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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6.露粱海戰   선조 31년(1598)10월 이후 왜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아군은 조선 침략의 원흉 도요또미(豊臣秀吉)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철수하려고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에 앞서 해상의 이순신은 전년 9월의 명량대첩(鳴梁大捷) 이후로 본영인 우수영이 황폐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듬해 2월 이후로는 지금의 완도(莞島)인 고금도(古今島)를 통제영으로 정하고 있었다. 그 해 7월에는 수사 진린(陳璘)의 명나라 수군이 대거 내원하여 고금도에 합세한 이후 진린이 위세를 믿고 방자하여 한때 말썽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진린이 점차 이순신의 인격과 능력에 감복하여 이순신은 명군의 군기(軍紀)를 감독하는 권한까지 얻고 사실상 조․명연합함대의 총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이즈음 8월 18일 왜국의 괴수 도요또미가 병사(病死)하니 ‘상(喪)을 감추고 회군케 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이 철수를 개시하게 되어 전국(戰局)은 일변하고 이었다. 이 틈을 타서 유정의 서로군(西路軍)이 육상에서 9월 20일에 순천 방면을 공격하고,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연합함대가 해상에서 이를 봉쇄하니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는 진퇴양난에 빠져 쉽사리 철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적장 고니시는 명나라 제독 유정과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퇴로의 허락을 섭하여 이들의 허락을 받았으며, 필경엔 이순신에게까지 뇌물을 보내와 같은 교섭을 벌렸으나 이순신은 단호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 무렵 왜군의 다른 장수들은 예정대로 주둔지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사천의 시미즈(島津義弘)는 8천여 명(11월 17일 병선 5백여 척에 싣고 신채선창을 떠남), 남해섬의 소오(宗義智)는 1천명의 병력을 각각 배에 싣고 창선도(昌善島)에서 기다리고, 고성의 다찌바나(立花統虎)·다카바시(高橋統增)는 7천명의 병력을 싣고 거제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한이 지나도 고니시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부산포에 있던 데라자(寺澤正成)와는 거제도에 들러 그곳 장수들과 함께 창선도로 달려왔다.

  이순신은 이 기회에 적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여 마지막 적병의 하나라도 더 섬멸하여 임진 7년동안 온갖 분탕한 왜군을 복수하고 또한 후환(後患)을 없애려는 비장한 의도하에 진린을 설득시켜 조․명군이 합동작전을 펴기로 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고니시는 매우 놀라 창선도의 시마즈가 지휘하는 수군을 급파하여 곤경에 빠진 지기네를 구원해 주도록 요청하니 시마즈 등은 고니시의 퇴로를 마련키 위해 전선 500여 척을 이끌고 11월 18일 밤에 노량으로 공격해 왔다.   아군도 물목이 좁은 노량해협(露梁海峽)에서 적과 조우(遭遇)하며 싸우기로 하고 명군 제독 진린의 부장(副將) 등 등자룡(鄧子龍)과 아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선봉에 서서 함선 5백여 척. 병력 1만5천여 명이 출동하게 되었고 그 군세는 피아(彼我)간에 비슷하였다. 출전에 앞서 이순신은 비장한 각오로써. “이 나라 원수를 섬멸할 수 있으면 이제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고 기원한 다음, 함대를 이끌고 급히 노량으로 항진하였다.   이에 연합함대는 자정(子正) 가까이 노량해협의 서쪽 어귀 대도(大島)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남동으로 뱃머리를 돌려 남해도 북서간의 관음포(觀音浦) 부근에, 명나라 수군은 동북으로 진출하여 곤양 땅 죽도(竹島:현 하동군 죽도)에서 좁은 물목인 노량(남해대교 아래의 바다)에 적선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9일 새벽2시께 척후선의 복병장 이순신(李舜臣)으로부터 적의 함정들이 개미떼 같이 동쪽 초입(初入)에 당도했다는 첩보가 날아왔다. 이로써 아군은 좌협(左峽)에 있던 진린의 함대와 우협(右峽) 관음포 부근에 있던 이순신 예하의 함대가 적의 측면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항진했다. 모든 것이 이순신의 계획대로였다.

