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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묘수좌(猫首座)의 이야기   때는 조선조 중종 29년(1534), 대간(臺諫:조선시대 간언(諫言)을 관장하던 관리. 사헌부.사간원의 관직을 통틀어 말함) 송인수(宋麟壽)가 김안로(金安老)등의 폭정을 배척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 무렵 어떤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인수가 채무택(蔡無擇)과 안로에게 붙었다가 그 뒤에 사당(邪黨)임을 깨닫고 배반했다. 안로가 심히 그를 미워하여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임명해 쫓아내니 인수가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고을을 버리고 올라 왔다. 이 때문에 논죄했는데 법률 밖으로 벗어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마음아파 했다.   당초 김안로가 호오(好惡)의 뜻을 밖으로 내보이고 또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파산된 사람들을 서용(敍用)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는데, 이는 실제로는 그의 본 마음은 아니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사림(士林)의 환심을 사려는 수작이었다. 인수는 바로 이 술책에 넘어가 그에게 귀부했던 것이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묘수좌(猫首座)의 설화를 지어내어 그를 풍자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과연 들어맞았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늙은 고양이가 있었다. 발톱이나 어금니도 모두 못쓰게 되어서 쥐를 잡아 먹는 재주도 이미 다했다. 쥐 잡아먹을 계책이 서지 않자 귓속의 털없는 부분을 뒤집어 내어 머리에 덮어쓰고 다니며 부르짖기를.“나는 이제 자비심을 발하여 삭발하고 중이 되었노라. 어떻게 부처님을 모시고 함께 정진하는 공부를 지어갈 수 없겠는가.\" 하였다.   쥐들은 그러나 여전히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들어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머리를 깍은 것 같은 모양을 엿보고 나서 크게 그 말을 믿게 되어 나와서 응접하고는 늙은 고양이를 윗자리로 추대하여 묘수좌라 하였다.(推尊老猫爲猫首座)   수좌는 제일 상석에 자리잡고 쥐들은 대소의 차례대로 서서 법석(法席)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빙 둘러 한 바퀴 돌 즈음에 어린 쥐의 행렬이 수좌의 입 앞에 당하고 앞의 행렬이 부처님 뒤편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되면, 잽싸게 후려잡아 냉큼 삼켜버리곤 하였다.   이렇게 해서 무리들이 날로 줄어들자 어떤 자는 수좌의 수행이라고 의심을 하게 되었는데.이에 대해 칠석같이 믿게 된 자들은 성을 내기까지 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우겨대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수좌의 똥 속에 쥐의 터럭이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늙은 고양이의 술책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 얘기의 작자는 사림(士林)을 쥐에 비유하려 했던 것이 아니고, 다만 그 뜻을 취해서 비꼬았던 것이니, 김안로를 고양이(猫首座)에 비유했다고 하는데 대해서는 그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실 옛날에도 이묘(李猫)가 있었던 것이다.(古亦有李猫焉)      • 후 기(後記)   이 묘수좌의 이야기는 앞에서 말했듯이 송인수선생이 사천에서 귀양살이 할 때, 어떤 사관이 지은 글을 《중종실록》에 실었던 것인데 이를 발췌한 것이다.   선생께서는 사천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 후생(後生)들에게 글을 가르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에 수학한 한 분이 구암(龜岩) 이정(李楨)선생이다. 이구암은 선생에게서 학문을 강마하여 대과에 급제한 후 4조(중종․인종․명종․선조)를 섬긴 문신(文臣)이다. 유학자(儒學者)로서 우리 고장 사천을 빛낸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로 송인수 선생의 행적을 살펴보면, 조선 중종 때의 명신으로 자(字)는 미수(眉叟)요. 호(號)는 규암(圭菴)으로 1487년(성종 18) 건원릉(健元陵) 참봉 세량(世良)의 아들로 태어났다.   1521년(중종 16)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홍문관.승문원.교서관 등의 정9품 벼슬)로 있다가 1526년(중종 21)수찬(修撰:홍문관의 정6품 벼슬)을 거쳐 대간으로 있을 때 김안로의 재 집권을 막으려다가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된 뒤 병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안로의 미움을 사서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 등이 제거되자, 승지(承旨:승정원에 소속되어 왕명의 출납을 맡아봄) 등을 거쳐 예조참판(禮曺參判)을 역임하다가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 관찰사로 또다시 좌천되었다가 뒤에 다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서 파직되어 청주(淸州)에서 은거중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로 추앙을 받았다.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덧붙여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에 일어나 사건으로 이상정치 즉, 온 나라의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천민들이 춤추는 세상의 왕도정치를 주장하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일파를 몰아낸 사화로 조선시대 4대 사화의 하나이다 남곤(南袞).심정(沈貞) 등 훈구재상(勳舊宰相)이 유교를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으로 삼아 문란한 기강을 바로잡고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역설하던 조광조.김정(金淨).김식(金湜) 등의 젊은 선비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건을 말한다.   이어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명종 즉위년)척신인 윤임(尹任:大尹의 거두)과 윤형원(小尹의 영수)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의 화옥(禍獄)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을,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는데,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이 득세하여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를 많이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하자 12세의 명종이 즉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니 그의 동생인 윤원형이 득세하여 대윤 일파를 제거하고 자기의 세력을 구축한 후 정권을 잡아 권세를 부렸다. 이 때 윤임 일파인 사림 10여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중의 한 분이 규암 송인수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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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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