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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물현(史勿縣)의 장미백치(長尾白雉)기사   삼국시대에 있어 우리 고장 사천과 관련된 사료(史料)에는 먼저 포상팔국(浦上八國)이 연모(連謀)하여 가라(加羅:金海)를 공격하였다는 사건 기사와 둘째.사물현(史勿縣)이 꼬리가 긴 흰꿩을 신라왕에게 진상(進上)했다는 내용 셋째.악성(樂聖) 우륵(于勒)이 가라(대가야시대)의 망국음(亡國音)을 따서 지었다는 12곡 중의 사물곡(思勿曲)의 ‘사물’은 음운상(音韻上) 사물국의 명호로 추정될 뿐 무헌의 빈약으로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다만 흰꿩에 관해서만 살피고자 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눌지왕(訥祗王) 25년(441)2월조를 보면 “史勿縣進長尾白雉.王嘉之.賜縣史설”이라 하였다. 이말은 즉. ‘사물현에서 꼬리가 긴 흰꿩을 바치매 왕은 기특히 여기어 그 고을 관리(官吏)에게 곡식을 내렸다’고 한 것이다. 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 당시 사천지역은 이미 신라에게 복속되어 있었슴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은 비교적 신빙성(信憑性)이 두터운 것으로 이해되나 이 사물현 운운하는 기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상고(詳考)를 요하는 점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초기의 신라본기 기록에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기록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상식적으로나 대세론(大勢論) 상으로 보아 아직 신라의 성격이 그곳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리라 생각되는 지역과 통교(通交)를 하고 혹은 영역(領域)으로 편입하였다는 따위의 기록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눌지왕대(417~458)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직 사천지역에까지 신라의 세력이 직접 미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신라세력이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하여 낙동강(洛東江)을 건너서 서진(西進)한 것은 6세기 초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기가야(前期伽倻)의 주축이던 금관가야(金官伽倻:金海)가 신라에 복속된 것은 법흥왕(法興王) 19년(532)이고 고령을 주축으로 하는 후기가야 즉 대가야가 망한 것은 진흥왕(眞興王) 23년(562)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눌지왕대에 있어서 ‘사물현’의 표현은 마치 신라에 복속되어 군현인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논리(論理)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장미 백치(長尾白雉)의 진상기록을 전적으로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그 까닭은 위에서 언급한바 신라가 국력(國力)을 축적하고 밖으로 활발하게 뻗어나가고 있는데 반해서 가야지역에서는 아직 집권적(集權的) 통일 왕국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부족연맹(部族聯盟)의 형태에서 대가야(고령)로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제왜(濟倭)의 세력이 작용하고 있을 때이므로 이 지역 사람들이 일치단결할 구심점(求心點)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右往左往)하게 되었고 따라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신라에 개별적으로나마 혹시 육지나 해상을 통해 교환(交驩)하여 친영성(親綠性)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진기(珍奇)한 토산물(土産物)인 흰꿩을 진상하여 환심을 사고자 하였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포상8국의 하나이던 사물국이 전술하였던바 가락국과의 싸움에서 신라를 알고 또 신라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친교(親交)를 두텁게 맺으려 하였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러므로 사물국과 신라사이에는 일찍이 해상로(海上路)를 통한 통교의 왕래가 있었으리라 미루어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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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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