의 안전보장을 요구하였고. 백제는 가야독립 주장세력의 핵심인 안라를 무력화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백제의 뜻이 관철되면서 550년을 전후하여 가야연맹은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야제국의 망국음(亡國音)을 따서 지었다는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신라에게 투항하였다. 우륵이 지은 12곡중에는 사물곡(思勿曲)도 포함되는데 이 사물곡의 ‘思勿’은 사천의 연원인 ‘史勿’의 음차(音借)로 여겨진다.   554년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가야.왜 연합군은 신라에게 패배하였으며.특히 상당히 많은 수의 군대를 잃은 가야연맹은 멸망 직전에 몰렸다. 그리고 백제의 성왕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신라가 한강유역을 경영을 마치고 가야지역 병합을 시도하자.562년(신라 진흥왕 23년)에 고령의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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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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