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 사천현감(泗川縣監)의 짚동몰이   때는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에서 근세(近世)로 접어들 즈음.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가 청산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19세기 중엽(中葉)의 조선 사회는 정통적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어 그야말로 어지롭고 역겨운 세상이었다.   그것은 김씨 일문이 정권을 전단(專斷)하면서 부터 천주교 금압을 내세워 진보적인 정치세력을 모두 숙청하였을 분 아니라 소위 삼정문란(三政紊亂)이 절정에 다다라 백성들은 다시 토탄(土炭)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세도정치 체제에 대항하며 19세기 초엽에는 이미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고, 중엽에는 진주(晋州) 지역을 비롯하여 거의 전국에 걸치는 이른바 민란(民亂) 즉, 농민운동이 폭발하였다.   그 직접적인 동인은 위로 권세잡은 양반 지배체제의 무능과 부패, 아래로는 탐학오리(貪虐汚吏)들이 저지른 불법과 수탈이 극에 달하여 전체 농민에게 끼치는 폐해(弊害)가 컸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쌓여온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정(還穀政)의 3정 문란은 급기야 진주민란(1862년.壬戌)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이는 온갖 역(役:병역.부역 등을 두루 일컫는 말)과 온갖 세(田租)와 공물(貢物) 진상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양민(良民)과 천한 백성들은 관장(官長)과 재향(在鄕) 토반(土班:대를 거듭하여 일정한 지방에서 붙박이로 사는 양반계층)에게 수없이 털리우고 벗기우고 빼앗긴 데서 그 원인이 있다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여느 고을과 마찬가지로 사천이라고 해서 다를바 없었다.   진주민란의 영향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경남지역에서 갑오년(甲午年.1894)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의 발단이 되었던 민요(民擾)가 곳곳에서 일어나니 그 중에 하나가 사천에서 일어난 민요이다.   사천 민요(泗川民擾)의 원인은 물론 관장과 이속(吏屬)들의 불법적인 횡포에서 기인된 것이지만, 당시 김모(金某)현감이란 자는 부임해 오자마자 이속들과 영합하여 목민관(牧民官)으로써의 직분을 망각한 채 오르지 가렴주구(苛斂誅求)에만 급급하여 향민(鄕民)들의 원성을 샀던 사건이었다.   따라서 지방 통치구조와 관련하여 읍치(邑治:사천읍성 안)에 거주하면서 관역(官役)을 세습해온 향리(鄕吏)들은 수령이 바뀌어올 때마다 영합(迎合)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문필(文筆)로서 온갖 부정과 농간(弄奸)을 부리는 한편 심지어는 전세액(田稅額) 결정에 자신의 것조차 개개 농민에게 할당하는 등, 민폐를 끼침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향촌(鄕村)에서는 치가(治家)에 근검하고 산재(散財)로서 휼빈(恤貧)하며 원근에서 덕망과 신의가 두터웠던 한 사인(士人)이 있었으니, 그가 정동면에 사는 동계거사(東溪居士) 최한범(崔漢範)이란 분이었다.   그는 성품이 엄정하고 강직하여 의기(義氣)가 탁월한 분으로 관장과 이속들의 이와 같은 횡포를 참아 좌시하고 있을 수 마는 없었다. 그래서 분연히 일어나 사천의 장두(狀頭)로서 향민 수백명을 모아놓고 이들에 대한 규탄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읍치에 쳐들어가 서리가(胥吏家) 십여호를 불질렀다.