   아군은 거리낌없이 적 함대의 중심을 뚫고 호준포(虎蹲砲)·위원포(威遠砲)·벽력포 등과 천·지·현·황의 총통을 퍼붓고 때로는 불붙은 섶단을 던지고 화전(火箭)을 퍼부우니 적선은 선수를 돌릴 틈도 없이 부서지고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였으며, 게다가 좌우 엄격(掩擊)으로 화살을 빗발같이 쏴 맞치니 왜적들은 당황하여 아우성치고, 서로 부딪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마치 호랑이떼가 숱한 이리떼를 좁은 골짜기에 몰아넣고 무서운 기세로 짓밟고 나아가는 형국(形局)이었다. 해협 중간쯤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좌측 1백여 보(步)쯤 나타난 명나라 수군의 배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진린의 부총장 등자룡이 탄 배였다. 그러나 한 순간 등장군의 배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같은 명나라 수군에서 던진 진천뢰(震天雷)가 그의 배에 잘못 떨어져 많은 사상자를 내고 불까지 일어났다. 이를 지켜보던 이순신은 그들을 옮겨 태우려고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어느 틈에 다가온 적선의 기습을 받아 등자룡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무렵 왜적의 층각선(層閣船) 한 척이 또 나타났다. 이에 이순신은 이 층각선을 향하여 독전(督戰)하는 북소리를 울리며 방향을 돌려 적장을 화살로 쏘아 죽이면서 추격하자 그들은 도망쳤다. 이순신은 한놈도 그냥 돌려 보낼 수 없다는 굳은 결의로 적의 뒤를 추격하는 숨가쁜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를 어찌 하늘의 뜻이라 해야 할지……   손수 북채를 쥐고 부하들을 독려하며 허겁지겁 쫓아가는 왜군의 뒤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적의 탄환(彈丸)에 왼쪽 겨드랑이를 관통하였던 것이다. 공은 숨을 거두시면서도 곁에 서 있던 맏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을 향하여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 적이 내가 죽은 것을 못보게 하라! 그리고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발설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긴 채 장렬한 최후를 마치시니 향년 54세, 때는 선조 31년(1598)12월 16일(음력11월19일)이른 아침이었다.   아들과 조카는 통곡을 삼키고 공의 시신을 그가 평소에 기거하던 선실로 옮겼다. 유언대로 어른이 돌아갔다는 말을 내지 않기도 벅찬 일이었다. 그리하여 공의 죽음을 안 사람은 <회>와<완>그리고 사노 금이(金伊)를 합하여 세사람 뿐이었다. 공의 아들이 계속 북을 울리면서 지휘하였고, 깃발도 휘날리고 있어 직속 군관 송희립(宋希立)도 이 사실을 미쳐 몰랐던 것이다.   이날 적들은 거의 전멸상태에서 시마즈․소오 등은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남은 함선 50여 척을 이끌고 거제도 방향으로 도망쳤으며 고니시란 놈도 이 틈에 몰래 묘도(猫島) 서쪽 해협으로 빠져나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로써 마지막 벌렸던 노량해전은 승첩(勝捷)으로 끝맺음 하고.특히 시마즈(島津義弘)에게는 사천 신채(新寨) 싸움의 치욕을 설욕(雪辱)한 복수전이기도 하였다.

  이 노량대첩(露梁大捷)에서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올린 치계(馳啓)를 살펴보면.      “본월 19일 사천·남해·고성의 왜함선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에 이르렀다.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곧 바로 나아가 적을 맞아 싸우고 명군 또한 합세하여 나아가 싸웠다. 왜적이 대패하여 바다에 빠져 죽은자는 혜일 수가 없고 왜선 200여 척이 패몰(敗沒)하여 사상자가 수천명이나 되었다. 왜적의 시체와 패선의 목판과 병기, 의복 등이 바다를 덮고 떠서 물이 흐르지 못할 지경이며 바닷물은 피로 온통 붉게 물들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흥양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 10인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잔적(殘賊) 100여 척이 남해로 달아났다.”고 하였다.(《선조실록》선조 31년 11월 무신조)      이리하여 승전고(勝戰鼓)는 검푸른 남해에 울려 퍼졌고, 또한 악몽(惡夢)과 같았던 임란 7년의 전쟁도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짐짓 승리의 주역인 이충무공(李忠武公)은 말이 없었다.   싸움이 끝나면서 명나라의 진도독(陳都督)은 충무공의 대장선(大將船)으로 가까이 달려와서 “통제공 어서 나오시오”하고 부르자 이때 완(莞)은 그제사 울며 대답하기를.“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니 진도독은 이 말을 듣고 깜짝놀라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며 “죽은 뒤에도 능히 나를 구원해 주었구려”하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명수군 전체가 이충무공이 순국(殉國)하신 것을 알고 비로소 통곡하기를 시작하여 그 소리가 바다를 흔들었고, 그 부음(訃音)이 퍼지자 온 천하가 통곡(痛哭)하였던 것이다.   그후 진도독은 선조에게 상서(上書)한 가운데 충무공을 평하여 “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이라고 격찬하였으며, 일본의 어떤 학자는 이순신의 전사를 평하여 영국의 넬슨의 죽음에 비견하고.“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겼다”고 했다.또한 “그는 실로 임진왜란에 있어서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3국을 통하여 제1의 영웅이었다.”고 하였다.   덧붙여 충무공 휘하에 들어가 노량해전에서 용맹을 떨치고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卷)에 오른 강수인(姜守仁:晋州人)·신백철(申伯喆:平山人)·이안국(李安國:陜川人) 등 3공신(功臣)은 모두 우리 고장출신의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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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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