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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진주하씨(晋州河氏) 시랑공후(侍郞公后) 양정공파(襄靖公派) (학촌)   진주하씨(晋州河氏) 세 파(派) 가운데 시랑공계(侍郞公系)는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 절신(節臣)의 한 사람인 휘(諱) 공진(拱辰)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공(公)은 현종조(顯宗朝) 초기 난국을 뛰어난 외교로 극복하고 또 스스로 볼모가 되어 적국에 끌려 갔으며, 요주(遼主 : 글안의 聖宗)의 온갖 우대와 회유를 물리치고 환국(還國)을 도모타가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이같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절개(節介)는 고려인의 기백(氣魄)과 민족정신을 적국에서 꽃다웁게 발로한 그 대표적 예로서 후세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문종 6년(1052)에 공부시랑 동평장사(工部侍郞同平章事)에 추증되고 인하여 형상(形象)을 그려 공신각(功臣閣)에 모셨으니 그 사적(事蹟)이 고려사에 상세(詳細)하다. 진주시 남성동 성지내(城址內) 경절사(擎節祠)에 제향되었다.   파계는 시조로부터 10세를 전후하여 문충공파(文忠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양정공파(襄靖公派), 운수당공파(雲水堂公派) 등으로 나뉘어지고 대(代)를 이어가다가 다시 여러 갈래로 분파(分派)되어 나갔는데, 여기 양정공(襄靖公) 파조(派祖) 12세손 경복(敬復)은 병판공(兵判公) 승해(承海 : 11세)의 장자이며, 태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한 문충공 윤(崙)은 그의 삼종숙(三從叔)이다.   경복(敬復)은 1377년(우왕 3)생으로 자는 군팔(君八)이요, 관직은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 시호는 양정공(襄靖公)이다. 태종 10년인 1410년에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하여 첨지총제(僉知摠制)를 시발로 경원(慶源), 경성(鏡城) 등 북방의 군사요새지를 수어(守禦)하는데 공을 세웠다. 뒤에 경성등처병마절제사(鏡城等處兵馬節制使), 동지총제(同知摠制)를 거쳐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로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겸하였다. 1432년(세종14)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내직(內職)에 들었으며, 이듬해 <계축진설(癸丑陳設)>의 병서 편찬을 총재하여 이를 진도(陳圖)와 함께 주인(鑄印)으로 간행하여 군사교육의 교재로 삼았다. 그동안 북쪽 국경의 수비에 15년간을 담당하여 그곳 주민들을 안무하고 야인(野人)들을 잘 타일러 변방 수어에 만전을 기했다. 그 훈로(勳勞)로서 임금으로부터 세 번이나 어찰(御札)이 내리고 또 열 번이나 상을 받았다. 당시 궁중에서는 ‘경모안재(卿母安在)’라는 말이 유행하기까지 했다는데, 이는 세종 임금이 그가 평소에 효성이 지극한 것을 알고 때때로 그의 어머님의 안부를 물어오라는 특별내관(內官)을 둔데서 비롯되며 또 그에게 내리는 어찰을 전하는 전임 내관까지 있었다 한다. 경상도 병마도절제사를 끝으로 향년 62세에 타계하니 임금의 명으로 예장(禮葬 : 지금의 국장에 해당)되었다.   13세손 한(漢)은 양정공의 아들 형제중 맏이로 태어났다. 부조(父祖)의 뒤를 이어 무과에 오르고 일찍부터 무용(武勇)에 뛰어나 이름을 날렸다. 세종대로부터 세조대에 이르는 4대에 걸쳐 입추원(入樞院)하기 네 번, 외직으로 여덟 차례나 건장절(建將節 : 첨절제사, 목사, 처치사, 도절제사 등의 관직)의 중임을 맡아 완수 하였다. 