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壬辰倭亂과 泗川 ● 序 言   선조 25년(1592)부터 동 31년(1598)까지 전후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느닷없이 쳐들어 온 왜국(일본)과의 싸움이 임진년(壬辰年)에 일어났으므로 우리는 이른바 ‘임진왜란’이라 하며.특히 2차 침입을 독립하여 말할 때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일컫는데 저쪽에서는 소위 분로구.게이?오(文祿.慶長)의 역(役)이라 부른다.이같이 16세기 말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그 원인이야 어디에 있던 간에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왜의 삼국 모두 국가의 운명과 연계된 당시 동북(東北)아세아를 뒤 흔든 미증유(未曾有)의 대전란(大戰亂)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왜란을 당하여 초전 패배의 제일 큰 원인은 무어니해도 군제상(軍制上) 소위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에 있었던 것처럼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전국이 왜군에게 무참히도 짓밟히다가 다행히 남해 바다에서 이충무공(李忠武公)이 이끄는 수군의 대활약.영남 지방의 유림(儒林)을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義兵)의 활동.명나라의 내원(來援).그리고 내 고장은 내가 스스로 지킨다는 향토수호의 정신으로 굳게 뭉친 향민들의 피나는 항쟁 등으로 저후 2차에 걸친 왜군의 침입은 결국 침략의 원흉(元兇) 도요또미(豊臣秀吉)의 죽음과 조선의 승리로 악몽 7년 전쟁은 끝맺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7년동안 전란이 휩쓸고 간 조선사회는 피폐할 때로 피폐하여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도 부인할 수 없다.그동안 무지한 왜적들은 점령하의 관아(官衙)나 사찰(寺刹).민가를 노략질하고 불을 질러 살육(殺戮)을 자행하였고.생사람을 잡아다 본국에 끌고가는 한편 심지어는 산사람의 귀와 코를 베어 그들의 전공공물(戰功貢物)로 바치기까지도 하였다. 게다가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문화재의 손실 역시 막대하였다.이로 인해 인구의 감소와 유망(流亡).농토의 황폐화는 농촌사회를 거의 밑바닥부터 붕괴시켰다.   특히.우리 경남지방은 임진왜란의 주무대였기 때문에 그 피해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으며 이 가운데서도 사천은 왜적의 장기 유둔지(留屯地)였기 때문에 전란의 피해가 극심하였다.4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당시의 치열했던 전화(戰禍)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이른바 당병무덤(현 조∙명군총).당병쏘.병둔(兵屯).왯골.핏다리 따위의 기구한 지명들이 당시 치열했던 선진리성(船津里城:당시는 新寨라 함)싸움의 생생한 전흔(戰痕)들인 것이다.   일제때 일인들은 이곳 사적지(史蹟地)가 그네들 선조의 전승라 하여 성터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전첩비(戰捷碑)를 세우는 한편.그들의 국화인 천여주(千餘株)의 벚나무를 심었는데.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따라서 조∙명군총은 당시 국난을 구하기 위해 왜적과 치열하게 싸우다 산화한 조∙명연합군 희생자의 무덤이다.비록 패배의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이기는 하지만 호국정신을 드높이는 산교장(敎場)으로 삼기 위해 해마다 사천 향민들의 정성으로 의범(儀範)을 받들고 있다.   4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이같이 나라를 위하고 조상을 위해 그리고 자손을 위해 싸웠던 당시의 우리 선조들과.우방의 국난을 구하기 위해 이국(異國)땅에까지 와서 적과 싸우다 고귀한 목숨 바친 고혼(孤魂)을 추모하고 현창(顯彰)하는 소위는 이제 이땅에 두 번다시 그와 같은 참화를 겪어서는 안되겠다는 굳은 결의의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本稿)에서는 비록 소략하고 단편적인 것이기는하나 임란사(壬亂史)를 통해 향토사의 일면을 재조명(再照明)해 보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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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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