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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2) 朝鮮 水軍의 崩壞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모함을 당해 삭탈관직(削奪官職)된 후 대신 이 자리에 오른 전 경상우수사 원균이 정유년 7월 15일 처음 치른 싸움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전투가 이른바 칠천량(柒川梁)의 해전이다.

  이 전투는 이충무공이 닦아 놓은 조선 수군의 기반을 일시에 무너지게 했으며 제해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했던 뼈아픈 교훈을 남긴 해전이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왜군 후속부대의 상륙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직전에 고니시(小西行長)의 사졸 요시라(要時羅)는 지난날 이순신을 모함했을 때와 똑같은 수법으로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에게 아무 날에 왜군이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원균을 시켜서 바다로 나가 싸우도록 하라고 꾀었다.   이때 이미 웅천성(熊川城)의 적 수군장 도오도오(藤堂高虎)·와키자까(協坂安治)·가또오(加藤嘉明) 등은 군선을 제조하여 조선 수군과 결전할 준비를 완료하고 이순신에 비해 작전이 졸렬한 원균을 유인하여 일거에 섬멸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로, 이충무공이 부하들과 작전계획을 짜던 운주당(運籌堂)에 애첩을 데리고 웅크리고 있었는가 하면 충무공의 신임을 받던 역전의 장수들을 파면시키고 제규정을 멋대로 뜯어 고쳐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에 장수들은 전투가 벌어지면 도망갈 궁리나 하고 있었다.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은 육군이 현 전선에서 적을 견제하는 가운데 수군의 일부로 한산도 앞바다를 수비하여 후방을 지키게 하는 동시에 수군의 주력은 부산 방면에 출격하여 적의 상륙을 저지하고 제해권을 장악하려는 작전을 구상하여 원균에게 출동을 명령하였다.   이때 수군의 편성을 보면 원균은 전에 이순신이 맡았던 직책 그대로 3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그 휘하에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배설, 충청수사 최호(崔湖)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밖에 경상좌수사 이운룡(李雲龍)이 있었으나 그는 원균의 통제를 받지 않고 경주에 위치한 도체찰사 이원익의 직속으로 울산해역에서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적이 동해로 올라오는 경우를 상정하여 이를 경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사천에서 도원수 권율로부터 출동명령을 받은 통제사 원균은 7월7일 경상우수사, 전라우수사, 충청수사 등과 함께 3~4척의 거북선을 포함하여 전선 100여척의 함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항진했으나 적의 유인전술에 휘말려 고전하다 가덕도(加德島)에서 아군 400여 명을 잃고 거제도 칠천량에 정박하였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이 “지금 대적이 가까이 있고 우리의 방어능력은 매우 외롭고 약하니 용기로서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라고 하며 신중한 작전계획의 수립을 건의했으나 원균은 이를 물리치고 준비 없는 결전을 서두르고 배설이 다시 칠천량은 수심이 얕고 좁아서 함대의 지장이 많음을 들어 타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 역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도오도오(藤堂高虎)·와키자까(協坂安治)·고니시(小西行長)등은 수군을 안골포에 집결시키는 한편 가덕도의 시마즈(島津義弘)군 3천여 명을 거제도에 상륙시켜 칠천도 연안에 포진시키는 등 수륙양면 작전을 준비했다.   마침내 7월 15일밤 아군의 경계가 소홀함을 확인한 적이 웅천, 안골포의 대소함대 약 600여 척을 출동시켜 야간 기습을 감행하고 거제도의 적 육군도 대포를 쏘아 아군의 함선은 파괴되고 원균이 남은 함선을 수습하여 칠천량 서남방의 형도(荊島) 부근까지 후퇴하였으나 그곳에서도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적의 매복 공격을 받아 또 다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로 인해 원균은 고성부근 추원포(秋原浦:현 통영군 광도면)에 상륙하여 도망하다가 적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는데 전라우병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안세희(安世熙), 가리포첨사 이응표(李應彪), 함평현감 손경지(孫景祉) 등 뛰어난 장수들과 수 많은 병사들은 혹은 물에서 혹은 뭍에서 목숨을 잃고 조선 수군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직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왜적이 공격하자 사전에 한산도로 귀환하여 도민을 피난시키고 영사(營舍), 병기, 양곡 등을 소각한 다음 전라도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로써 이충무공이 피와 땀으로 건설된 조선 수군은 충무공이 백의종군하게 된 이후 지휘체계의 혼란을 겪게되어 끝내 칠천도(일명 溫羅島)앞바다에서 수장됨으로써 왜군의 정유년 재침은 계획대로 수륙 양면작전을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덧붙여 이 전투의 작전개시 동기만 살펴보아도 패전은 충분히 예견된 싸움이었다. 그것은 전투에 앞서 삭탈관직된 이순신으로부터 군량미 9천9백14섬과 화약 4천근, 각종 총통 3백정 등을 인수하고 마침내 3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오르게 된 원균은 당시 도원수 권율로부터 웅천·안골포 등지에서 전개된 소규모 작전의 실패 책임을 추궁당하고 곤장(棍杖)까지 맞기도 한 상태인데다 조정의 성급한 공격주문을 받게 되면서 감정적이고 무모한 전투를 벌렸던 것이다.   즉 도원수 권율은 원균이 웅천·안골포 등지로 출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초계의 원수부를 떠나 사천(泗川)에 내려와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천은 한산도와 초계의 거의 중간지점이었다. 수군이 부산 앞바다로 진격하여 좋은 성과를 올리면 남원에 와 있는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陽元)에게 명군의 출동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원균은 부산 앞바다는 고사하고 안골포와 가덕도 근해에서 잠시 접전하다가 한산도로 돌아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원균을 불러들이라”는 도원수 권율의 호령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사천 선창에서 배를 내린 통제사 원균은 그 길로 권율이 묵고 있는 사천성 객관(客館)으로 직행하여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때 조용히 입을 연 권율은 “내가 처음 출격을 명령한 것은 지난 5월 초였소. 그후 계속 독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언 두 달이 지난 오늘날까지 부산 앞바다로 출격하지 않음은 무슨 까닭이요.”하고 다그쳤다.   수군이 부산 앞바다로 출격하는 것은 도원수 권율 한사람의 집념에 그치지 않고 임금을 비롯하여 온 조정 온 나라 백성들의 소망.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은 대답이 없었다. 권율은 안골포 등지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만 보내 패전하게 된 책임을 추궁하면서 원균을 곤장으로 체벌한 후 한산도 본영으로 되돌아가 싸우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실랑이를 거듭한 끝에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원균은 감정이 쌓여 두 사람 사이는 원수지간처럼 되었다. 당시 도원수가 통제사 원균을 체벌하는 등 심하게 책임추궁 하게 된 까닭은 이순신의 삭탁관직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권율이 개인적인 심경표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사천에서 곤장을 맞고 본영으로 돌아온 통제사 원균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7월7일 부산의 적 본진을 급습하기 위해 감정적으로 함선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동원된 우리 함선은 거북선 3.4척을 포함한 1백여 척 규모인데 비해 부산포의 적선 규모는 6백여 척으로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였다. 더욱이 적은 남해안에 이은 왜성으로부터 전달되는 아군함대의 내습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만전을 다하고 있었으니 무모한 공격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칠천량에서의 아군 참패는 그 후 엄청난 재앙(災殃)과 아픔을 이 땅에 안겨주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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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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