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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5.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및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는 문자의 사용여부에 따라 구분 짓게 된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 역사시대의 시작은 위만조선(衛滿朝鮮:B.C. 194~108)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위만조선은 이미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춘 단계로 이 시기는 한국 고고학(韓國考古學) 편년(編年) 상으로 초기철기시대에 해당된다고 한다. 위만조선의 성격에 대하여는 중국에서 고조선에 들어온 이주민(移住民) 세력의 대표로만 막연하게 밝혀져 왔으나 최근의 연구는 위만이 조선인이며 위만 조선은 이민족(異民族)의 정복국가 아니라 단군(檀君)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위만조선은 강력한 무역국가(貿易國家)로도 새로이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초기철기시대를 전(B.C. 300~200),중(B.C.200~100).후(B.C.100~0)의 세 시기로 나눈다면 역사시대의 개시는 초기 철기시대 중기부터로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집자리(住居址).무덤.조개더미 유적등이 조사되고 있으며. 원삼국시대(기원전 1세기 후반부터 서기 300년경까지)초기에는 널무덤(木棺墓)이 주로 축조되었으나 후기에는 덧널무덤(木槨墓)이 유행하였다. 이들 무덤은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분(古墳)처럼 큰 봉분(封墳)을 아직 쓰지 않고 부장유물(副葬遺物)도 본격적인 무기나 마구류(馬具類)는 드물다. 묘제의 변천 뿐 아니라 토기의 변화도 두드러졌다. 청동기시대 이후 계속 사용된 민무니토기는 차츰 소멸되고. 대신 중국 한문화(漢文化)의 영향을 받아 성형(成形)시 타날법(打捺法)이 수용되고 소성(燒成)시 노천가마(露天窯)가 아닌 평요(平窯)나 굴가마(登窯)를 채용하여 만들어진 소위 와질토기(瓦質土器)의 제작이 가능해졌다.

  이제까지 경남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이 시기의 유적을 예로서 들어보면 김해 회현동(會峴洞)∙양동리(良洞里)∙예안리(禮安里)∙지내동(池內洞).창원 대평리(大坪里)∙다호리(茶戶里)∙삼동동(三東洞).말양 내이동(內二洞).고성 송천리(松川里)∙동외동(東外洞).마산 현동(縣洞).함안 사내리(沙內里).사천 마도동(馬島洞) 및 늑도동(勒島洞). 남해 창선도(昌善島). 울산 하대리(下岱里).산청 백운리(白雲里) 그리고 부산의 노포동(老浦洞)등이다. 이 가운데 사천 늑도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대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늑도(勒島)는 여러 섬 가운데 하나로서 구량도(仇良島) 라고 하였다. 사적(史的)으로는 조선 초기 왜구의 침범을 제어하기 위해 구라량(仇羅粱) 또는 구량량(仇良梁)이라 일컫는 수군의 만호영(萬戶營)이 있었던 곳으로 후에 고성 박도(樸島)의 사량(蛇梁)으로 옮겨간 유서 깊은 섬이다. 이 섬은 대방동(大芳洞)과 남해군 창선도 사이에 위치하며.창선과는 불과 250m 거리인 한려해상(閑麗海上)에 있다. 1985년에서 1986년 두 차례에 걸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주로 주거지와 조개더미 그리고 무덤유적 등을 조사했는데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류 453점.토제품21점.석기류 36점. 골각류 34점. 탄화미(炭化米)3알(粒). 철기.기타 등 무려 551점에 달하는 많은 양이 출토된 유적이다. 이 중 양이나 질에서 주목되는 유물은 토기였다. 토기에는 독(甕).항아리(壺). 굽다리독(合附甕). 굽다리바릿대(合附鉢).굽다리잔(高杯).뚜껑(蓋) 등 기종과 기형이 비교적 다양한 편인데 자름면 세모꼴의 덧띠아가리(斷面三角形口緣粘土帶)가 부착된 독이나 항아리가 표지적(標識的)인 유물이다. 따라서 이 유적은 삼각형점토대토기만이 검출되는 단순 유적이므로 이 토기를 <늑도식 토기>로 잠정 명명하고 있다. 또 토기중에는 야요이식토기편(彌生式土器片)도 출토되고 있으며.편년은 그 상한(上限)을 기원전 2세기 중엽에서 하한(下限)은 기원전 1세기 전반까지인 민무늬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로 넘어가는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사천지역은 아직 이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은 조사된 바 없으나 사천읍 구암리(龜岩里)∙두량리(斗良里).용현면 선진리(船津里)∙신복리(神復里)∙송지리(松旨里).곤명면 금성리(金城里).서포면 구랑리(九浪里). 그리고 본면 장산리(獐山里) 및 소곡리(所谷里) 일대에 산재한 분묘.조개더미 등 포함층 유적은 이 시기의 유구일 가능성이 매우 짙은 곳 들이다. 이 중에서 두량리와 본면 장산리 및 소곡리 일대에서는 이러한 시기의 유물을 수습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예로서 현재의 두량저수지(斗良貯水池)는 1930년대초에 축조되었는데. 그 당시 저수지의 방축(堤堰)을 쌓기 위해 저수지 일대의 흙을 파 옮길때 많은 선사유구가 파괴되어 거기서 출토된 토기 및 철기류는 모두 일본 사람들이 수습해 가다고 전해진다. 또 본면 장산리와 소곡리는 대체로 선사유적이 많은 곳인데 이들 유적은 급속도로 파괴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런데 소곡리는 지금도 금을 캐내는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야철(冶鐵)하던 곳이라 전해온다. 조선시대 문헌에 보이는 철장(鐵場)이란 이 곳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덧붙여 소곡리란 이름은 쇠 또는 금을 많이 캐낸 까닭에 붙여진 것으로 쇠실 또는 금곡(金谷).그리고 객방(客坊) 따위의 지명은 모두 철의 생산과 관련된 이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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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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