어느날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앉아서 상참(尙參 : 여러 신하가 정사를 아뢰는 일)을 받고 문득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가 양년(讓寧)을 보면 사냥이 생각나고, (중략) 하한(河漢)을 보면 정벌(征伐)이 생각난다.”고 하였다. 이는 군신간(君臣間)의 두터운 신임으로 맺어진 지우(知遇)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벼슬이 자헌대부 판중추부사(資憲大夫判中樞府事)에까지 오르고 시호는 강장(剛莊)이며, 이로써 부자 2대가 연시호(連諡號)를 하사받았다.   15세 순(順)은 강장공 한(漢)의 제4자인 계부(季傅 : 14세)의 둘째 아들로서 품계(品階)는 종사랑(從士郞). 이분께서 조향(祖鄕)인 진주 땅 월항리(月恒里 :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에서 처음으로 입사천(入泗川), 유서깊은 고자실(古自谷 : 학촌)에 정착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입향조의 묘소는 실전)   18세 춘련(春璉) 무과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조고(祖考)는 취인(就仁 : 順의 아들), 부조(父祖)는 추령(樞齡 : 17세).   19세 한운(澣雲) 무과 선략장군(宣略將軍).   20세 홍원(弘源) 무과 충의교위(忠毅校尉)   23세 응표(應杓) 자 천거(天擧), 호 사빈당(泗濱堂), 무술생(1718년) 한학자로 이웃을 도우며 후진양성과 한학(漢學) 보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사친(事親) 지효(至孝)하여 당상하여는 슬퍼하며 몸을 상했고, 삼년을 묘 옆에 막을 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유고(遺稿)가 전하며 한 편의 시(詩)에,      “해돋는 학촌(鶴村) 죽림에 옛꿈이 아득하고, 학산은 높이 솟아 강물은 서쪽으로 흐르도다. 유어는 때때로 뛰놀고 갈매기 모여드니, 가히 늙도록 사빈다락에서 한평생 마치겠도다.   (暘谷竹林舊夢迷 鶴山高聳水西流 遊魚時躍盟鷗集 可能終使泗濱樓)”고 읊었다.   묘 고자실 정산(丁山).      그의 친제(親弟) 응삼(應參: 자 天與) 또한 효행이 지극했으며, 선행(善行)에 힘쓰고 악한 일에는 끊는 물에 손넣기와 같았다고 한다. 형 응표와 같이 구몰(俱沒)하니 세칭 효목(孝睦)한 집안이라 이름 났었다.   시조의 12세손인 양정공(襄靖公) 경복(敬復)의 증손 순(順)자 할아버지가 정동 학촌에 처음 입향하여 몇백년 동안에 자손이 번성(繁盛) 16대까지 세거해 왔는데, 지금은 모두 연고지(緣故地)를 떠나 경향(京鄕) 각지에 거주하고 있다.   입향조 이후 주요 인맥(人脈)으로는, • 29세손 종구(宗九) : 적명 치구(致九). 문중원로 • 29세손 성태(性泰) : 문중 대표이며, 경남모직(주).한국합섬(주) 대표이사 역임, 서울거주 • 29세손 순기(舜基) : 부산 성남초등학교 교감 • 29세손 정기(廷基) : 고성우체국 우편주임 • 30세손 연조(連祚) : 적명 만영(萬榮), 서울성도비니루산업사 대표 • 30세손 자평(滋平) : 적명 만복(萬福), 부천 한일서점 경영 • 30세손 한수(漢水) : 적명 현수(賢洙), 부산 진양상사 대표 • 30세손 윤주(潤柱) : 부산항만청 계장 • 30세손 갑수(甲洙) : 태광산업(주) 생산과장 • 30세손 응수(應洙) : 이장 역임 • 30세손 동수(東洙) : 서울대졸, 동대학원 수료, 공학박사 학위 취득(在美) • 31세손 준형(俊馨) : 현대방송국 영상사업부 근무 • 31세손 용운(龍雲) : 수협중앙회 부산지회 근무 • 31세손 병철(炳哲) : 종손으로 진주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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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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