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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4.朝․明聯合軍의 反擊作戰   한편 왜군의 북상 때부터 대군을 파병하여 왜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명나라는 소사평(小砂坪)전투에서 승리하자 더욱 힘을 얻어 공세작전을 펴게 되었다. 그 첫 목표는 울산성(加藤淸正)·양산성(黑田長政)·창원성(鍋島直茂)·고성성(毛利吉成)·사천성(島津義弘)·남해성(宗義智)·순천성(小西行長)의 왜성들 중 최북단에 있는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이었다.   그것은 가장 호전적(好戰的)인 가또오 기요마사를 사로잡음과 동시에 울산성 공취를 기점으로 해안을 근거로 한 왜적을 하나씩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이때 가또오는 전라·충청도 방면으로 진출하였다가 앞서 재침로의 도표에서와 같이 청주에서 북상이 저지되자 10월 초순경 본거지인 서생포로 퇴각하여 장기주둔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울산의 도산(島山)에도 1만6천여 병력을 투입하여 같은 해 12월22일경 거의 왜식의 축성을 완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명나라의 총독군문(總督軍門) 형개(邢玠)는 이 울산성을 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전투서열을 지정하였다. 즉 좌군(左軍 : 左協)은 부총병 이여매(李如梅)가 지휘하는 보기(步騎) 1만 2천여 명 중군(中軍 : 中協)은 부총병 고책(高策)이 지휘하는 보기 1만1천6백여명, 우군(右軍 : 右協)은 부총병 이방춘(李芳春)과 역시 부총병 해생(解生)이 공동 지휘하는 보기 1만1천6백여 명 등 합계 3만5천3백여 명이었다.그밖에 팽우덕(彭友德)․양등산(楊登山)․파새(擺賽:소사평전 때의 유격장)․유성(維城)등 4장수가 지휘하는 양호(楊鎬)의 직속부대 9천여 명을 합치면 총 병력은 4만4천3백여 명에 이르렀다.   따라서 조선군도 이에 합세하였다.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의 휘하 2천명과 한강을 지키던 평안도 군사중 2천명, 도합 4천명은 좌군과 협력하고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방어사 권응수(權應銖)·경주부윤 박의장(朴毅長)의 휘하 3천2백명과 함경도·강원도의 군사 2천여명, 도합 5천 2백명은 중군과 협력하고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과 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은 휘하 1천3백과 황해병사 2천명, 도합 3천3백 명으로 우군과 협력키로 하였다.   이리하여 도원수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의 병력은 1만2천5백명, 조선군과 명군을 합치면 총 병력은 5만6천8백여 명의 대군이었다. 그러나 이 병력을 모두 울산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전라도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고니시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부 병력을 순천 외곽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고 경상도 사천․창원 등지의 적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의령 방면에도 적지 않은 병력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순천과 의령으로 가는 군사들은 천안·전주·남원을 거쳐 현지로 향하고 울산으로 가는 본진은 문경(聞慶)의 조령(鳥嶺)을 넘어 경주로 향하였다. 이때 총독 형개는 서울에 남아 전후방을 총괄하기로 하고 제독 마귀(麻貴)가 우선 경주로 내려갔다.   12월 20일 경주에 집결한 조·명연합군은 대공세를 취하기에 앞서 다시 의논한 결과 부산 방면의 왜군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하여 양호는 일부 병력으로 양산과 기장을 공격하고 경상좌수사 이운룡(李雲龍) 휘하의 조선 수군을 서생포에 출동시킴으로써 부산 방면의 적을 견제하는 가운데 주력은 울산으로 진격하여 12월24일 마침내 본격적인 울산성(도산성)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군은 무서운 화력을 퍼붓고 돌격을 되풀이하는 한편 보급을 차단하여 내부로부터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성내에는 양식도 물도 제대로 없으니 기대할 만한 계책이었다. 그러나 적의 완강한 저항에 봉착하여 다만 660여 명의 적을 죽이고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으나 아군의 피해도 속출하여 일단 공격을 중지하였다. 게다가 서생포에 있던 가또오가 배를 타고 동해를 거슬러 울산성으로 들어왔고 그의 휘하 1만명과 구로다(黑田長政) 등 부산․기장․죽도 등지의 왜 주둔군이 내원하여 울산성 안팎에 포진하니 왜군도 2만여 명이 넘었었다.

