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第 1 節 서 언(序言)   본면의 지형은 예로부터 지리영산(智異靈山)의 지맥(地脈)이 동남으로 뻗어내려 그 줄기가 고성으로부터 다시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두 갈래의 래맥(來脈)이 서북방향으로 쭉 뻗고 있어 그리 평탄한 편은 아니다. 이와 같이 두 갈래의 맥룡(脈龍)은 점차 낮아져 그 말단부는 바다에 이어지며. 그리하여 형성된 협곡(峽谷)은 36.6㎢의 땅덩이를 포용하고 있다. 또한 그로부터 내려오는 맑은 시냇물(石澗水)은 사천강(연장 26km)의 젖줄이 되어 선상지(扇狀地)에 발달한 고랑원(古浪原)을 감돌고 서류하며 사천만에 들어간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흥무산(興霧山 453m)을 비롯해 이구산(尼丘山 360m).서낭당산(城隍堂山 209m) 등의 연봉이 남녁을 가로막아 있고 봉대산(鳳臺山 409m).어정산(御停山 352m).부봉산(浮蜂山 201m) 등은 병풍처럼 펼쳐져 북녘을 가로막고 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들 군봉(群峰)은 오랜 이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말없이 간직해 온 산들으로서 그 의연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때문에 조용히 정관(靜觀)할 수로 그 정취(情趣)를 더해주는 유서 깊은 명산들이다.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남도 사천시(泗川市)에 딸린 본면은 시에서 제일 먼저 해돋는 동쪽에 위치하는 까닭에 정동면(正東面)이라 불리운다. 따라서 시의 형상(形狀)이 마치 양날개를 활짝 펼치고 비상(飛翔)하려는 봉접(蜂蝶)형국인데. 그 오른편 날개죽지의 상단부가 바로 본면에 해당된다. 면의 동쪽은 고성군 상리면(上里面)과 경계하고. 남은 본시 사남면과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접하고 있다. 또 서쪽은 평야지대로서 진주~삼천포간 국도를 경계로 하여 사천읍과 이웃하며.북쪽은 역시 사천읍의 일부와 진주시 금곡면(金谷面)과 상접한다. 고성 선당산(仙堂山)에서 발원(發源)한 사천강이 면의 중앙부를 서류하고. 강의 상류를 따라 사천과 고성을 잇는 포장국도 33호선(1920년경 개통)이 면의 중앙을 동~서방향으로 지나며 또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국도 3호선(1909년에 개통)과 이어진다.

  이에 면사무소가 있는 대곡리(大谷里)를 비롯 고읍(古邑), 예수(禮樹), 화암(花巖), 풍정(豊井), 수청(洙淸), 장산(獐山), 감곡(甘谷), 학촌(鶴村), 소곡(所谷)등 10개 법정리와 20개 행정리로 구성돼 있다.   한편 사천강 유역에는 대체로 구릉 선상지가 많으며 구획정리와 수리시설이 잘 된 평야가 펼쳐져 시 내에서 으뜸가는 농업여건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면의 서부는 기름지고 수원이 풍부한 고읍들(古浪原)의 농경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특히 진, 삼국도변에는 최근에 일기 시작한 주거공간의 아파트촌이 즐비하게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동부지역은 그다지 험악치 않은 산지가 중첩돼 있어 일찍이 산지개발로 산자락에는 거의 대부분이 밤나무 및 감나무 밭이 조성되어 지금은 큰 소득원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생산되는 단감은 그 품질이 우수하여 사천단감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본면의 주민들은 검소한 기풍과 근면성으로 미, 맥생산(米麥生産)의 전통영농 이외 일찍부터 산지개발에 의한 과수재배. 축산등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주민소득이 비교적 높은 삶의 터전을 일구어 놓았다.   그러면 본면에 일찍이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참으로 그 상한(上限)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예컨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문화의 발상(發祥)은 주로 바닷가나 큰강 유역의 기름진 땅에서 연유하였듯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도 바다와 강을 끼고 있을 뿐 아니라 풍토의 환경성(環境性)과 역사성에 비추어 선상지에 잘 발달한 기름진 땅의 풍부한 산물을 바탕으로 일찍이 청동기시대부터 농경문화(農耕文化)가 잉태(孕胎)되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하늘의 기온 또한 온화하여 그야말로 자연의 혜택을 두루 갖춘 고장으로서 청동기시대 뿐만 아니라 초기철기시대 및 원삼국시대로 이어지는 선사유적(先史遺蹟)이 본면에 집중되어 있고 또 수습(收拾)된 유물이나 예로부터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와 지명 등에서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들 유적은 본면의 수청리를 비롯 장산리. 학촌리. 소곡리 일대의 구릉과 하천변에 널리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들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에만 온전히 제 빛을 발할수 있는 법인데 지금은 필요에 의해 경지구획정리로 말미암아 거의 빛을 잃고 소멸되었다. 특히 ‘지석곡(支石谷)’이라 일컫는 장산의 노천(魯川)마을 남쪽 산자락에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묘제(墓制)라 할 수 있는 고인돌무덤(支石墓群)이 집중돼 있었던 곳이다. 이 일대의 유물로는 돌칼(磨製石劍).돌화살촉(石鏃).돌도끼(石斧)등의 석기류와 민무늬토기조각(無文土器片).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붉은간토기조각(丹塗磨硏土器片)의 토기류와 기타 유물들이 이미 1930년대부터 수습된 사례가 있었다. 또한 소곡리 신월(新月)마을 일대에서는 최근 돌깐무덤(敷石墓)12기를 학계에서 발굴 조사한바 있는데. 보고서에 따르면 여기서도 민무늬 및 붉은간토기조각과 화살촉 및 가락바퀴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청동기시대의 유적임을 입증한 바 있다. 이외에도 단편적으로 수습된 사례가 많지만 여기서는 생략코자 한다.

