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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2.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사물국(史勿國)   김해 구야국이 경제적 측면의 대외교육주체로서 초기가야제국내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라는 바탕은 ≪삼국지≫<위서>한전에 전하는 바와 같거니와 이 지역은 철이 많이 나서 군∙현 즉.낙랑과 대방을 통하여 중국에도 교역하고 마한과 왜와도 교역하였다 함을 앞절에서와 같다. 그런데 가야제국내의 해안지방에는 포구(浦口:오늘의 港口)가 많아서 이들 지역도 물자교역의 중계 역할을 활발히 이룩했을 것이라는 점이다.따라서 이 시기를 전후하여 가야제국내에는 별도의 이탈한 지역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이 지역이란 경남 서남부 해안에 형성된 해상세력 즉. 이른바 포상8국의 세력이 아니였나 한다. 그러한 근거로는 ≪삼국사기≫초기기록인 신라 내해왕 14년조에 “포상8국이 연모하여 가라를 공격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이 그것이다.   기록에 나오는 가라는 8국과 인접한 김해지역으로서 이전의 변진구야국으로 상정된다. 그런데 초기가야제국의 중추적 역할을 다해 왔다는 가라(구야국)가 왜 이들 8국과의 다툼을 벌렸던 것일까. 그 원인이야 여하간에 당시 이들 세력들은 얼마나 강성했던지 가라는 스스로 포상의 침공군을 막을 수가 없어서 왕자를 보내어 사로국(신라)의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건은 위에서 말한바≪삼국사기≫신라본기와 열전 물계자(勿稽子).≪삼국유사≫물계자전에 각각 전함으로서 그 기록을 전재(轉載)하면 다음과 같다.   (1)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 與伊代滄利音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還之”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제2 내해 이사금 14년조)   (2) “奈解尼師今時人也... 時浦上八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請救... 遂敗八國兵... 後三年 骨浦, 柒浦, 古史浦三國人來攻竭火城 王率出救 大敗三國之師...” (≪삼국사기≫ 권48 열전 제8 물계자전>   (3) “第 十奈解王 卽位十七年壬辰 保羅國, 古自國(今固城), 史勿國(今泗川) 等 八國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㮈音 將軍一伐等 率兵拒止 八國皆降... 十年乙未 骨浦國(今合浦也) 等 三國王 各卒兵功竭火(疑屈弗也今蔚州) 王親率禦之 三國皆敗...” (≪삼국유사≫ 권5 물계자전)

위 기사 (1)의 대강은.신라 내해왕 14년(209) 7월에 포상8국이 연합하여 가라를 침공했는데 이때 가라는 스스로 막아낼 힘이 없어서 왕자로 하여금 신라의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신라는 이의 6부의 군사를 움직여 8국의 장국들을 모두 격살한 후 이들에게 사로잡힌 6천인(가라사람)을 빼앗아 되돌려 보냈다는 내용이다. 또 (2)의 열전 물계자조에 물계자는 신라 내해왕 때의 사람으로서 포상의 8국이 함께 모의하고 아라국 (가라의 잘못인 듯)을 치니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왕)이 왕손 내음(내音)으로 하여금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케 하여 드디어 8국 군사를 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물계자의 공이 컸다고 하고 그 후 3년에 골포∙칠포∙고사포 3국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와 갈화성을 공격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구원하여 3국 군사를 크게 파하였다고 하였다. 마지막 (3)의 물계자전에는 (1).(2)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10대 나해왕의 즉위 17년(212)에 보라국(미상).고자국(고성).사물국(사천)등 8국이 힘을 합해 변경을 쳐들어 왔다.왕이 태자 내음과 장군 일벌에게 명하여 군사르 거느리고 이를 막게하니 8국이 모두 대패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포상8국중 어느 지역이 중심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세력들이 연합하여 가라국을 공격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가라국을 공격했던 반면에 ≪삼국유사≫의 기록은 마치 신라의 병경을 침범한 것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여기서 어느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건간에 포상 세력은 남해안 일대의 포구를 끼고 있는 세력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두 기록에서 보이는 부족국 즉. 골포국은 지금의 창원∙마산지역.칠포국은 칠원 또는 진동지역.고사포국은 고성지역(삼천포 지역 포함). 그리고 사물국은 사천에 비정된다.

한편 하동∙남해∙곤양지역에도 포상국이 있을 듯 하나 상고할 길이 없다. 다만 앞서 잠간 말한 바 곤양지역은 곤미국으로서 포상세력이 포함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여하튼 막연한 이야기이나 포상 8국은 지금의 하동 이동에서 창원 이서간에 존재한 포상의 부족소국들이라고 보아 무난하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이같이 3세기 초엽 포상세력의 등장과 아울러 남해안을 진감(震撼)시켰던 까닭은 김해지역의 가라국이 가야연맹권내에서 맹주적 구심체로서의 위치가 위태롭게 된 상징적인 큰 사건으로서 뿐만 아니라 신라세력의 팽창과 영향으로 가야세력권 내의 분열이 그 주된 요인이라 생각된다. 종래에는 이 기사를 설화적인 기록으로 다루거나 기년(紀年) 자체를 의심하여 믿을 수 없는 사건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가야세력권 내부의 전쟁에 관한 유일한 기록일 뿐 아니라 당시 해상세력으로 대표되는 수로집단 중심의 변진구야국.경주 중심의 사로세력권.그리고 포상8국으로 대표되는 경남 남서해안의 소국집단 등 남부지방의 세 세력권의 변동상황을 나타내는 주용한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의미분석은 3세기 초반 남부지방의 정치사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하겠다. 기사 내용상 주목되는 점을 다시 간추려 보면. 첫째. 포상 세력이 맹주격인 김해지방의 가라국을 공격한다는 점. 둘째. 그 침입을 기해세력의 요청에 의해 경주의 사로세력권이 막아주는 점. 셋째.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김해세력은 사로세력권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어 친연관계(親緣關係)를 맺음으로써 그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점. 넷째.이 사건 이후 가야관계기사는 당분간 자취를 감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포상 8국의 등장에 관한 몇가지 특징들을 추출해 보았는데 그 저변에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해지역 세력으로 대표되던 변진구야국이 맹주로서의 역할인 해상교역상 경제적 재분배기능의 상실로 인해 일어난 사건으로 파악되어 진다. 그리고 포상 8국의 기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모두에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포상’의 의미를 가라성(伽羅城)으로 해석하여 포상8국을 가라성 8국으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위치 비정을 낙동강하류에서 동쪽 지역 즉 양산.기장.동래(부산포함)등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는 언어학적으로나 역사지리상으로 전연근거가 없는 주장이라 밖에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8국의 지명을 모두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적어도 사천지역을 비롯 고성.합포지역만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사물국(史勿國)이 사천의 연원이 되는 근거로는 먼저 ≪삼국사기≫눌지왕(訥祗王) 25년(441)2월조에 “사물현에서 꼬리가 긴 흰 꿩을 왕에게 바쳤다.(史勿縣進長尾白雉)”는 기사에서 ‘사물현’ 운운이 그것이고 다음은 ≪경상도 지리지≫ <사천현> 건치연혁조에 “고지 사물현(古之史勿縣)”이라 하여 이후 사천의 연혁 서두에는 반드시 사물이라 기록되고 있는 점.그리고 이두식 표기의 사물이 음훈으로 사수(泗水)가 되는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포상8국 중의 사물국은 지금의 사천지역의 연원임에는 틀립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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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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