  적 증원군에게 역으로 포위당할 위험에 빠지게 된 양호는 해를 넘겨 무술년(戊戌年)1월 4일 이른 새벽부터 최후의 총 공격을 가하여 화공(火攻)을 실시했으나 적은 비 오듯 조총을 쏘아 부치니 아군의 사상자는 날로 늘어만가고 명군이 가진 각종 총포로는 성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포위를 했어도 도산성은 바다 쪽으로 열려 있었기 때문에 부산 방면에서 배로 병력과 식량·무기를 얼마든지 실어오니 포위는 말뿐이었다. 더욱이 성 밖의 공격군은 산과 들에서 추위에 떨고 비가 내리면 찬 기운은 뼈가지 스며드는 상태여서 마침내 공격은 중단되고 말았다. 적 증원군의 내원으로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아군은 수많은 사상자의 손실을 입고 경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후 명나라는 울산성 공격 실패 후 수군을 포함한 증원군의 파견을 요청하고 무술년(1598년) 2월 수사도독(水師都督) 진린(陳璘)이 거느리는 500여 척의 명수군이 충청도 당진(唐津)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안동·상주·충주·예천·전주·직산·공주·수원 등지에 군대를 주둔시켜 적군과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적과의 대전을 회피하는 소극적인 방어를 계속하면서 재공격 준비를 진행하였다.   조·명 두 나라의 연합군은 해동기를 맞아 춘계 대공세를 준비하여 기동하였는바 이것이 유명한 동정군(東征軍)의 4로(路) 진격작전이었다. 아군의 경상우병사 정기룡도 이 작전 수행시 삼가현(三嘉縣)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적이 부근의 율원(栗林)에서 계속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이를 정벌하기로 작정하고 합천에 주둔하고 있던 명장 해생(解生)과 더불어 출정하게 되었다.   이때 아군의 병력은 3천여 명으로 사천을 근거지로 한 적장 시마즈(島津義弘)의 군사 2천여 명보다 우세한 편이었다.   선조 31년(1598)3월 24일 아군은 위세도 당당히 본진을 출발했는데 당시의 이 광경을 피력하기를.      “아군의 궁수(弓手)·사수(射手)·살수(殺手)의 정병들과 명군의 쾌창수(快槍手)·당파수(鐺鈀手)·낭선수(狼筅手)가 서로 무용을 자랑하면서 검광(劍光)을 번쩍이는 것이었고, 각종 소리가 주작(朱雀)·청룡(靑龍)·낙타(駱駝)·백호기(白虎旗)와 서로 호응하는 듯 하였으며 각종 기치와 표지들이 삼월 춘풍에 보란 듯이 나부끼는 것이었다. 또 각색의 갑옷과 구두, 그리고 군사들의 전복(戰服)과 각색 전마(戰馬)가 들과 산을 가득하게 하였으니 싸우기 전에 이미 살기가 등등하였고 결정적인 쾌승의 기상이 군사들의 미간(眉間)에 역역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넘치는 승전의 기세 아래 전진한 정기룡의 군사는 적과 최초의 접전에서부터 격파하였으며 쫓기어 산위에 도피한 적을 유인하여 급기야는 적을 포위 섬멸하자 “적의 머리와 사지가 공중에 날리고 그 피가 칠색 무지개 같았으며 쌓인 시체가 오색 수를 놓은 듯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삼가전투에서 아군의 별장(別將) 백홍제(白弘弟)는 선두에 서서 적 수백 명을 무찌른 수훈을 세웠다고 하였다.   남족 연해지역의 적군은 일차적으로 정기룡장군의 군사에게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창·함양·삼가 등 서북부 경남지역까지 출몰해 갖가지 살상·약탈 등의 만행을 거듭함으로 조·명연합군은 경상우병사 정기룡과 동정군(東征軍) 부총병 이녕(李寧)에게 2천명의 병력으로 거창 방면의 적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정하도록 하였다.   4월 20일 아군의 연합군은 진주에서 산청을 거쳐 함양으로 북진하는 적을 사근역(沙斤驛)에서 맞아 교전하게 되었는데 이때 부총병 이녕이 선두에 나서 적을 맹렬히 추격하다가 도리어 적의 복병에 의해 기습을 당하여 중상을 입고 전사하였다. 이에 분격한 아군은 정기룡을 선두로 적진에 돌진하여 마침내 함양지역의 적을 완전히 소탕하여 천추(千秋)에 쌓인 원한을 보기 좋게 풀었다. 사근역은 지금의 함양군 수동면으로 진주와 거창·전북 남원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 전투에서 부총병 이녕의 전사로 정기룡 장군이 동정군 중로(中路)의 장수를 겸임하여 뒤에 사천 신채(新寨)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재진격을 준비하고 있던 명군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3월말부터 도독 진린(陳璘) 휘하의 수군을 포함하여 부대를 동(東)·중(中)·서(西)·수로(水路)의 4로군(四路軍)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2월에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남하 중인 좌도독(左都督) 동일원(董一元) 휘하의 증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지지부진한 재공격 준비를 진행하는데 거의 반년을 보냈다. 이동안의 조선군은 국왕조차 밥쌀을 반으로 줄여야하는 극심한 식량난 속에서도 전력증강을 위해 노력하며 경남 각지에서 적과 접전을 계속했으나 본격적인 반격작전은 전개하지 못하고 명군의 재진격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가까스로 울산성의 실함(失陷)을 모면한 왜군은 곧 울산성의 보수에 착수하는 한편 1만여 명분의 군량을 비축하여 방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울산성전투의 고전으로 크게 심리적 타격을 받은 적장들은 울산·양산·예교(순천)의 3성은 유사시 구원하기가 곤란하다 하여 철거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가또오가 이에 반대하고 괴수 히데요시도 양산성만을 허락하였다.