  역사 속에서 뚜렷히 찾아지는 사천의 연원(淵源)은 이른바 ‘사물(史勿)’이란 조그마한 부족국(部族國)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이름이 사물인 것은 수향(水鄕)의 뜻을 지닌 이곳이 포상8국(浦上八國)의 하나로서 사물국의 땅이기 때문이다. 포상팔국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잠깐 이야기되는 변한(弁韓)지역 가운데 3세기 초엽(209년).경남 남서해안에서 여덟 나라로 형성된 해상의 세력집단이 서로 연모(連謀)하여 가라(加羅:伽倻)를 치려다 신라에 의해 격퇴 당했다는 기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이 그 세워진 때를 비롯하여 흥망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됨직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가야사(伽倻史)에 대한 활발한 연구성과와 또 음운학적(音韻學的)으로 지명의 유래를 풀이해 보더라도 사물국이 사천의 연원임이 고찰(考察)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脈絡)에서 ‘사물재 석계. 사수재 고읍.금칙사천야(史勿在石溪,泗水在石邑,今則泗川也)’라는 말이 전한다. 이말의 뜻은 즉. 사천시의 읍기(邑基)가 본래 사물국인 때는 본시 용현면 석계리에 있었고.사수라 불리우던 때의 읍기는 본면 고읍리에.그리고 지금의 읍기는 사천읍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볼때 사천의 건치연혁(建置沿革)은 오랜 시공(時空)을 거쳐 오는 동안 행정치소(行政治所)의 중심이 되는 읍기의 소재지가 세 번씩이나 바뀌었다는 것이고.따라서 성읍국가(城邑國家)형태의 사물국(史勿國)이 사물현(史勿縣)으로 강등돼 사수현(泗水縣).사주(泗州).사천현(泗川縣).그리고 오늘의 사천시(泗川市)의 이름으로 변천돼 온 것이다. 이런 과정을 살펴볼 때 기원 5세기를 전후하여 이후 조선초기(1445년)까지 약 1000년 동안 본면은 줄곧 행정치소의 중심이 되어 왔음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지명의 연원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낭당산성(도지정문화재 제132호)의 존재와 고현지(古縣址)의 고읍이 모두 정동면에 있기 때문이다.   또 지명에 있어 사물(史勿)의 이두(吏頭)가 사수(泗水)라는 한자음으로 훈차(訓借)된 이래 사수가 사주(泗州)로 사주가 사천(泗川)으로 바뀌게 된 시기는 모두 읍기가 본면에 있을 때였다. 특히 사수가 사주로 된 것은 고려왕실과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른바 ‘풍패의 땅(豊沛之鄕)’이라 하여 그렇게 높임을 받게 된것 다. 풍패의 땅이란 임금(漢高祖)의 고향이라는 고서(故書)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본면은 사천목씨(泗川睦氏)와 사천이씨(泗川李氏)의 본관(本貫)이기도 하다.   0이후 본면에서의 읍기가 지금의 사천읍으로 옮겨간 내력은 조선 초기 병조참판(兵曹參判) 신인손(辛引孫)이 세종의 명을 받고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사천 읍성을 축성(1442)한 데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4년후인 1445년(세종27년)에 이르러 비로소 읍기를 읍성안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로써 본면은 고현지의 상주내면(上州內面)과 동면(東面)으로 양분하게 되고 또 옛 읍기라는 뜻의 고읍이란 지명이 생긴 것이다.   끝으로 현재 본면이 관할하고 있는 법정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4년부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줄곧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면사무소는 고읍리에서 현재의 위치 (처음은 대곡리 숲)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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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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