한편 급보를 접한 진주 감영(晋州監營)에서는 영교(營校) 수십명을 파견, 이를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분노한 민중들은 이번에는 현감이 집무하는 청사 즉, 동헌(東軒)으로 쳐들어가 드디어 김모 현감을 붙들어 내어 응징하였다. 사태가 이쯤 되자 상사(上司)에서는 그를 곧 파직(罷職)시켜 쫓아 내고, 또 서리배들은 각기 응분의 죄값을 치루었다. 따라서 명을 내려 발창(發倉:창고의 문을 염)하고 토탄에 빠져 허덕이는 농민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구휼(救恤)하니, 애오라지 흉흉한전 민심은 이로써 가라앉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사천 민요를 전후하여 역대 현감들 가운데는 어질고 착한 선치(善治)로서 칭송의 소리가 높은 수령도 없지는 않았으나, 대개의 수령은 못된 짓으로 파직되어 나간 자가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강바닥에 굴러다니는 강유석(江流石)처럼 자기의 짧은 임기동안, 중앙에서의 빈번한 정변(政變)으로 자신들의 진퇴문제에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이윽고 권력 남용과 사리 추구에 열중하다가 끝내는 파직되어 나간 자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향리는 이와 결탁하여 행패를 자행하였다. 이들의 부정부패의 근본 원인은 녹과(祿科)와 급전(給田)없이 생활상의 보장이 전혀 없는데 있다할 것이다. 세습직(世襲職)으로서 많은 관역(官役.또는 使役)만이 강요되었고, 게다가 사회신분적으로 모욕적인 대우를 받아 사회적인 체면이나 염치(廉恥)를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수령에 대해서는 영합을 일삼았고, 이에 따른 보상은 향리들의 부정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결과를 빚은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병폐 속에서 전개된 19세기 후반기는 크게 보아 보수와 진보의 갈등 속에서 정변과 침탈이 계속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백성들이 겪어야할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하겠다. 작게로는 사천의 민요(民擾)도 이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며, 세상에 들어나지 않은 소요(騷擾) 또한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예컨대 고장에 전하는 ‘사천 현감의 짚동몰이’와 같은 이야기도 그 중에 하나로서 이를 대충 엮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사천의 인근 고을인 고성에 박씨(朴氏)성을 가진 사십대 안팎의 한 거부(巨富)가 살았다. 가산이 넉넉하고 집안이 융성하니, 문득 벼슬자리 하나 얻어야 되겠다는 욕심이 들어 어느날 귀한 재물을 싸 들고 서울 모 판서(判書)댁을 찾았다. 판서에게 지현(贄見:예물을 가지고 가서 뵘)하고 벼슬 하나 줄 것을 간청하니 기다리라는 분부다. 물러나 때때로 뵈옵고 청원한지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벼슬은 안주고 한결같이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박부자는 판서에게 많은 재물을 바쳤고.청지기에게도 적지 않은 뇌물을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서울에 머물면서 오로지 벼슬 하나 얻고자 거듭상납을 하여온 것이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흐르고보니, 수천석 살림은 거들이 나고 가인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가족들은 곤경에 빠져들어 기아에서 헤매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그는 벼슬은 못얻고 그렇다고 집으로 내려갈 수도 없는 형편이라, 막다른 골목에 이판사판으로 이판(吏判)에게 찾아가.“가산이 탕진되어 가족이 모두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 하오니, 저의 어리석은 생각을 누구에게 원망하며 탓하겠습니까? 이제 나는 죽을 수 밖에 없으니 대감은 오래도록 부귀영화 누리고 잘 사시요”하고 눈물을 뿌렸다. 그러자 판서대감은 그제야 “여보게 죽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자기 집에서 묵도록 이르고선 발걸음이 빠른 청지기 한 사람을 불러 고성에 내려가 그 집 형편사를 살펴 오도록 지시하였다. 청지기가 내려가 박부자의 집안 상황을 살피는데. 집은 거의 폐가가 되다싶이 하였고, 자식들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때마다 끼니 걱정을 하는 형편인지라 이를 그대로 대감에게 고했다. 몇일 후 이조(吏曹)에서 퇴청한 판서는 박부자를 불러 놓고 이르기를 “그동안 나를 믿고 허송세월 하느라 마음고생이 많았네. 자네의 향리에서 가까운 사천고을의 원(員)자리를 주선하였으니 얼른 그 곳으로 내려 가게”하는 것이 아닌가. 원으로 부임하게 된 박부자는 얼마후 예전에 탕진한 재산이 아까워서 한 고을의 목민관(牧民官)이라는 신분을 아예 잊은 채 이로부터 영합한 향리들과 짜고 탐학질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향리의 불법 농간과 원의 탐학질에 이골난 고을 백성들은 살아가는데 도저히 배겨날 수가 없어 어느날 드디어 들어 일어나 아문(衙門) 앞에서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서 현감을 짚동에 몰아 관아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옛날 동네망신을 시킨 사람이 있으면 ‘동네재판’에 부쳐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벌이 내렸는데.멍석에 죄인을 둘둘말아 뭉둥이 찜질을 하거나 구경나온 마을 사람들이 밟고 넘어가는 ‘멍석말이’의 습속이 있었던 것이다.이에 착안한 군중들은 멍석보다도 더 가혹한 짚동에다 말아서 성 밖으로 밀어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바로 상사에게 알려 곧 파직이 되는 것이다.

