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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5.朝․明聯合軍의 泗川전투 1)彼我間의 文戰兵力   무술년(1598)10월 1일 육지에서는 최후로 벌였던 사천 신채싸움에서 중로의 조.명연합군측과 왜군의 관계 장령(將領) 및 병력을 비교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피아의 관계 장령 및 병력 비고
조·명연합군의 장령 및 병력 왜군의 장령 및 병력
ο동정군(東征軍) ο사천방면의 왜군
제 독 동일원(童一元)주 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 총 병 조승훈(祖承訓)부 장 시 마 즈 다다즈네(島津忠恒)
부 총 병 장 방(張 榜) 〃 가와카미 다다노리(川上忠實)(중상)
중 군 방시신(方時新)(병사) 〃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
〃 모국기(茅國器) 〃 가와카미 히사도모(川上忠智)
〃 팽신고(彭信古) 〃 이 쥬 인 다다자네(伊集院忠眞)
〃 노득공(盧得功)(전사) 〃 가와카미 쭈우게이(川上忠兄)
〃 학삼빙(奄三聘) 〃 미하라 시게다네(三原重鍾)
〃 섭방영(葉邦榮) 〃 다네가지마 히사도끼(種字島久時)
〃 시등과(柴登科) 〃 사가라 요리도요(相良賴豊)(전사)
〃 도 관(塗 寬) 〃 히라다 소오이(平田宗位)
〃 마정문(馬呈文) 〃 하나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
〃 남방위(藍芳威) 〃 호꾸고오 미하사(北鄕三久)
〃 사도립(師道立) 〃 신노오 다다마즈(新納忠增)
〃 안입본(安立本) 〃 이찌기 세이쥬로(市來淸十郞)(전사)
감 군(監軍) 양조령(梁祖齡) 〃 세도구찌 야시찌(瀨戶口彌七) (전사)
소 계 26,800명 〃 이세 사다마사(伊勢貞昌)
· 아군측 (경기· 황해· 경상우도)
종 군 이항복(李恒福)(우의정)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
※ 시마즈 다다즈네(島津忠恒)는 주장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셋째 아들.
소 계 2,215명
병력합계 29,015명병력합계 8,000여명

  위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적은 8천여 병력으로 아군의 약 1/4정도였다. 동정군의 중로제독 동일원(董一元)은 약 3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사천 방면의 시마즈군(島津義弘)을 치기로 하여 성주(星州)를 떠났는데 이 때 주력군의 큰 대열은 정기(旌旗)가 산야(山野)에 가득하고 진군의 북소리와 나각(鑼角) 소리는 천지를 뒤흔드는 듯 하였으며 형형색색의 무구(武具)와 창검의 섬광(閃光)이 만산홍엽(滿山紅葉)고 더불어 더욱 찬란하였다. 그리하여 진군의 대열은 합천․삼가를 거쳐 진주에 당도한 것은 9월 19일이었다.   진주에서 남강을 건너면 바로 망진(望晋)이고 거기서 동쪽으로 10리 거리에 영춘(永春)이 있었는데 두곳에 다같이 왜군이 세운 성채(城寨)가 있었다. 남강 서쪽40리에는 곤양성(昆陽城)이 있었고 또 망진에서 남쪽으로 25리쯤에 사천성(泗川城:읍성)이 있었는데 동정군에서는 이것을 사천 구성(舊姓) 또는 노영(老營)이라 하였다. 이 사천성에서 서남쪽 17리 바닷가에 왜채(倭寨)가 있어서 아군은 통양창성(通洋倉城) 또는 법질도성(法叱島城)이라 하고 동정군에서는 단지 신채(新寨)라고 했는데 여기에 적장 시마즈가 그 아들 다다즈네와 함께 포진하고 있는 본진이었다.(현 船津里城)   신채는 지형상 사천만의 중간지점인 동안(東岸)에 위치하여 서·남·북 3면이 모두바다에 임하고 동쪽 한 면만 육지와 연달았는데 높은 고지에 오르면 사천바다를 훤히 다 볼 수 있는 전략상 천혜의 수륙 요충이었다. 이곳에는 본래 고려 초부터 12조창(漕倉)의 하나인 통양창(通陽倉 : 조선시대는 通洋倉)이 설치되어 조선 초기가지 조운(漕運)의 발진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그 당시(고려말)왜구(倭寇)의 빈번한 침탈에 대비 조창을 지키기 위해 3.086척에 달하는 창성(創成)을 축조했던 것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왜군이 남해안으로 퇴각하면서 전해 겨울동안 적장 10여명이 이 창성을 수축하고 성 둘레에 목책(木柵)을 두르고 배수진(背水陣)을 쳤던 것이다.   이 때 적장 시마즈는 남원․전주․해남 등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노략질 하다가 전해 10월 28일경 사천 지방으로 돌아와 이곳 통양포에 수축한 신채에 주둔하고 사천에서 진주에 이르는 요해(要害)에 진영을 설치하는 한편 사천구성 및 곤양성도 수축하여 휘하병을 분주(分駐)시켰다. 진주성에는 미하라(三原重種)를 유병(留兵)시키고 망진채에는 동정군의 도하남진(渡河南進)을 저지할 양으로 데라야마(寺山久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영춘채와 사천구성에는 가와카미(三上久智)와 다다노리(川上忠實)로 하여금 각각 수비케 하여 진주 남강을 최전 방위선으로 삼고 또 망진·영춘·사천의 3성을 신채의 전진 방어진지로 삼고 있었다. 이와 같은 포진형태는 좌로 서쪽의 곤양성과 우로는 멀리 동쪽의 고성성(古城城)이 두 날개가 되고 남쪽 뒤로는 남해를 통하여 신채 밑에는 수백 척의 함선이 정박하고 있어 이곳을 거점으로 한 시마즈의 8천여 병력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와 맞선 조․명연합의 중로군 전투 서열은 위 도표에서와 같이 제독 동일원 휘하의 모국기(茅國器)·팽신고(彭信古)·섭방영(葉邦榮) 등이 선봉 유격장이 되고 마정문(馬呈文) 남방위(藍芳威)가 좌익 유격장이 도고 학삼빙(郝三聘)·사도립(師道立)이 우익 유격장이 되었으며 본진은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장방(張榜)이 맡아 총 병력은 2만6천8백명인데 여기에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경기․황해․경상우도의 3도병력 2천2백여 명을 합치면 총병력은 약 3만명을 헤아렸다. 병력수의 비교에 있어서는 왜군보다 중로군이 월등하게 우세한 편이었다. 본진에 앞서 먼저 진주에 진출한 선봉유격 남방위는 남강북안에 있던 적의 경계병을 강남으로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이때 망을 보고 있던 적병 100여 명을 불시에 습격하여 당황하는 적병 50여 명의 목을 한꺼번에 베어 버렸으므로 나머지 적은 단숨에 강남으로 도망쳐 달아났다.또 중로군의 가장 선봉으로 나섰던 유격장 모국기는 일부 군사를 강남으로 건너가게 하여 사천 방면의 적정을 살피게 하였다. 이때에 망진채를 지키고 있던 적장 데라야마(寺山久兼)는 군사를 풀어서 경계하는 기세가 역역하였다. 중로군은 이로써 남강 이남에는 강력한 적이 점거 중인 것을 확인하게 되었으므로 제독 동일원은 주력군을 직접 거느리고 야행군(夜行軍)으로 급히 달려 진주성안으로 들어가게 되니 이날이 9월 1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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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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