   5월에 이르러 울산성의 수축이 끝나자 고바야가와(小早川秀秋)·우끼다(宇喜多秀家)·모리(毛利秀元)·아사노(淺野辛長) 등 7만여 명의 장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휴양하고 6만4천7백여 명의 적이 그대로 잔류하여 동쪽의 울산성을 비롯하여 중로의 사천·고성·서쪽의 남해·순천성을 수비하였다. 이들 제성의 적은 때때로 아군에게 화의(和議)를 제의하여 아군이 공세로 전환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견제(牽制)하는 한편 주둔지 인근에 출몰하여 약탈과 살육을 일삼기도 하였다.   또 조·명연합군은 전번 울산전투 대 수·육군의 협조가 결여되고 전 병력을 산성에만 지탱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제성의 적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구원작전을 펴도록 했던 전철(前轍)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울산·사천·예교의 3개성을 동시에 주 공격 목표로 삼아 이번에는 수륙합동작전으로 각각 격파하라는 구상에서 3월 말이래 주둔하고 있던 4로군 편성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이때 명나라는 증원군을 보충하였고 지휘관도 획기적으로 격상하였다. 즉 같은 해 6월 제독 유정(劉綎)이 1만2천명을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오는가 하면 8월 초에는 역시 제독 동일원이 1만3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당도하였다. 전에는 제독 마귀(麻貴)한 사람이었으나 이로써 세명의 제독이 합동작전을 펴게 되었고 다만 경리 양호는 울산성전투 때 허위보가 문제되어 본국으로 소환되고 대신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조선군과 협의하여 다음과 같이 부서를 정했다.   동로제독(東路提督) 마귀(麻貴)는 2만4천명을 지휘하여 울산성을 치되 평안병사 이경준(李慶濬)·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등이 이끄는 조선군 5천5백명이 이에 협력하고, 중로제독(中路提督) 동일원(董一元)은 2만6천8백명을 지휘하여 사천 신채를 치되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조선군 2천2백여 명이 이에 협력하고 서로제독(西路提督) 유정(劉綎)은 2만1천9백명을 지휘하여 순천성을 치되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이 이끄는 조선군 5천9백명이 이에 협력하고 이미 남으로 내려가 고금도(古今島)에서 이순신함대와 합류하고 있는 수군도독 진린(陳璘)은 1만9천4백명으로 바다를 경계하되 조선수군 7천3백명이 이에 협력케 하였으니 모두 합하면 실로 11만3천여 대병력이었다.   여기서 동로제독 마귀는 나이 들고 경험도 풍부한 노장군(老將軍)이었으나 서로의 유정은 너무 젊고, 중로의 동일원은 처음으로 조선에 나와 현지 사정에 어두운 것이 흠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늙은 마기의 은밀한 부탁을 받아들여 서로 유정에게는 조의정 이덕형(李德馨)과 도원수 권율(權慄)을 동행케 하고 중로의 동일원에게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을 종군토록 하였다. 이렇게 전투서열(戰鬪序列)을 갖춘 조·명연합군은 8월 하순 마침내 서울을 떠나 3로(路)로 일제히 남진을 개시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 8월 18일에 후술하는 바와 같이 임진왜란의 원흉(元兇)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가 거처하는 후시미성(伏見)에서 이미 병사(病死)하였다.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비롯한 모리(毛利輝元)·마에다(前田利家)·우에즈기(上彬景勝)·우끼다(宇喜多秀家) 등 소위 5대노(五大老)에게 모든 일을 부탁하고 조선에 출정 중에 있는 왜군들은 전부 철수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5대로는 그의 죽음을 아군은물론 왜군들에게도 극비에 붙이고 사자(使者)를 부산포에 보내어 전 침략군은 11월 15일까지 부산에 집결 본국으로 철수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10월 초순경에서였다.   따라서 아군과 왜군은 10월 초순까지 히데요시의 사망을 전연 알지 못한 채 최후의 혈전을 펼치게 되었다. 남진을 개시한 조·명연합군은 동로군이 경주(慶州), 중로군이 성주(星州), 서로군이 전주(全州)로 각각 남하한 다음 9월 19일을 기해 일제히 작전을 개시하였으며, 수군의 연합함대는 이보다 앞선 동월 15일을 기해 출동을 감행하였다. 선조 31년 1월초 울산성전투 이래 실로 9개월만에 조·명연합군은 최후의 일대 공세작전을 재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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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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