이 광경을 숨어서 엿들은 아전(衙前) 하나가 헐레벌떡 동헌으로 달려와서 숨을 내몰아 쉬며. 아전 : “사또 큰일 났오이다.” 싸또 : “무엄하게 무슨 호들갑을 그리 떠느냐?” 아전 : “지금 아문 앞에서는 수십 수백명이 모여 사또를 ‘짚동몰이’하여 관아에 서 내쫓는다고 하며. 곧 동헌으로 들어닥친다 합니다.” 사또는 이 소리를 듣고 비로소 아차하였다.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심했던 것 같았다.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 후회가 막급(莫及)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는일, 그는 이에 대처할 방안을 생각했다. “거기 호장(戶長), 이방(吏房) 없느냐?” “네 대령 하였나이다.” “지금 너희들은 곧 바로 아문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일러라. 내가 그들의 뜻을 따를 것이다. 그러니 짚동몰이인가 하는 소란피우기 전에 그들의 대표를 동헌으로 모시고 오도록 하여라”고 일렀다. 이속들은 큰일이다 싶어 급히 아문으로 나가 사또의 위와 같은 뜻을 군중에게 전했다. 이에 군중들은 사또가 제발로 물러 간다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굳이 짚동몰이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대표 몇 사람이 뽑혀 동헌으로 갔다. 대표를 맞아들인 사또는 다소 어늘하게 말하였다. “여러분! 뵈올 낯이 없소이다. 나는 여태껏 고을 원 한자리 얻을려고 수천석의 재산을 날렸소이다. 해서 잃었던 살림을 벌충할까 잘못 생각하여 이렇게 못된 짓으로 고을 백성에게 누를 끼치게 되었소. 마땅히 내가 저지른 죄값으로 조용히 물러가려 하오니, 제발 멍석말이인가 짚동몰이 같은 것은 하지 말아 주기를 부탁하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매관매직(賣官賣職)이 보편화된 마당에 후임자가 와도 역시 나와 같은 탐학질 할 것은 뻔할 노릇이오. 만약에 죄를 용서하고 그대로 정사(政事)를 계속 보겠끔 놔 두신다면 온 힘을 다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겠소”하며 눈시울을 적시는 것이었다. 대표들이 듣고 보니 사또의 말이 옳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것은 사또의 뉘우침이 참되고 진실됨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대표들은 서로 의논 끝에 짚동몰이는 철회하고 임기동안 선치(善治)를 잘해줄 것을 거듭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한 고을의 수령으로 새로히 태어난 기분으로 여러 이속들을 단속하는 한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직 선정에만 힘쓰니, 현감에 대한 원성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임기를 마치고 고을을 떠날 때 석별을 아쉬워 하며 칭송의 소리가 자자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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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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