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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Ⅱ〕丁酉再亂   1. 明‧日間 和議의 결렬      임진년 4월. 그야말로 까닭없이 왜의 무모한 침공앞에 한때 국운이 심히 위태로웠으나 같은 해 6월 중순 이후는 평양까지 진주한 왜군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우리측이 제어(制禦)해 위급을 일단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그 제어력의 요인은 주지하다시피 4월 하순 이후 각지에서 봉기한 여러 의병의 활동과 이순신 휘하 수군의 연이은 승첩으로 호남지방을 끝내 확보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전국은 약 6개월간의 교착(膠着)상태로 접어드는데 그간 적의 전진을 막아낸 공은 우리 관‧의군의 힘이었다. 그러나 이후 교착상태의 지속과 평양성 탈환으로 하루아침에 전세를 완전 역전시킨 공은 뭐니해도 이여송(李如松)을 제독(提督)으로 임명, 대군으로 내원(來援)한데 힘입었던 바 컸다. 이 후 명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尙書:장관) 석성(石星)의 추천으로 강화(講和) 성립을 자청해 8월 말에 평양에 도착한 심유경(沈惟敬)은 고시시 유끼나가(小西行長)와 합의. 평양서북 10리지점에서 향후 50일간 양군이 모두 싸움을 멈추도록 했다. 이는 적의 예봉(銳鋒)을 꺾는데 크게 일조한 결과였다.   어떻던 조총보다 훨씬 우세한 대포로써 평양성을 일격에 탈환(계사년 1월8일)한 이여송은 왜적으로 하여금 일로 남으로 후퇴케 하였다. 서울까지 후퇴한 적군은 이른바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퇴세(退勢)를 만회하였으나 곧 2월 12일 행주(幸州)에서 우리의 권율(權慄) 장군에게 대패함으로써 화의를 제의하며 서울에서 완전 철퇴한 후 남해안에서 왜굴(倭窟)을 구축하고, 보신(保身)에 급급할 수 밖에 없었다.   크게보아 벽제관전투 및 행주대첩 이후 명과 왜국사이에 강화교섭이 본격화됐다. 이때 원군(援軍)인 명군은 희생을 무릅쓰고 적을 끝까지 강공(强攻)하려 들지 않았고, 왜군 역시 많은 인력 손실과 식량 고갈로 어떻게든지 휴전을 모색할 수 밖에 없어 이후 선조 29년(1596) 9월에 이르는 약 3년여 동안 지루하게 강화교섭이 진행되었다. 이에 앞서 우리 나라는 항시 명‧일간의 화의교섭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여 화의가 결렬되기 이전인 선조 27년(1594) 2월에 이미 명나라에 진주사(陳奏使) 허욱(許頊)을 보내어 간사한 왜국과의 강화는 무익함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일간의 화의가 본격화되자 조선에서도 선조 27년 4월과 8월 양차에 걸쳐 사명당(泗溟堂) 유정(惟政)이 서생포(西生浦)에서 적장 가또오 기요마사(加0淸正)와 회담을 벌리기로 했으나 조선은 명분없이 우리 나라를 유린한 왜적과 정상적인 회담을 할 수 없었다. 이후 선조 29년 5월에 수차 왜국에 왕래하던 심유경과 고니시가 돌아오자 동년 8월에는 심유경의 강권으로 돈녕도정(敦寧都正)으로 있던 황신(黃愼)과 대구부사(大邱府使)박홍장(朴弘長)이 정‧부사가 되어 도요또미(豊臣秀吉)를 책봉하기 위한 책봉사 양방형(陽方亨)과 심유경, 고니시 등과 도일하여 9월에 도요또미 히데요시를 만나기로 했다.   이에 앞서 서생포, 죽도의 왜병도 철수하여 조선에는 부산포성의 군사와 가덕도의 군사만 남아 있었다. 도요또미를 왜국왕에 책봉할 명나라 사신과 우리 나라 사신이 히데요시의 본영에 들어가 그를 만나 보았을 때 (선조 29년 9월) 그동안의 명‧일의 화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즉 도요또미는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므로 전세가 유리하다는 판단 아래 명나라에 대하여,   첫째로 명나라의 황녀(皇女)를 왜국의 후비(後妃)로 삼게 할 것   둘째로 전과 같이 교린(交隣)할 것   셋째로 조선의 8도 가운데 4도를 할양(割讓)할 것   넷째로 조선의 왕자 및 대신을 인질(人質)로 삼게 할 것 등의 조건을 내세웠다.   이때 심유경(沈惟敬)은 도요또미의 요구가 명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또미를 왜국왕에 책봉하고 조공(朝貢)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선조 29년 9월에 명나라에서는 사신을 왜국에 파견하여 도요또미를 왜국왕에 봉한다는 책서(冊書)와 금인(金印)을 전하니 도요또미는 이에 크게 반발하고 그것을 받지 않은 채 사신을 명나라로 돌려보냈다. 이로써 3년여에 걸친 명‧일간의 지루한 강화교섭은 결국 결렬되고 말았는데, 그 이면에는 조‧명 양측 화평대표들이 도요또미를 적당히 속여온 것이 탄로난 결과였다.   이로 인하여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시 침략할 것을 도모하게 되었고, 심유경은 본국으로 돌아가 국가를 기만(欺瞞)하였다는 죄목으로 결국 기시처분(棄市處分)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화의를 꾀하던 일은 결렬되고 도요또미는 본국에 돌아와 있던 고니시(小西行長)와 가또오(加藤淸正) 등에게 곧 각자의 영지(領地)로 돌아가 재침준비를 갖추게 하고 이듬해(선조 30년) 2월에 대군을 출병토록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게 된 동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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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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