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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4.泗川海戰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임진 5월 4일부터 8일에 걸쳐 경상도의 연해인 옥포(玉浦)와 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해전 등 1차 출전에서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는 일방적인 승전을 거둠으로써, 경상도 연해지방 군민(軍民)에게 한가닥의 희망을 안겨주는 효과를 거두웠다.   그러나 왜수군의 주력을 섬멸하는 데는 이루지 못하여 제해권(制海權)은 여전히 적의 장악하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첫 번째 출전의 경험을 토대로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 공문을 보내 다음 달 6월 초3일 여수앞바다에 모여 경상도 방면으로 다시 출격하여 왜군을 격멸하자고 제의하고 소속 함선을 거두어 출전준비에 주력하였다.   이즈음 가도로 침략을 확대한 적은 경상도 일대에서도 이미 수륙으로 서진(西進)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5월 27일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적의 함선이 사천, 곤양 등지까지 쳐들어 왔다는 내용의 공문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이순신은 사태가 급박하였음을 인식하고 선제공격으로 적의 서진을 저지할 양으로 우수사 이억기에게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통보한 후 예정을 앞당겨 5월 29일 새벽을 기대하여 함대를 이끌고 여수를 출발하였다.   전선 23척을 주력으로 하는 이번 작전에는 새로 만든 거북선 2척도 처음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1차 출전 때와는 달리 함정의 수는 훨씬 줄었다. 출전길에 오른 이순신은 노량에서 3척의 전선을 거느린 원균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항진해오자 때마침 곤양에서 사천쪽으로 향하는 적선 한척을 추격,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주하자 배를 불살라 버림으로써 서전(緖戰)을 장식하였다.

  뒤이어 당도한 이순신은 중부장(中部將) 어영담(魚泳潭)이 가르키는 대로 사천선창을 바라보니 언덕 아래 물가에는 적장 와끼사까(協坂安治).구오니(九鬼嘉隆).가또오(加藤嘉明) 등이 거느린 누각선(樓閣船)12척이 떠 있고, 그 저쪽 바다까지 다가든 산허리에는 붉고 흰 기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가운데 적병 4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산 꼭대기에는 장막(帳幕)을 친 것도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썰물 때라 바다 수심이 얕아 작은 배들은 몰라도 주력함(主力艦)인 큰배(板屋船)는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공격이 불리할 것으로 판단한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저들은 기승해서 우리를 얕보고 있다. 우리가 거짓으로 퇴각하는 양 물러가면 그들은 어김없이 쫓아올 터이니 넓은 바다에 이르면 반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일 것이오.”하였다. 원균은 전번에 패한적이 있고 해서 분한 나머지 곧 진격하기를 청하였으나 이순신은 조용히 이를 타일러 말하되.“삿도께서는 병전(兵戰)의 도를 잘 모르는 듯 하오.그렇게 좁고 얕은 포구에 쳐들어 간다면 반드시 패할 것이 뻔할 일 아니겠소.”하고 퇴각하여 물러나는 양 하였다.   이렇게 하여 1리(540m)도 채 가기 전에 적병 약 2백여 명이 고함을 지르면서 산에서 내려오더니 반은 배에 뛰어오르고 반은 언덕 아래 진을 치고 포와 조총(鳥銃)을 마구 쏴대는 것이었다. 때마침 저녁 조수(潮水)가 밀려들어 차츰 큰 배도 포구 어디에나 들어갈 수 있게되어 이순신은 갑자기 뱃머리를 돌리게 하여 거북선을 선두로 앞세워 적함선을 향하여 일제히 돌진하였다.   이때 돌격장(突擊將) 이기남(李奇男)과 이언량(李彦良)이 각각 지휘하는 거북선 2척이 흰 파도를 가르고 언덕 아래에서 엄호 사격하는 적의 화망(火網)을 뚫고 선창의 적진으로 돌진했다. 거북선은 마치 철인(鐵人)이 무골충(無骨蟲)을 윽박지르듯 종횡무진으로 적선을 들이받아 파괴해 버렸으며, 판옥선에서는 천(天).지(地).현(玄).황자(黃字)등 각종 총통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피아간에 치열한 화력전을 전개하던 중 이순신은 조선 복색(服色)을 한 사나이 들이 적선에서 이쪽을 향해 포를 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는 어디선가 적에게 포로 잡힌 병사들이 저들에게 뺏긴 우리 포를 쏘는 것이 분명했다. 잡힌 몸이라 자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세상에 어찌 이럴 수도 있을까? 이순신은 크게 분격하여 먼저 그 배를 쳐부셔버리는 것이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도 한꺼번에 달려들어 철환(鐵丸)과 장편전(長片箭).피령전(皮翎箭)과 화전(火箭) 그리고 각종 총통을 우뢰같이 퍼부으니 그 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는데 적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바뀌어 적들은 중상으로 엎어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부축하여 끌고 달아나는 자가 꼬리를 물었다. 이어서 적들은 기를 쓰고 높은 언덕위로 기어올라 도망치기 시작하였고 감히 다시 나와 싸우려 하지도 못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서 쳐부수니, 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왜선은 모조리 격파되었다.   격전의 와중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고, 군관 나대용(羅大用)과 전봉사(前奉事) 이설(李渫)이 부상했으나 죽지는 않았다. 또 우척후장(右斥侯將) 김완(金浣)은 육지의 적진에서 계집아이 하나를 구했고 참퇴장(斬退將) 이응화(李應華)는 적병 몇 사람의 목을 베었다. 이 때에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둠이 깔리자 이순신 함대는 뱃머리를 돌려 항로를 남으로 잡고 사천 땅 모자랑개(毛自郞浦:현 용현면 주문리)에 와서 닻을 내리고 진을 쳐 밤을 새웠다. 여기에서 이순신은 측근자로 하여금 잔등에 박힌 탄환을 끄집어내게 하여 비로소 진중에서 그가 부상한 것을 알고 모두들 매우 놀랬다.   이순신은 이날의 전황(戰況)과 전과를 그의 《난중일기》(임진 5월 29일자)에서,   “29일 맑음.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6월 3일 만나기로 약속)혼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곧장 노량에 이르러 미리 약속한 만날 곳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을 만났다. 왜적이 있는 것을 물으니 적은 지금 사천 선창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바로 거기에 가보니 왜인들은 벌서 상륙해서 산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산 밑에 벌여 놓았는데 항전하는 태세가 아주 튼튼했다.(중략)적은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명인지 알 수 없었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으며 나도 왼편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뚫고 나갔으나 중상에는 이르지 않았다. 활군과 격군중 탄환 맞은 군사 또한 많았고, 전선 13척을 불태우고 물러 나왔다.”고 적고 있다.

  위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중상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이 상처가 후일에도 이충무공을 얼마나 괴롭혔는가는 그가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에게 보낸 친필 서장에서, “(전략) 어깨뼈를 깊이 상한데다가 또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상한곳이 헐어서 궂은 물이 늘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밤낮없이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씻건만 아직 쾌하지 못하여 민망스럽습니다.”고 하였다. 이처럼 무거운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이어지는 당포(唐浦), 당황포(唐項浦), 율포(栗浦)해전에서 연달아 승첩을 거둔 것은 오로지 이충무공의 불굴의 상무정신(尙武精神)과 투철한 호국관(護國觀)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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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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